제주의 늦봄에서 여름사이 더위를 잊는 음식으로 제격인 물회!
5~6월에는 자리돔이 제철이라 고소한 맛이 제대로다. 7~8월 한치철이 오기 전 자리돔 물회를 맛보시라.
제철에는 제주 하나로 마트에 가면 자리돔 세꼬시도 보인다.  

어진횟집 자리물회


애월농협 하나로 자리돔 세꼬시와 고등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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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은 흐리고 안개 낀 1100도로 따라 구불구불 영실입구로 가는길, 구름과 안개에 꽃구경은 제대로 하려나 걱정은 잠시, 입구부터 바람과 새소리에 시원한 공기를 품은 한라산이 반겨준다.
 
본격 산행은 특별함이 없으나 숲길을 벗어나니 병풍바위와 군데군데 분홍빛 철쭉이 한창이다. 올라갈수로 고사목과 구상나무가 어우러진 꽃밭을 거닌다.
 
선작지왓은 조릿대가 장악했으나 1600M 평탄한 고지에 구불구불 탐방로와 철쭉, 남벽이 어우러진 풍경이 김종철의 <오름 나그네> 속 '늦봄, 진달래꽃 진분홍 바다의 넘실거림에 묻혀 앉으면 그만 미쳐 버리고 싶어진다.'다는 옛모습은 아니지만 충분히 즐길만하다.
 
영실 코스에서 뒤를 보면 산방산과 범섬, 대정과 강정으로 바다와 이어지는 파노라마가 병풍바위 옆으로 펼쳐지고 윗새오름 지나 만세동산으로 내려오는 길 구름에 덮였던 제주시와 애월, 멀리 추자도까지 시원한 전망을 보여준다.
 
여기저기 들꽃과 조릿대 사이로 지나가는 노루, 온갖 산새의 울음까지 천상의 정원이 따로없다.
 
영실~병풍바위~족은윗세오름전망대~선작지왓~윗세오름대피소~만세동산~사제비동산~어리목 코스
 
 
 
[산행 Tip]
  • 성판악과 관음사 코스로 오르는 백록담 정상 산행은 사전 예약이 필수지만, 영실~어리목 구간은 예약없이 찾을 수 있다.
  • 자차를 이용하면 영실이나 어리목 주차장으로 원점회기 산행을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 제주버스터미널(서귀포쪽 출발은 제주컨벤션) 출발하는 240번 버스를 타고 영실로 올라서 어리목으로 내려오는 코스가 올라가는 구간이 짧고, 경사도를 고려했을 때 추천!
  • 간단한 요깃거리를 준비해 윗세오름 대피소나 족은윗세오름 전망대에서 점심을 먹기 좋다.
  • 선작지왓은 털진달래와 산철쭉은 5~6월에 분홍빛 꽃구경 적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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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지상주의, 자유와 시장경제 체제를 기반으로 성공과 빠른 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은 특정 계층에 권력과 자본이 집중되어 양극화와 사회갈등을 조장할 수 밖에 없다. 부자이거나 빛나는 자리에 안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 사회적 연대와 공동체 회복이 필요하지 않을까?


[본문발췌]


능력주의 신화는 대체로 세 가지 명제로 이루어진다.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며,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한다.

능력주의 논쟁은 구원을 논의할 때 다시 기독교에 등장한다. 신앙이 독실한 사람은 교리를 따르고 선행을 함으로써 구원을 얻어낼 수 있는가, 아니면 오직 신이 각자의 생활 태도와 상관없이 구원받을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가? 첫 번째가 정당해 보인다. 권선징악의 틀에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 신의 전능함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구원이라는 게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며 따라서 받아 마땅한 것이라면 신은 거기에 얽매이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의 능력을 인정해야만 하게 된다. 구원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구제한다'는 의미가 되며, 따라서 신의 무한한 힘에는 한계가 생기게 된다.두 번째는 구원을 노력과 무관한 선물로 보며, 따라서 신의 전능성을 확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신이 세상 모든 것의 주재자라면 악의 존재 역시 주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이 정의롭다면 그의 힘으로 방지할 수 있는 고통과 악이 왜 발생하도록 두는 것인가? 신이 전능함에도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가 정의롭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학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 견해가 병립하기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매우 어렵다. '신은 정의롭다.' '신은 전능하다.' '악은 존재한다.'이 난제를 푸는 방법 하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로써 악의 존재에 대한 책임은 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진다. 만약 신이 어떤 규범을 세웠을 뿐 아니라 개인에게 그것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을 자유를 부여했다면, 우리는 옳은 것 대신 잘못된 것을 선택한 데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나쁜 일을 한 자는 현세 또는 내세에서 신의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그의 고통은 악이 아니라 위반에 대한 징벌이다.


우리가 자유로운 능력의 소유자이며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공도 실패도 할 수 있다고 보는 생각은 능력주의의 일면일 뿐이다. '성공한 사람은 그럴 만해서 성공했다'는 신념이 공통적으로 중요한 포인트다. 이러한 승리주의적 측면으로부터 승자들 사이의 오만, 패자들 사이의 굴욕이 나온다. 이는 세속 사회에 남아 있는 섭리론의 도덕적 어휘를 반영한다. "운 좋은 사람은 운이 좋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경우가 드물다." 막스 베버는 이렇게 보았다. "이를 넘어서, 그는 자신이 그런 행운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납득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이 '그럴 만하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이들에 비해 '그럴 자격이 있다'고 확신하기를 바란다. 그는 또한 운이 나쁜 사람들도 자신의 당연한 업보일 뿐이라고 믿기를 바란다.


문화역사학자인 잭슨 리어스는 미국의 공공 문화를 운의 윤리의식과, 보다 강력한 자수성가의 윤리의식이 벌이는 불공평한 각축장으로 보았다. 운의 윤리는 인간의 이해와 통제력을 벗어나는 삶의 차원을 중시한다. 세상이 반드시 각자의 능력에 맞는 보상을 주지는 않기 때문에, 인생에는 신비, 비극,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다음과 같은 <전도서>의 내용은 이런 윤리의식을 잘 표현한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았다. 빠른 경주자라고 먼저 도착하는 것이 아니다. 강한 자라고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지혜로운 자라고 음식을 얻는 것이 아니다. 명철한 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다. 기능을 갖춘 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다. 이는 때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로다."


부와 건강을 상과 벌의 문제로 보는 관점은 능력주의적 생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운이나 은총의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전적으로 우리 운명을 책임진다고 여긴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가 취한 선택과 삶의 태도에 대한 상 또는 벌인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자수성가와 자기 통제의 윤리를 확고히 찬양하며, 능력주의적 오만에 빠질 길을 열어준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이 '신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허리케인이든 쓰나미든 나쁜 건강이든 희생자들이 겪는 재난을 자업자득이라 여기고 희생자들을 업신여기게 된다.


"도덕 세계의 궤적은 길다. 그러나 반드시 정의를 향해 휘어진다." - 마틴 루터 킹(시어도어 파커 목사의 셜교 참조)


우리 자신을 자수성가하고 자기충족적인 존재로 여길수록, 우리보다 운이 덜 좋았던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힘들어진다. 내 성공이 순전히 내 덕이라면 그들의 실패도 순전히 그들 탓이 아니겠는가. 이 논리는 능력주의가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키는 논리로 기능한다. 우리 운명이 개인 책임이라는 생각이 강할수록 우리가 다른 사람까지 챙길 필요를 느끼기 힘들다.


세계화 시대는 노동계급에게 큰 폭의 불평등 확대를, 또한 임금의 정체를 안겨주었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10퍼센트는 대부분의 이익을 챙겼고, 하위 50퍼센트는 거의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진보적, 자유주의적 정당들은 이 불평등을 직접 다루지 않았고, 경제의 구조적 개혁을 외면했다. 대신 그들은 시장 주도적 세계화를 받아들였으며, '기회의 평등을 늘리기 위한' 정책을 통해 불평등한 혜택을 조장했다. 그것이 사회적 상승 담론의 포인트였다. 성공의 길에 놓인 장애물을 모두 제거할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이 동등한 성공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인종이나 출신 계층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 재능과 노력이 허락하는 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회가 정말로 평등하다면 꼭대기에 선 사람은 그 성공과 관련된 보상을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 이것이 능력주의의 약속이었다. 더 많은 평등의 약속이 아니라, 더 많고 더 공정한 사회적 이동 가능성의 약속 말이다. 이는 소득 사다리의 단 사이 거리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서로 먼저 사다리에 오르려 경쟁하는 과정에서만 공정함을 추구할 뿐이다.


좋은 통치는 실천적 지혜와 시민적 덕성을 필요로 한다. 공동선에 대해 숙고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도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함양될 수 없다. 최고의 명문대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최근의 역사적 경험은 도덕적 인성과 통찰력을 필요로 하는 정치 판단 능력과 표준화된 시험에서 점수를 잘 따고 명문대에 들어가는 능력 사이에 별 연관성이 없음을 보여준다. '최고의 인재들'이 저학력자 동료 시민들보다 통치를 잘한다는 생각은 능력주의적 오만에서 비롯된 신화일 뿐이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음을 주의해야 한다. 능력주의에서 중요한 건 '모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다리의 단과 단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문제가 안 된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하려 한다.


생산물이나 기여는 항상 그 가격으로 가치가 측정된다. 윤리적 가치나 인간 생활에서의 중요성 등과는 별 관계가 없다. 어떤 생산물의 금전적 가치는 '수요'에 따르며, 이는 다시 소비자 대중의 취향과 구매력, 그리고 대체재의 유무 등에 따른다. 이 모든 요인들은 대체로 경제 시스템 자체가 작동되면서 창출, 조절된다. 따라서 그 결과는 자체적으로 그 시스템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만한 윤리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 - 프랭크 나이트


비록 자유시장 자유주의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 모두 능력을 정의의 제일조건으로 배제하고 있지만, 둘 다 결국에는 능력주의로 기운다. 둘 다 성공에 대해 도덕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를 거르지 않으며, 능력주의가 빠지기 쉬운 함정 즉 승자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이라는 함정을 피하지 못한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들이 개인 책임을 분해 관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재능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이 개인의 천부적 재능은 행운의 산물이며 따라서 도덕적 관점에서 자의적이라고 주장하기는 해도, 재능 특히 천부적이거나 내재적인 재능을 놀랍도록 중시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능력주의는 지성과 교육을 고등교육의 상아탑에 온통 몰아넣어 두고서, 누구에게나 그 상아탑에 들어올 공평한 경쟁이 보장되리라고만 약속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접근권 배분은 노동의 존엄을 떨어뜨리며 공동선을 오염시킨다. 시민교육은 담쟁이가 넝쿨진 캠퍼스 못지않게 지역사회 대학, 직업훈련소, 노조에서 잘될 수 있다. 항상심 있는 간호사와 배관공들이 야심적인 경영 컨설턴트보다 민주적 논쟁에서 뒤떨어질 까닭은 없다.


그는 우리가 선별과 분투의 도가니에서 한 발 물러나 그냥 지긋이 도마뱀을 바라보기를, 그 동물이 얼마나 신비한 존재인지를 충분히 보고 즐기기를 원했을 것이다.


일은 경제인 동시에 문화인 것이다. 그것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방법이자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얻는 원천이다. 그래서 세계화가 일으킨 불평등이 왜 그토록 강력한 분노로 이어졌는지 설명된다. 세계화에 뒤쳐진 사람들은 다른 이들은 번영하는 동안 경제적 곤경에 처했을 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종사하는 일이 더 이상 사회적으로 존중받지 못함을 깨달았다. 사회의 눈에, 그리고 아마 스스로의 눈으로도 그들의 일은 더 이상 공동선에 대한 가치 있는 기여라고 비쳐지지 않는다.

양극화는 심화되고, 다수의 노동자들이 무시당하고 외면당한다고 여기고 있어 사회적 응집과 연대의 원천이 절망적으로 필요한 지금, 일의 존엄에 대한 보다 견실한 생각이 주류 정치 논의로 파고 들어야 하리라 본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조짐은 없다. 왜 그럴까? 왜 주된 정치 어젠다는 정의의 기여적 측면을 거부하며, 그 기반이 되는 생산자 중심적 윤리를 외면하는 것일까?해답은 단지 우리가 소비를 너무 사랑한다는 데 있을지 모른다. 또한 '경제성장이 최고'라는 믿음 역시 한몫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더 깊은 곳에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약속하는 물질적 혜택을 넘어 경제성장을 공공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는 까닭은 우리 사회처럼 갈등이 많은 다원적 사회에 매력적이라서다. 이는 골치 아픈 도덕 논쟁을 우회할 빌미가 된다.

인생에서 뭐가 중요한지에 대한 견해는 제각각이다. 잘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 일치가 안 된다. 소비자로서 각자의 기호와 욕망은 다르다. 이러한 차이 앞에서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한다는 것은 경제 정책의 가치중립적인 목표로 여겨진다. 소비자 복지가 목표라면 각자 다양한 선호에도 불구하고 많은 편이 적은 편보다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성장 과실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 충돌은 당연히 일어난다. 따라서 분배 정의에 대한 논쟁은 필요하다. 그러나 '경제 파이를 키우는 게 작아지는 것보다는 낫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라 여겨진다.이와 달리 기여적 정의는 인간의 좋은 삶이나 최선의 인생 방식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미국 공화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헤겔에서 카톨릭 사회교육에 이르기까지 기여적 정의의 이론은 '우리는 공동선에 기여할 때만 완전한 사람이 되며, 우리가 한 기여로부터 우리 동료 시민들의 존경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이 전통에 따르면 근본적인 인간욕구는 우리가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일의 존엄성은 그런 필요에 부응하는 우리 역량의 발휘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좋은 삶을 사는 것이라면 소비를 '모든 경제 활동의 유일한 목표이자 대상'이라 보는 것은 잘못이다. GDP의 규모와 분배에만 관심이 있는 정치경제학은 일의 존엄성을 떨어트리며, 시민 생활을 황량하게 만든다.

급여를 생각해 보면, 이런 저런 직업들이 각자의 일 성과에 대해 참된 사회적 가치를 어떤 때는 과대하게 어떤 때는 과소하게 평가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오직 열렬한 자유지상주의자만이 부유한 카지노 왕의 사회적 기여가 소아과 의사의 기여보다 정말로 1000배나 가치 있다고 떳떳이 주장할 수 있으리라. 시장 사회에서는 우리가 버는 돈과 우리가 공동선에 기여한 내용의 가치를 혼동하기 쉽다. 시장 주도적 사회에서 물질적 성공을 도덕적 자격의 증표로 해석하는 일은 지속성 있는 유혹이다.

오렌 카스, <한때, 그리고 미래의 노동자> 카스는 미국에서 노동의 존엄을 일신하려면 공화당이 자유시장에 대한 전통적 선호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업의 법인세를 줄이고 자유무역을 진흥하여 GDP를 끌어올릴 생각하지 말고, 노동자들이 가족을 부양하고 지역사회에 기여하기에 충분한 급여를 받는 일자리를 찾도록 돕는 데 공화당이 중점을 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경제성장보다 좋은 사회를 중시하는 방식이라고 카스는 주장했다. 카스의 캐별 제안들이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따지기에 앞서, 그의 프로젝트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우리의 주 관심을 'GDP 극대화'에서 '일의 존엄과 사회적 응집에 친화적인 노동 시장 조성'으로 옮기도록 한다는 점이다.

지난 40년 동안, 시장주도적 세계화와 능력주의적 성공관은 힘을 합쳐서 이런 도덕적 유대관계를 뜯어내 버렸다. 그들이 뿌려 놓은 글로벌 보급 체인, 자본의 흐름, 코스모폴리탄적인 정체성은 우리가 동료 시민들에게 덜 의존적이 되고, 서로의 일에 덜 감사하게 되고, 연대하자는 주장에 덜 호응하게 되도록 했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은 우리 성공은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대관계의 상실로 빚어진 분노의 회오리 속에 있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

종종 기회의 평등의 유일한 대안은 냉혹하고 억압적인 결과의 평등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또 다른 대안이 있다. 막대한 부를 쌓거나 빛나는 자리에 안지 못한 사람들도 고상하고 존엄한 삶을 살도록 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다. 그것은 사회적 존경을 받는 일에서 역량을 계발하고 발휘하며, 널리 보급된 학습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숙의하는 것 등으로 이루어진다.


'성공할 기회는 거시적으로 본 실질적 평등을 대체할 수 없다. 소득과 사회적 조건의 극심한 불평등을 없는 것처럼 만들어버릴 수도 없다. 사회적 복지는 응집과 연대에 달려 있다. 그것은 단지 사회적으로 상승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높은 수준의 일반 문화, 그리고 강력한 공동 이해관계 의식의 존재를 내포한다. 개인의 행복은 각자가 자유롭게 새로운 안락과 명성의 자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뿐 아니라, 존엄과 문화가 있는 삶을 살아야 함도 요구한다. 후자는 반드시 출세할 것을 요하지 않는다.' - R. H. Tawney, <평등Equality>


'아메리칸 드림. 미국이라는 땅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더 낫고, 더 부유하고, 더 온전한 삶을 살아갈 기회가 누구에게나 자신의 역량이나 성취에 따라 주어진다. 그것은 단지 자동차나 높은 급여에 대한 꿈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여 뭔가를 최상까지 이뤄낼 수 있는, 그리고 태생이나 지위와 관계없이 자기 자신으로서 남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질서의 꿈이다.', '미국 의회도서관은 민주주의가 그 스스로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상징이다. 일반 열람실을 보면, 물어볼 필요조차 없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 1만권이나 비치되어 있다. 자리마다 조용히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보면 노인도 젊은이도, 부자도 가난뱅이도, 흑인도 백인도, 경영자도 노동자도, 장군도 사병도, 저명한 학자도 학생도 한 데 섞여 있다. 모두가 그들이 가진 민주주의가 마련한 그들 소유의 도서관에서 함께 책을 읽는다. 이 장면이야말로 아메리칸 드림이 완벽하게 작동한다는 확실한 사례다. 사람들 스스로가 쌓은 자원으로 마련된 수단, 그리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대중 지성. 이 예가 우리 국민 생활의 모든 부문에 그대로 실현된다면 아메리칸 드림은 살아 있는 현실이 되리라.' - 제임스 애덤스, <미국의 서사시The Epic of America>


우리는 오늘날 조건의 평등을 별로 많이 갖고 있지 않다. 계층, 인종, 민족, 신앙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한 데 모을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은 얼마 없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40년 동안 시장 주도적 세계화가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가져오면서 우리는 제각각의 생활 방식을 갖게 되었다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은 하루 종일 서로 마주칠 일이 없다. 우리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살고 일하며 쇼핑하고 논다. 우리 아이들은 각기 다른 학교에 다닌다. 그리고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기가 일을 마치면, 꼭대기에 오른 사람은 자신이 그 성공의 대가를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밑바닥에 떨어진 사람도 다 자업자득이라고 여긴다. 이는 정치에 매우 유해하며 당파주의가 하도 팽배하여 이제 사람들은 신앙이 다른 사람끼리 결혼하는 것만큼이나 지지 정당이 다른 사람끼리의 결혼을 껄끄럽게 보게 되었다. 우리가 중요한 공적 문제에 대해 서로 합리적으로 토론하거나 심지어 서로의 의견을 경청할 힘조차 잃어버리고 만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능력주의는 처음에 매우 고무적인 주장으로 출발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믿으면 신의 은총을 우리 편으로 끌어올 수 있다는 주장 말이다. 이런 생각의 세속판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유쾌한 약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우리 운명은 우리 손에 있고, 하면 된다'라는 약속 말이다.

그러나 이런 자유의 비전은 공동의 민주적 프로젝트에 대한 우리의 책임에서 눈을 돌리도록 했다. 우리가 7장에서 본 공동선의 두 가지 개념을 되새겨 보자. 하나는 소비주의적인 공동선, 다른 하나는 시민적 공동선이다. 공동선이 단지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하는 것이라면, 조건의 평등은 고려할 게 못된다. 민주주의가 단지 다른 수단에 의한 경제일 뿐이라면, 각 개인의 이해관계와 선호의 총합 차원의 문제라면, 그 운명은 시민의 도덕적 연대와는 무관할 것이다. 소비자주의적 민주주의 개념에 따르면 우리가 활기찬 공동의 삶을 영위하든, 우리와 같은 사람끼리만 모여 각자의 소굴에서 사적인 삶을 살든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공동선이 오직 우리 동료 시민들이 우리 정치공동체에는 어떤 목적과 수단이 필요한지 숙려하는 데서 비롯된다면, 민주주의는 공동의 삶의 성격에 무관심해질 수 없다. 그것은 완벽한 평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다른 삶의 영역에서 온 시민들이 서로 공동의 공간과 공공장소에서 만날 것을 요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다른 의견에 관해 타협하며 우리의 다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공동선을 기르는 방법이다.

'사람들은 시장이 각자의 재능에 따라 뭐든 주는 대로 받을 자격이 있다'는 능력주의적 신념은, 연대를 거의 불가능한 프로젝트로 만든다.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보다 덜 성공한 사회구성원들에게 뭔가를 해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 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신의 은총인지, 어쩌다 이렇게 태어난 때문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몰라도 덕분에 나는 지금 여기 서 있다."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가혹한 성공 윤리에서 돌아설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능력주의의 폭정을 넘어, 보다 덜 악의적이고 보다 더 관대한 공적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역자후기]

능력주의는 '사람 위에 사람'을 두는 체제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들 순위가 정해진 게임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경우 가장 좋다는 대학교의 가장 좋다는 학과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평생을 두고 크든 작든 패배감을 갖고 살아야 한다. 국민의 절대 다수를 패배자로 만드는 체제가 효율적일 리도, 정의로울 리도 없다. 누군가는 의사를 하고 누군가는 펀드매니저를 하고 누군가는 초등학교 교사를, 누군가는 환경미화원을 해야 하는 사회가 정상일진대, 샌델이 몇번이고 강조하듯 모든 사람의 직업이 각각의 물적, 심리적 가치를 인정받고 긍지를 얻을 수 있어야만 행복하고 조화로운 사회일 것이다. "물론 내 연봉은 당신보다 적지만, 나는 당신과 비교해서 하등한 삶을 살고 있다고 여기지 않아요"라고 누구나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사회 말이다.


능력주의 폐단은 능력주의가 '생각하지 않는 백성'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완벽한 사회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누군가를 부당하게 괴롭히지 않는 사회, 각자의 개성과 꿈이 세상의 현실과는 맞지 않는다는 말이 불편한 지혜가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 방법에 대해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89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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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권력, 반자본주의 통제에서 벗어나 단독으로 행동하며, 자급자족의 슬로라이프를 추구하는 삶!

 

일본과 한국에서 각각 원작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가 있는데, 일본에서 만든 영화는 원작에 충실하고 한국에서 만든 영화는 드라마적 재미와 연기가 더 낫다는 개인적 평가.

 

 


[본문발췌]


이 나라에 태어나면 무조건 선택의 여지도 없이 국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가 생기다니, 그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뭔가를 억지로 해야 한다는 건 지배를 받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야. 사람은 지배당하기 위해 태어나는 것이오?


내 이상향은 자급자족의 생활이야. 어느 누구에게도 착취당하지 않고 우리 가족의 힘만으로 살아가는 거야.


학교에서 너희 머릿속에 주입하는건 체제에 적당히 써먹을 인간을 양성하기 위한 최면술 같은 것이야. 어떤 시대에나 학교는 일종의 교정 시설이었어. 예전에는 나라를 위해 죽어서 돌아오라고 가르쳤지. 요즘은 일을 많이 해서 세금을 많이 내라고 가르쳐.


인류의 불행은, 충분히 가졌음에도 더 많은 것을 원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어.


혁명은 운동으로는 안 일어나.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으로 일으키는 것이라고!


인간이 남에게 친절을 베푸는 건 자신이 안전할 때뿐이다.


상식에서 벗어난다는 건 어딘가 유쾌한 일이었다.


이별은 쓸쓸한 것이 아니다. 서로 만나 함께 어울리다가 와 닿게 된 결승점이다.


인간이란 모두 전설을 원하지. 그런 전설을 믿으며 꿈을 꿔보는 거야.


학교는 국가가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정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방해도 하지 않는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표 나지 않게 처리해나가는 건 인간관계의 지혜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땀을 흘리며 일하는 게 인간의 본질인가 봐.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노예제도나 공민권운동 같은 게 그렇지.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저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아버지는 그중 한 사람이다. 알겠냐? 하지만 너는 아버지 따라할 거 없어. 그냥 네 생각대로 살아가면 돼. 아버지 뱃속에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벌레가 있어서 그게 날뛰기 시작하면 비위짱이 틀어져서 내가 나가 아니게 돼. 한마디로 바보야, 바보.


어느 누구에게도 지배받으려 하지 않고 혼자 국가에서 튀어나와 살아가겠다니, 그건 너무 자기 멋대로인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국가가 정의라고도 할 수 없었다. 튀어나갈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배자의 생각이었다.


경찰과 기업에 창끝을 들이댄 사람을 통쾌하다며 재미있어 하면서도, 그것을 막상 내 일처럼 생각해줄 사람은 없다. 텔레비전을 지켜본 어른들은 단 한 번도 싸운 일이 없고 앞으로도 싸울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대항하고 투쟁하는 사람을 안전한 장소에서 구경하고 그럴싸한 얼굴로 논평할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냉소를 던지리라. 그것이 바로 아버지를 제외한 대다수의 어른들이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주 작고 작아. 이 사회는 새로운 역사도 만들지 않고 사람을 구원해주지도 않아. 정의도 아니고 기준도 아니야. 사회란 건 싸우지 않는 사람들을 위안해줄 뿐이야.


지로, 전에도 말했지만 아버지를 따라하지 마라. 아버지는 약간 극단적이거든. 하지만 비겁한 어른은 되지 마. 제 이익으로만 살아가는 그런 사람은 되지 말라고.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워. 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하고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하지 마라. 이해해주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


아마도 자기만 이익을 보려고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다들 친절한 것 같아.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법률도 무기도 필요 없다고 생각해. 이것은 유치한 이상론인지도 모르지만, 여기 섬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런 감이 들어. 만일 지구상에 이런 섬만 있다면 전쟁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아버지는 다시 밭을 갈고 있을까. 바다에서 고기를 잡을까. 건장한 몸집을 가진 사람에게는 그런 생활이 더 어울린다. 인류는 돈을 지닌 시대보다 지니지 못했던 시대가 훨씬 더 길었다. 그러한 인류 끄트머리의 기억이 아버지에게만 진하게 남은 것이다.
아버지 좋을 대로 해도 괜찮아. 지로는 바다를 향해 중얼거렸다. 함께 사는 것만이 가족이 아니니까.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496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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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중반을 넘어 여름으로 넘어가기 전, 서해안 갯벌에는 동죽 조개가 한창으로 동죽 뿐 아니라 백합, 바지락 등 조개류가 제대로 살이 올라 실한 계절이다.

고창 심원면 갯벌에서 캔 동죽을 사다 깨끗이 씻고 같이 길어온 바닷물로 하루에 걸쳐 2~3번 해감을 해야 깨끗한 식재료가 완성된다.

동죽을 삶아, 밭에서 캔 돌미나리를 넣고 동죽돌미나리무침은 그대로 먹어도 좋고, 밥에 비벼 동죽무침비빔밥으로도 그만이다.

동죽과 부추를 넣고 부쳐낸 동죽 부침개는 막걸리 안주로, 부추를 송송 썰어넣은 동죽탕은 시원하게 해장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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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 연휴를 시골에서 지내다 일요일 아침 일찍 출발했지만 고속도로 길막힘이 심해 국도로 우회하던 중 진천을 지나게 되었다. 점심 시간이라 진천 맛집이라는 막국수집을 검색해 들른 진천읍내!

'96년 인터넷 겨울캠프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2개월여를 지내고, 22년만에 들른 진천, 흘러간 시절만큼 곳곳에 아파트도 들어서고 동네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인터넷이 한창 보급되던 시절, 초중고부터 대학생, 일반인 기수까지 2박3일 합숙 캠프에 참여해 인터넷 사용과 활용법을 배우던 시절이 까마득하다.

5G 스마트폰을 통해 빠르고 쉽게 인터넷에 접속해 정보를 얻고 일처리를 바로 할 수 있고, 블록체인과 메타버스를 경험하는 시대를 살며 인터넷 브라우저를 통해 자료를 검색하고, 듣고 싶은 음악을 찾아 들어보는 등 인터넷이라는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합숙캠프까지 열었다는 오래된 이야기, 추억과 함께 진천을 스쳐간다.

강의면접까지 거쳐 선발된 대부분 대학생, 대학원생들로 이루어진 강사들은 캠프에서 2달여 동안 함께 숙식하며 지냈는데, 중간에 잠깐씩 휴식시간에 청주시내로 같이 놀러도 다니고 저녁에는 눈속에 파 묻어 놓은 맥주를 마시며 동고동락 했었는데, 지금은 이름 기억나지 않고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19961204/72126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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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시간과 생각의 여유를 가져다 주는 쉼표와 같은 것!



[본문발췌 - 1권]


'일 - 사람 관계 - 부와 재물 - 시간 관리 - 나 자신'
삶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고 또 가장 향상시키고픈 다섯 가지 영역.


'사람들이 일에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일이 적성에 맞아야 하고, 일을 너무 많이 해서는 안 되며, 일에서 성취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 존 러스킨


과거의 기억에 따른 아픔, 현재에 대한 불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누구나 한 번쯤 겪듯이, 우리는 시간과 싸우고 화해하며 그렇게 매일을 살아갑니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현실이 된다. Everything you can imagine is real. - 파블로 피카소


어느 일이든 사람을 상대해야 합니다. 사람을 대하다 보면 그들의 말과 표정에 상처받고, 원치 않아도 내 진짜 감정을 억눌러야 해서 지칠 때가 많습니다. 연륜이 붙은 직장이라이라고해도, 피곤하고 다친 마음이 보이지 않도록 하는 것에 능숙해질 뿐, 상처가 익숙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원은 시작과 끝이 없는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영원'을 상징하고, 공간을 둘러싸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원을 색칠하면서 사람들은 내면으로의 회귀와 만남을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하는 일이 의미 없게 느껴질 때는, 잠시 손을 놓고 다른 무언가로 눈을 돌려보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의미가 없다고 스트레스를 받는 분들에게 저는 오히려 굳이 뭘 하려고 하지 말라는 조언을 합니다. 결과가 좋아야 하고 너무 잘 하려는 강박 관념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도 있습니다.


일상이 갑갑할 때 최고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여행이죠. 잿빛 도시에서 벗어나 푸르른 바다와 탁 트인 하늘을 볼 때면 마음이 뻥 뚫리고 온갖 번민도 다 날아갈 듯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한 가지를 하기 위해선 하기 싫은 일 아홉 가지를 해야만 한다.


벽에 걸어놓을 그림은, 사람의 영혼을 맑게 씻어주는 환희의 선물이 되어야 하고 즐겁고 유쾌하고 예쁜 것이어야 한다. - 르느와르


하버드대 긍정심리학 교수인 탈 벤 샤하르는 그의 저서 <완벽의 추구>에서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원인을 '완벽주의에 대한 강요'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완벽이란 불가능한 환상인데도, 그걸 달성하지 못하는 좌절감이 우리를 생의 끝으로 내몬다는 것이죠.


자꾸 사람들 사이에 내가 겉도는 것 같다면, 다른 사람들에게서 문제를 찾기 전에 먼저 나의 모습을 돌이켜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들이 손 내밀기 어려운 철벽 같은 갑옷을 입고 있을지 모릅니다.


사람한테는 한 가지 모습이 아니고 다양한 모습이 있을 수 있다는 점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그토록 어려워하는 사람도, 나를 힘들게 해서 밉기만 한 사람도, 어딘가에 여리고 따스한 면모를 숨기고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합니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어떤 프레임으로 사진을 찍느냐에 따라 풍경의 느낌이 다르게 보이듯 사람은 자기만의 '프레임frame'을 기준으로 사물이나 상황을 인지한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의 경험, 관심사, 상황 등이 축적된 철학의 틀을 뜻하는 '스키마schema'의 변화 없이, 세상을 효율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경험과 관심사, 느낌들이 그림의 해석에 대한 프레임을 만든다.


미움과 분노는 상대방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문제지만, 결국 자기를 파괴시키는 일입니다.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소망충족을 목적으로 하는 심리적 행위가 꿈이라고 보았습니다. 꿈은 있었던 사실의 부활이 아니라, 사건을 재료로 해 자기 소망이 반영된 것입니다.


우리는 매우 당연하게 '돈이 있으면 좋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돈이 좋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명품도 살수 있고, 여행도 갈 수 있고, 사회적으로 과시도 되는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는 '시간을 살 수 있다'는 점이 크다고 이야기 합니다. 돈이 없으면 돈을 벌기 위해서 자기 시간을 쓰지만 돈이 있으면 자기 시간을 활용하는 데 돈을 쓸 수 있거든요.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돈과 행복의 관계를 조사한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에 따르면 물건을 구매하기(소유)보다 무언가를 하는 편(경험)이 훨씬 더 큰 만족감을 주고, 수입과 상관없이 타인을 위해 돈을 쓸 때 더 큰 행복을 느낀다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어떤 원대한 목표라 해도 처음이 있고, 그 처음을 순수하게 기뻐하는 것도 우리의 행복이 아닐까요.


비바람이 치거나 풍랑이 일 때는 멈춰야하는 것처럼, 또는 더 먼 항해를 앞두고 쉬면서 장비를 가다듬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도 한 번씩은 숨고를 시간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프레드릭 허즈버그의 '2요인 이론'에 따르면 보수는 동기부여를 좌우하는 두 가지 요인 중 '불만족 요인'에 해당합니다.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바로 만족으로 이어지진 않지만, 보수가 충족되지 않으면 매우 큰 불만족을 유발하기 때문입니다. '불만족 요인'은 자아실현 이전에 생존이나 인정과 관련된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굳이 돈을 억만장자처럼 많이 벌겠다는 욕심이 없는 사람도, 보수에 따른 스트레스를 받는 겁니다.


"린드 아주머니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런 실망도 하지 않으니 다행이지.'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는 실망하는 것보다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고 생각해요." - 빨간머리 앤
우리는 어른이 될수록, 실망하게 될까 하는 두려움에 애초에 기대를 버리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매분 매초를 황홀하게 만드는지, 우리는 잊고 살았던 게 아닐까요? 앤의 말처럼 앞일을 생각하는 건 발견과 상상으로 가득한 즐거운 일인데 말이죠.


우리의 과거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은 하나의 '사건'일 뿐인데, 사람들은 이를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비판하곤 합니다. 미음으 눈으로 재해석된 과거는 유독 환하거나, 유독 칙칙하다거나 해서 현재까지도 당신의 마음을 붙들고 있지만, 사실은 그저 '있었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거에 자꾸 집착이 들 때는, 원래의 것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의 나를 벗어나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어쩌면 슬플 정도의 처절한 자기부정이 필요할 때가 있음을 알려준다고 하겠습니다.


피터르 브뤼헐,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이 그림은 멀고 불확실한 바다와 가깝고 확실한 땅을 대비시키며, 내가 발 딛은 현실에서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마음을 일깨워줍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마음챙김mindfulness'이라고 부릅니다. <하버드 대학교 건강저널>은 과거를 생각하거나 미래를 계획하기보다 현재에 몰두하면, 스트레스가 줄고 수면의 질이 높아지며 혈압이 내려간다고 밝혔습니다. 요는 당면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법을 터득하는 것입니다. 지금 비추는 해는 언젠가 지게 될 것이고, 우리에겐 원하든 원치 않든 편히 쉴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니 일할 수 있게 허락된 매 순간을 소중히 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하는 것도 중요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어떤 변화나 희망도 생기지 않을까요.


죽음 역시 우리 인생을 이루는 하나의 과정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며 두려움을 다독여주는 것입니다.


공기, 물 중력 등 평소엔 느끼지 못하지만 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한없이 무력한 존재가 됩니다.
어쩌면 시간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 같았던 시간이 희박해지는 것을 보고서야 우리는 시간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는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 죽음이 임박한 시간을 리얼하게 포착한 조르주 쇠라의 <임종을 맞이하는 아나이스 페브르 오몽테>는 '지금 이 시간에 충실하라'는 얼얼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쉴 시간이 없을 때가 바로 휴식이 필요한 시간이다.
The time to relax is when you don't have time for it. - 시드니 J. 해리스 Sydney J. Harris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이 세상을 동굴에 비유했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현상은 동굴 벽에 비쳐 어른거리는 그림자일 뿐이지만, 우리는 좁은 동굴에서 빠져나오려는 생각 자체를 못하고 내가 보는 것만 참되다고 믿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본질보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찰나의 으쓱함에 관심을 두고 피상적으로 살게 되는 현대인의 나르시시즘을 잘 꼬집고 있습니다.
외부에 비춰지는 것에만 온 신경을 쓰느라 자신의 내면이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살필 겨를이 없는 공허한 삶 말입니다.


'가끔 우주의 크기를 생각해 보세요.'
내가 똑같이 소풍을 가더라도 비바람이 치면 망치는 날이 되고, 햇빛이 따사로우면 기억에 남는 행복한 날이 되지 않나요? 인생이라는 것은 이렇듯 나와 환경과 상황이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이지만 나에 대한 조금 더 폭넓은 시각을 갖는다면, 지금 한없이 버겁게만 느껴지는 문제들로부터 숨을 트일 수 있을 겁니다.


어린아이 같은 단순함을 느끼고 싶다면 바람과 물이 주는 자유로움에 몸을 맡겨 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떤 영향이든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요. 두려워 말고 인생을 그려봐요.' - 베르트 모리조




[본문발췌 - 2권]


나에게 물의 무게는 물 컵을 얼마나 오랫동안 들고 있느냐에따라 다릅니다. 만약 물 컵을 1분 동안 들고 있다면 거뜬할겁니다. 그러나 1시간 동안 든다면, 내 팔은 저려오고 아파올겁니다. 만약 하루 종일 든다면, 팔의 감각이 없어지고 마비될 것입니다. 하지만, 물의 실제 무게는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스트레스와 걱정도 물 컵에 들어 있는 물과 같습니다. 내게 닥친 스트레스를 잠깐 동안 생각하는 일은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문제가 되고 머리가 아파옵니다. 만약 하루 종일 생각한다면 당신은 마비됨을 느끼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돼버리겠지요.


"미래에 관한 한 그대의 할 일은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 생텍쥐페리


시험을 잘 보는 사람들은, 하루하루 '매듭'을 지어가면서 목표에 다가갑니다. 매일 해야 할 것을 마치고 작은 목표들을 달성하면 적어도 오늘 하루에 나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창조란 곧 용기다. Creativity takes courage' - 마티스


우리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굳은 의지가 아니라 '긍정적인 상상'이다. - 에밀 쿠에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움직이다네. - 파울로 코엘료


색채는 건반이고 눈은 망치다. 영혼은 많은 줄을 가진 피아노다. - 칸딘스키


환경이란 내가 어디를 갈 수 있을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시작할지를 결정할 뿐입니다.


붉은색은 기본적으로 혈압과 체온, 신경조직을 모두 자극하는 색이기에 사람을 흥분시키면서 동시에 해소도 시키는 양가적 기능이 있습니다. 마냥 쉬고 싶을땐 푸른색 계열이 좋지만, 내가 하는 일에 몰두한 상태에서 스트레스가 극적일 땐 오히려 붉은색을 보아도 좋습니다.


스트레스 중에서도 잔소리가 주는 스트레스의 강도는 상당하죠. 잔소리는 당연히 잘되라는 의미로 하겠지만, 듣는 쪽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예민한 상태에서 듣는 잔소리는 관심보다는 간섭으로 느껴지게 마련이니까요. ...
잔소리를 녹음시켜 30초간 들려주고 뇌의 활성도를 측정했더니, 부정적 감정을 처리하는 뇌 부분이 활성화되고 전두엽과 두정엽, 측두엽 등 사회성과 관련된 부분은 비활성화되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즉, 뇌가 스트레스를 받아 소통을 멈춘다는 뜻힙니다. 혼자 있고 싶다는 신호를 내보내는 것이지요.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788046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aver?bid=9126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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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검사 도베르만> 마지막회  대사 중 군인을 검사로 바꿔 패러디.


(노화영, 오연수 분) 전 한순간도 개인을 위해 산 적이 없습니다. 나라와 국민만을 위해서 복무했습니다.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이 나라와 평화의 안녕, 그거 누가 준겁니까? 내일 당장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나라에서 군인으로 산다는게 어떤건지 당신들은 압니까? 전 군대의 기강을 지키기 위해 계급과 명령을 목숨같이 여겼고 강한 군인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고작 이겁니까?

(도배만, 안보현 분)피고인은 지난 20년간 군인이라는 직분을 이용해 온갖 끔찍한 범행을 저질러 왔으며 계급 위에서 자기의 범행을 치밀하고 간교한 방법으로 은폐해 왔습니다. 평소 피고인은 군인을 신분이라 여길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지만 맹목적인 권력에대한 탐욕으로 스스로를 무너뜨렸습니다. 결국 피고인같은 군인이 군대에 있기 때문에 군대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계급은, 명령은 오직 이 나라를 위해서 그 존재 이유가 있으며 결코 개인의 목적을 위해 쓸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검찰개혁에 반대하는 검사들의 생각)
검찰에 소속된 검사들은 한순간도 개인을 위해 산 적이 없습니다. 나라와 국민만을 위한 공익의 대표자로서 법 집행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이 나라의 평화와 안녕, 그거 누가 준겁니까? 온갖 부정부패와 범죄 속에서 공정과 정의를 지키는 검사로 산다는게 어떤건지 당신들은 압니까?
우리는 검사동일체 원칙에 따라 검찰의 기강을 지키기 위해 상명하복을 목숨같이 여겼고 막강한 검찰 권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고작 이겁니까?

(검찰개혁을 바라는 국민의 생각)
지난 70여년간 일부 검사들은 검사라는 직분을 이용해 정치권력, 재벌, 언론 등과 결탁하거나 스스로의 출세와 권력을 얻기 위해 검찰권력에 도움이 되는 사건에 대한 불기소, 무혐의 처분 또는 선택적 기소를 하고 기획수사와 위증교사까지 서슴지 않으며 같은 검찰 내부의 범죄에 대해서는 묵인과 99만원 불기소 세트와 같은 것을 만들어 면죄부를 주는 공정, 진실, 정의, 인권, 청렴에 어긋난 행위를 해왔고 검찰 권력 위에서 자기들의 이러한 행위를 치밀하고 간교한 방법으로 은폐해 왔습니다. 평소 그들은 검사를 신분이라 여길 정도로 자부심이 강했지만 맹목적인 권력에대한 탐욕으로 스스로를 무너뜨렸습니다. 결국 공익의 대표자로서의 검찰의 직무를 수행하지 않은 검사들이 검찰에 있기 때문에 검찰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검찰에게 부여한 권한은 오직 이 나라를 위해서 그 존재 이유가 있으며 결코 개인 또는 특정 집단의 목적을 위해 쓸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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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나 벽에 부딪혔을 때,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문제의 원인을 찾아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사람,
무슨 일이든 남탓으로 돌리는 사람.

남탓이 이기심과 군중심리가 결합해 극에 달하면 타인에 대한 혐오로 번진다.
바이러스와 같이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옮아간다는 것이다.

혐오 바이러스! 몸에 질병을 옮기는 바이러스 뿐 아니라 정신에 병을 옮기는 바이러스도 조심하자.

"일어난 비극의 대부분이 자신은 옳고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는 틀렸다고 단정한 데서 야기되었다." - 야마구치 슈,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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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었다."

하나라도 더 갖기 위해, 갖은 것을 지키기 위해 삶의 시간을 허비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가르침!

 

 

[본문발췌]

 
 
인간이 아니라 시간이 주인공인 세계에서 속절없이 미끄러지는 기분이 들 때마다, 나는 막막했다. 그리고 그리웠다. 울고 있는 내게 '왜 그리 슬피 우느냐?'고 진지하게 물어주는 이가, 그런 스승이. 스승이란 무엇인가. 시인 이성복은 스승은 생사를 건네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 위해 생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스승이라고. '죽음의 강을 건널 때 겁먹고 급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이쪽으로 바지만 걷고 오라'고. 멘토나 롤 모델, 레퍼런스가 아니라 정확하게 호명할 수 있는 스승이 곁에 있다면, 우리는 애틋하게 묻고 답하며 이 불가해한 생을 좀 덜 외롭게 건널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느끼는 죽음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에요. 때가 되었구나. 겨울이 오고 있구나...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던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이 유리컵을 사람의 몸이라고 가정해보게나. 컵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 그러니 원칙적으로는 비어 있어야겠지. 빈 컵이 아니면 제 구실을 못 할 테니. 비어 있는 것, 그게 void라네. 그런데 비어 있으면 그 뚫린 바깥 면이 어디까지 이어지겠나? 끝도 없어. 우주까지 닿아. 그게 영혼이라네. 그릇이라는 물질은 비어 있고, 빈채로 우주에 닿은 것이 영혼이야. 그런데 빈 컵에 물을 따랐어. 여기 유리컵에 보이차가 들어갔지? 이 액체가 들어가서 비운 면을 채웠잖아. 이게 마인드라네. 우리 마음은 항상 욕망에 따라 바뀌지? 그래서 보이차도 되고 와인도 돼. 똑같은 육체인데도 한 번도 같지 않아. 우리 마음이 늘 그렇잖아.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지. 그런데 이것 보게. 그 마인드를 무엇이 지탱해주고 있나? 컵이지. 컵 없으면 쏟아지고 흩어질 뿐이지. 나는 죽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내 몸은 액체로 채워져 있어. 마인드로 채워져 있는 거야. 그러니 화도 나고 환희도 느낀다네. 저 살마 왜 화났어? 뜨거운 물이 담겼거든. 저 사람 왜 저렇게 쌀쌀맞아? 차가운 물이야. 죽으면 어떻게 되나? 컵이 깨지면 차갑고 뜨겁던 물은 다 사라지지. 컵도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러니 마인드로 채워지기 이전에 있던 컵 안의 void는 사라지지 않아. 공허를 채웠던 영혼은 빅뱅과 통했던 그 모습 그대로 있는 거라네."
 
 
마음을 비워야 영혼이 들어간다.
 
 
"민주주의의 평등은 생각하고 말하는 자의 개별성을 인정하는 거라네. 그 사람만의 생각, 그 사람만의 말은 그 사람만의 얼굴이고 지문이야. 용기를 내서 의문을 제기해야 하네. 간곡히 당부하네만, 그대에게 오는 모든 지식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지 말게나."
 
 
진실의 반대말은 망각. "우리가 잊고 있던 것 속에 진실이 있어. 경계할 것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네. 덮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것.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어. 은폐가 곧 거짓이야."
 
 
운명론이란, 있는 힘껏 노력하고 지혜를 끌어 모아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라는 거야.
 
 
질문하는 한, 모든 사람은 배우고 성장한다. 질문은 자기 모순적이고 연약한 인간이 이 미스터리한 세계와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며, 내가 낯선 타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
 
 
처음에 쉽게 결정했던 일반론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거지. 그걸 깨닫기 위해 케이스 스터디를 하는 거야. 일반론이 진리인 줄 알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 하네.
 
 
타자성의 철학. '타자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라.' 타자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게 사랑이고, 그 자리가 윤리의 출발점이라네. 타자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 왜곡해선 안 돼.
 
 
"인간이면 언어를 가졌고, 이름을 가졌고, 지문을 가졌어. 그게 바로 only one이야. 무리 중의 '그놈이 그놈'이 아니라 유일한 한 놈이라는 거지. 그렇게 내가 유일한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남을 사랑하고 끌어안고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거야. 내가 없는데 어떻게 나을 끌어안겠나? 내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있어? 그런데 '나 없는 우리?' 아니 될 말씀이야. 큰일 날 소리지. 그래서 내가 사이를 강조했잖아. 나와 너 사이. 그 사이에 나도 있고 너도 있다는 거지."
 
 
"앞으로 점점 더 interface 접속장치가 중요해. 이 컵을 보게. 컵은 컵이고 나는 나지. 달라. 서로 타자야. 그런데 이 컵에 손잡이가 생겨봐. 관계가 생기잖아. 손잡이가 뭔가? 잡으라고 있는 거잖아. 손 내미느느 거지. 그러면 손잡이는 컵의 것일까? 나의 것일까? 컵에 달렸으니 컵의 것이게지만, 또 컵의 것만은 아니잖아. '나 잡아주세요'라는 신호거든. '손잡이 달린 인간으로 사느냐. 손잡이 없는 인간으로 사느냐.' 그게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그런데 또 한 편 컵에 손잡이가 아니라 자기 이름이 쓰여 있다고 생각해봐. 갑작스럽게 내 것이 되잖아. 같은 사물인데도 달라지는 거야. 유일해지는 거지. 이런 생활 속의 생각이 시가 되고 에세이가 되고 소설이 되고 철학이 되는 거라네."
 
 
빈자들은 늘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에 이웃의 부탁을 선선하게 들어주는 한편, 부자들은 타인의 도움이 필요 없기에 이웃을 신뢰하지도 부탁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 데이비드 데스테노
 
 
참과 거짓을 다루는 진眞(생각을 다루는 인지론), 선악의 행위를 다루는 선善(실천을 다루는 행위론), 아름다움과 추함을 제 각자 느끼고 판단하는 미美(표현을 다루는 판단론). 인간으로 풍부하게 누리고 살아가려면 이 세가지 영역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최근에는 '자기다움의 윤리'로 진정성이라는 화두가 올라오면서, 가짜 아닌 진짜를 향한 욕구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 사람이 착한가, 이타적인가'를 묻는 도덕성, '그 사람이 예쁜가, 실력이 있는가'를 묻는 표현의 힘에 앞서 '그 사람이 정직한가, 일관되는가'라는 진정성의, 잣대로 과거와 현재의 '위선'이 낱낱이 들춰지기 때문이다.
 
착하지 않아도 죄책감 느끼지 않고, 예쁘지 않아도 개성으로 긍정하며, 그 '다름의 값'을 치러야 한다면 기꺼이 타인의 미움까지도 감수하겠다는 용기 있는 사람들, '진짜 나'로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 참 자기를 거부하는 거짓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스마트한 개인들이 사는 세상. 점차 이 세계는 그렇게 '진'의 세계를 중심으로 수만가지 바코드의 선과 미를 재배열하며 나날이 팽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을 표준으로 하지 않는 것이 과학, 인간을 배제해야 성립되는 것이 과학. 과학은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과학의 눈으로 보면 인간이라는 표준은 가짜야. 인간을 기준으로 하면 제멋대로 되거든. 사람은 몹시 제멋대로야. 어디로 튈지 모르지. 개는 훌륭하고 벼룩은 나쁘고 까마귀는 흉악하고 꽃은 아름다워! 그런 저마다의 개별적인 주관이 과학의 시야에서는 이물질이야. 인간을 없애야 과학이 선명해져. 그게 수학이라네. 수학은 인간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거든.
 
문화예술은 그렇지 않아.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네. 과학과 예술이 대립하는 이유는 분명해. 과학은 모든 것을 '비인간'으로 가정하고, 예술은 모든 것을 '인간'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라네. 물론 예술 중에서도 추상예술이 있지. 그런데 그 또한 인간 경험을 바탕으로 한 거야. 인간의 시각 경험으로 미술이, 청각 경험으로 음악이, 언어 경험으로 문학이 탄생한다네. 인간의 경험, 그 자체는 추상이 될 수 없거든.
 
 
목적이 있으면 걷는 게 되고 목적이 없으면 춤이 되는 거라네. 걷는 것은 산문이고 춤추는 것은 시지. 인생을 춤으로 보면 자족할 수 있어. 목적이 자기 안에 있거든. 일상이 수단이 아니고 일상이 목적이 되는 것, 그게 춤이라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고 사는 것이 바로 나에게는 춤이 된다네.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라네.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산 게 아니야. 스토리텔링이 럭셔리한 인생을 만들어. '세일해서 싸게 산' 다이아몬드와 첫 아이 낳았을 때 남편이 선물해준 루비 반지 중 어느 것이 더 럭셔리한가? 남들이 보기엔 철 지난 구식 스카프라도, 어머니가 물려준 것은 귀하잖아. 하나뿐이니까. 우리는 겉으로 번쩍거리는 걸 럭셔리하다고 착각하지만, 내면의 빛은 그렇게 번쩍거리지 않아. 거꾸로 빛을 감추고 있지. 스토리테링에는 광택이 없다네. 하지만 그 자체가 고유한 금광이지.
 
 
글을 쓸 때 나는 관심, 관찰, 관계... 평생 이 세 가지 순서를 반복하며 스토리를 만들어왔다네. 관심을 가지면 관찰하게 되고 관찰을 하면 나와의 관계가 생겨.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니야. 한 커트의 프레임이야. 한 커트 한 커트 소중한 장면을 연결해보니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거지. 한 커트의 프레임에서 관찰이 이뤄지고, 관계가 이뤄져. 찍지 못한 것, 버렸던 것들이 나중에 다시 연결돼서 돌아오기도 해.
 
 
남의 뒤통수만 쫓아다니면서 길 잃지 않은 사람과 혼자 길을 찾다 헤매본 사람 중 누가 진짜 자기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나.
 
 
'나는 아버지가 잡아주는 기름진 양보다 가시밭길 헤매다 굶주린 속에 따먹은 아가베 열매가 더 달았어요' - 앙드레 지드, <탕자, 돌아오다>
 
 
신념처럼 위험한 게 어디 있나? 관점에 따라,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게 인간사인데 '예스'와 '노우'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거든, 메이비maybe를 허용해야 하네 메이비maybe가 가장 아름답다고 포크너가 그랬잖아. '메이비maybe' 덕분에 우리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리는 거야. 오늘도 내일도 똑같으면 뭐하러 살 텐가. 진리를 다 깨우치고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네. 이제 다 끝났잖아. 서울이 목표인 사람은 서울 오면 끝난 거야.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경유지, 반환지가 있을지언정 목표는 없네. 평생을 모험하고 방황하는 거지. 길 위에서 계속 새 인생이 일어나는 거야. 원래 길의 본질이 그래. 끝이 없어. 이어지고 펼쳐질 뿐.
 
 
꿈은 이루는 게 아니라 지속하는 것. 꿈이라고 하는 것은 꿈 자체에 있는 거라네. 역설적이지만, 꿈이 이루어지면 꿈에서 깨어나는 일밖에는 남지 않아. 그래서 돈키호테는 미쳐서 살았고 깨어나서 죽었다고 하잖나. 상식적인 사고로는 이해가 안 되는 헛소리일 수도 있어.
 
 
남의 신념대로 살지 마라. 방황하라. 길 잃은 양이 돼라.
 
 
세상을 생존하기 위해서 살면 고역이야. 의식주만을 위해서 노동하고 산다면 평생이 고된 인생이지만, 고생까지도 자기만의 무늬를 만든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해내면, 가난해도 행복한 거라네.
 
 
자기 무늬를 짜면서 '자기다움'을 추구하는 삶, 그게 아이덴티티거든. 자기 무늬의 교본은 자기 머리에 있어. 그걸 모르고 일평생 남이 시키는 일만 하다가 처자식 먹여 살리고, 죽을 때 되면 응급실에서 유언 한마디 못하고 사라지는 삶.... 그게 인생이라면 너무 서글프지 않나? 한순간을 살아도 자기 무늬를 살게.
 
 
돈을 받는 노동이라도 자기 생각이 들어가 있고 자기만의 성취의 기준이 있어. 그때 비로소 '그림자 노동'에서 벗어나는 거야. 예술가가 되는 거야. 노동을 하는 순간에도 예술을 하고 있는 거야.
 
 
추방하고 격리하는 사회는 위험한 사회야. 반대로 상처와 활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사회, 그게 창조적인 사회고 희망이 있는 사회. 악, 퇴페, 질병... 이런 것까지 포용할 수 있는 사회가 진짜 건강한 사회.
 
 
지우개 달린 연필, 지우는 기능과 쓰는 기능을 한 몸뚱이에 달아놓은 그게 우리 인생이잖아. 비참함과 아름다움이 함께 있고 망각과 추억이 함께 있으니 말일세.
 
 
자기는 남에게 배울 것도 없고 남을 가르칠 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나', 인간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없다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만족할 수밖에 없어. 그게 자족이지. 자족에 이르는 길이 자기다움이야. 
 
 
바다에 일어나는 파도를 보게. 파도는 아무리 높게 일어나도 항상 수평으로 돌아가지. 아무리 거세도 바다에는 수평이라는 게 있어. 항상 움직이기에 바다는 한 번도 그 수평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다네. 하지만 파도는 돌아가야 할 수면이 분명 존재해. 나의 죽음도 같은 거야. 끝없이 움직이는 파도였으나, 모두가 평등한 수평으로 돌아간다네. 본 적은 없으나 내 안에 분명히 있어. 내가 돌아갈 곳이니까.
 
촛불도 마찬가지야. 촛불이 수직으로 타는 걸 본 적이 있나? 없어. 항상 좌우로 흔들려. 파도가 늘 움직이듯 촛불도 흔들린다네. 왜 흔들리겠나? 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야. 나무들이 흔들리는 것도 원래의 자세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네. 바람이 없는 날에도 수직의 중심으로 가기 위해 파동을 만들지. 그게 살아 있는 것들의 힘이야.
 
촛불은 끝없이 위로 불타오르고, 파도는 솟았다가도 끝없이 하락하지. 하나는 올라가려고 하고 하나는 침잠하려고 한다네. 인간은 우주선을 만들어서 높이 오르려고도 하고, 심해의 바닥으로 내려가려고도 하지. 그러나 살아서는 그곳에 닿을 수 없네. 촛불과 파도 앞에 서면 항상 삶과 죽음을 기억하게나. 수직의 중심점이 생이고 수평의 중심점이 죽음이라는 것을.
 
 
 
동양의 탄생학과 서양의 유전학은 동시에 말하고 있어요. 뱃속에서의 10개월이 성격, 기질, 신체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고. 스승이 10년 가르친 게 뱃속에서 가르친 10개월만 못하다잖아. 그래서 지혜로운 한국인은 태중의 아이를 이미 한 살로 보는 거예요.
 
 
신은 생명을 평등하게 만들었어요. 능력과 환경이 같아서 평등한 게 아니야. 다 다르고 유일하다는 게 평등이지요. 햇빛만 받아 울창한 나무든 그늘 속에서 야윈 나무든 다 제 몫의 임무가 있는 유일한 생명이에요. 그 유니크함이 놀라운 평등이지요. 또 하나, 살아 있는 것은 공평하게 다 죽잖아.
 
 
지금은 밀물의 시대에서 썰물의 시대로 가고 있어요. 이 시대가 좋든 싫든, 한국인은 지금 대단히 자유롭고 풍오하게 살고 있지요. 만조라 할까요. 그런데 역사는 썰물과 밀물을 반복해요. 세계는 지금 전부 썰물 때지만, 썰물이라고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갯벌이 생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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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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