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든 글이든 표현은 나의 내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자 하는데서 나온다. 그러나 그 표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받아들이고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본문발췌]

 

 

표현의 기술은 자유롭고 자신 있게 내면을 표현하려는 마음에서 나온다.

 

 

가방끈이 얼마나 길든, 하는 일이 뭐든, 사람은 다 비슷한 결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잘 속이고, 쉽게 속아 넘어가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빠지고, 감정과 충동에 휘둘리고, 믿고 싶은 것만 하는 동물. 우리는 모두 그런 불완전한 존재로서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그래서 누가 쓴 어떤 책이든 다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작가는 세상사를 있는 그대로 보면서 사실에 근거를 두고 진리와 진심을 담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쓴 글이라야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고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글 쓰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답게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면 무엇이 내 것이고 뭐가 남의 것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틀에 박힌, 진부한, 상투적인 글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늘 이렇게 생각하면서 글을 씁니다. "내 생각과 감정을 나다운 시각과 색깔로 써야 한다. 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진부하고 상투적인 생각과 표현에서 멀어져야 한다."

 

 

정치적 글쓰기에도 예술성이 중요합니다. 예술성은 문장의 아름다움과 아울러 독창적인 논리의 미학을 요구합니다. 그런 글을 쓰려면 생각과 감정에 자유의 날개를 달아 놓아야 해요. 고정관념과 도그마에 갇히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글을 쓸 수 없거든요. 보수든 진보든 상관없이, 다수 학설로 통하는 이론과 인식 방법을 답습하면 상투적이고 진부한 글을 쓰게 됩니다. 현실은 빨주노초파남보인데 흑백필름으로만 사진을 찍어서 현실이 그와 같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지요.

 

 

예술적으로 쓰고 싶다면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정해진 도그마보다 자기 자신의 눈과 생각, 마음과 감정을 믿는 게 현명합니다. ... 예술은 자유를 먹고 피어납니다. 돈과 권력만 사람의 생각과 감각을 얽어매는 게 아닙니다. 고정관념과 이념의 교조에 생각과 감정이 묶이면 글이 진부해집니다. 뻔한 글, 지루한 글, 첫 문장만 보아도 마지막 문장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을 쓰게 됩니다. 독창적인, 기발한, 창의적인, 흥미로운, 반전이 있는 글을 쓰지 못합니다. 진보냐? 보수냐? 내 이념을 어떻게 글쓰기에 반영할까? 창의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이런 헛된 질문을 털어 버리고 오로지 아름다운 것과 옳은 것만 생각하면서 글을 쓰시기 바랍니다.

 

 

무언가를 주장하고 싶다면 반드시 근거와 논리를 제시해야 합니다. 만약 상대방이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주장만 하면 논쟁을 중단하는 게 현명합니다. 논쟁의 주제와 관계없는 것을 끌어들이지도 마십시오. ... 상대방이 토론하다 말고 화를 내면 한발 물러서는 게 좋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논리적으로 흔들린다는 증거입니다. 그럴 때 굴복을 강요하면 안 돼요. 그 정도에서 멈추고, 나도 더 생각해 볼테니 다음에 다시 대화하자고 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 논리적으로 완전히 격파했다고 확신하는데도 상대가 인정하지 않고 계속 우길 때도 화를 내지는 말아야 합니다. 내가 확신한다고 해서 그게 옳다는 보장은 없고, 단 한 번의 논쟁으로 옳고 그름 또는 승패가 가려지는 문제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성과 욕망을 다 가진 존재입니다. 욕망은 아름답고 또한 추악합니다. 이성은 고결하지만 때로 나약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빛나는 선과 끔찍한 악을 다 저지릅니다. 저는 인간의 사악함은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악함은 누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일부여서 악한 사람 자신도 스스로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회악이 생기면 그 원인을 나쁜 사람한테서 찾는 경우가 많은데, 모든 악이 악한 사람 때문에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소수의 사악함보다 다수의 어리석음이 사회악을 부르는 때가 더 많습니다. 정치적 글쓰기는 사악함과 투쟁하는 일이 아니라 어리석음을 극복하려고 하는 일입니다. 사악함과 어리석음은 모두 인간의 본성이지만, 조금이라도 더 승산이 높은 것은 어리석음과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리서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노력하면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덜 어리석어질 수는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말하려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지해야 해요. 자연과 인간을 바라보는 태도, 사회를 보는 관점,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 내게 중요한 욕망과 그것을 실현하려고 선택한 방법,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이 어떠하며 그게 남들과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합니다. 이걸 모르면 남을 흉내 내는 글밖에 쓰지 못해요.

 

 

행복하게 살려면 나하고 잘 맞는 사람, 통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과 교감해야 합니다. 맞지 않는 사람과 다투면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으니까요. 같은 이치로 내게 재미있는 책,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책, 내가 감동받는 책을 읽으면서 사는 게 최선입니다.

 

 

글을 잘 쓰려면 문장 쓰는 기술, 글로 표현할 정보, 지식, 논리, 생각, 감정 등의 내용, 그리고 독자의 감정 이입을 끌어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어느것이 가장 중요할까요? 독자의 감정 이입을 끌어내는 능력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글쓰는 기술은 외모입니다. 내용은 사람이 가진 것이에요. 체력, 돈, 재능, 지식입니다. 감정 이입 능력은 성격, 마음씨, 인생관이라고 할 수 있죠. 사람들은 흔히 외모를 부러워하고 돈과 지식을 선망하지만 행복한 삶을 사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성격과 마음씨와 인생관입니다.

 

 

생활 글쓰기의 열쇠는 문장 기술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우리는 보통 문장 쓰는 기술을 고민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마음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가장 좋은 표현의 기술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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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속에 잠재한 무한, 규칙을 벗어난 우연, 혼돈 가운데 보이는 규칙 등 세상은 모순 속에서 균형을 유지한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반복되는 시작, 그리고 추억과 계획을 통해 삶의 시간속을 달려간다.

 

 

[본문발췌]

 

 

"신은 무(無)를 가지고 이 세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무는 만물 속에서 배어나온다." - 폴 발레리

 

 

삶이란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무한한 시작들의 연속에 불과하다. 그리고, 두번째의, 세번째의, 백번째의 새로운 시작과 억번째의 새로운 시작은 최초의 유일한 시작을, 만물이 무에서 빠져나왔던 바로 그 태초의 시작을 가리킨다.

 

 

죽는다는 것은 우선 시간과의 단절이다. 시간은 공간 속에서 그리고 움직임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시간은 균일하지 않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부분은 어마어마해서, 이를테면 무한하거나, 혹은 적어도 한정할 수 없다. 과거와 미래가 바로 그것이다. 세번째는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자그마하다. 현재가 그것이다. 게다가 이 세 부분 중 어느 것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주장할 수도 있다. 과거는, 그것이 더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가하면, 현재는, 그것이 찰나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의 영구성에도 불구하고, 사라지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그렇다. 시간의 모든 것이 이상하다. 

 

 

물은 너무도 유연하고, 너무도 유동적이고, 너무도 소멸과 비존재에 가깝기 때문에 관념이나 감정과 흡사하다. 물은 또한 시간과도 흡사해서, 그림자와 모래같이 오랫동아 시간을 측정하는 데 쓰였다. 해시계, 모래시계, 물시계는 시간과, 만져저서는 알 수 없는 물질인 그림자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준다. 그림자보다 견고하고 모래보다 유연한 물은 냄새도, 맛도, 색도, 형체도 없다. 물은 크기도 없다. 물에는 풍미도 없다. 물은 언제나 자신이 현재 처해 있는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다. 물은 이미 무를 향한 장도에 오른 물질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물을 무와 가장 가까운 물질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림자가 그렇고, 그뿐만 아니라, 감히 말한다면, 공기도 물보다 더 부재하기 때문이다.

 

 

법은 만물 위에 군림한다. 시간은 법의 신비롭고도 적극적인 비밀요원이다. 필연성은 법의 행동 강령이다. 우연은 법의 광대이다. 원인과 결과의 게임은 법의 도구이고 법의 열쇠이다. 결정론은 약간 사팔뜨기에, 늘 정신을 못차리고, 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이고, 바둑판 무늬 손수건을 들고 선풍기 아래로 이마를 들이미는 중개인이다. 그가 필요할 때면, 그에게 위급 전화를 걸거나 그에게 휘파람을 분다. 그의 봉사가 필요치 않을 때면, 무능하거나 권력의 남용을 들어 그를 집으로 돌려 보낸다. 시간과 만물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법에 순종하며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림자밖에는 볼 수 없는 숨은 법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살아온 단계마다, 인간은 적어도 그들로서는 열쇠를 지니지 못한 만물의 열쇠를 발견했다고 확신하곤 했다. 아인슈타인도 한 시대를 풍미하고 간 지 3천 년이 지나면, 아인슈타인 시대의 프톨레마이우스만큼이나 황당하고도 한계가 있는 자가 되는 것이 숙명이다. 정의처럼, 그리고 선처럼, 진리는 시간에 속해 있지 않다. 시간에 속한 것은, 결국 아무런 소용도 없는 짓이긴 하나 필연적으로, 진리를 추구하게 되어 있다.

 

 

시간은 사유가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만물 속에 흐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세 위격과 함께, 또 모순되게도 공간과 운동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리고 너무나 형이상학적인 외양과 함께, 시간은 인간의 정신과 인간의 사유와 연관된 부분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이를 부인한단 말인가? 오로지 인간이 추억이고, 행동이고, 계획이기 때문에,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사유는 시간 속에서 펼쳐지고, 시간은 오직 인간의 사유 속에서만 군림한다. 사유와 시간은 일종의 존재의 비밀 요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만물 속에서 그들끼리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유와 시간은 둘다 존재에게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자, 동시에 존재를 가리는 불투명한 베일이다. 사유와 시간은 드러내는 것이자, 감추는 것이다.

 

 

모든 지식과 철학의 근저에 있는 놀람과도 같이, 회의는 후퇴이자 불안이다. 무언가 '잘 나가지' 않는 것이 있다. 어딘가에 틈새 같은 것이 있다. 불쑥 치솟는 의문이 있다. 특히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면,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면, 놀람이란없을 것이며, 회의란 없을 것이다. 사유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모든 구멍 속에서, 틈색 사이에서, 결핍 속에서 생각한다. 인간은 늘 가장자리에서 생각한다. 인간은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그것은 결코 끝이 없는 경계의 싸움이다. 인간은 욕구와 불확실성 속으로 뛰어든다. 인간은 고뇌 속에 죽는다. 인간은 놀라고 그리고 인간은 회의한다.

 

 

일어났을 수도 있었을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돌이킬 수 없는 역사의 필연은 오직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우연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만물은 꿈의 오솔길이 무수히 있으니, 그 중 극소수만이 현실로 화(化)하는 정원이다.

 

 

우리는 현재에만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추억을 통해 과거에, 계획을 통해 미래에만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또한 다른 곳에서도 살 수 있다. 우리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 결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결코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들을 상상할 수 있다. 상상은 사유나 혹은 자유와도 같이 우리를 신과 비견케 하는 놀라운 능력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 우리는 만물에 속하지 않는 것은 결코 어떤 것도 상상할 수 없다는, 그다지 놀랄 것도 없는 사실 때문이다. 우리는 공간과 시간 속에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것 외엔 다른 권리가 없다. 우리는 결코 무엇을 창조해내지 않는다. 우리는 우주 만물의 편린들을 다른 방식으로 조작할 따름이다.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안다는 것보다 분명 열등하다. 사업에서, 정치에서, 기계 분야에서, 일상적인 사회 생활에서, 믿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낫다. 당신이 타야 할 기차가 8시 15분 전 기차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놓칠까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시험이나 콩쿠르를 치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믿는 것에 대한 질문은 주어지지 않는다. 아는 것에 대한 질문이 주어진다. 아드리아노플(터키 지명) 전투의 날짜, 시칠리아의 산물, 직삼각형의 성질이나, 질소의 성질은 믿음이나 견해의 영역이 아니라, 지식의 영역에 속한다. 모든 견해와 모든 믿음에는 모호한 면이 있다. 지식은 긍정적이다. 믿는 것은 불확실하다. 우리가 아는 것만이 진리라는 명칭에 걸맞다. 믿음은 부분적이고, 갈팡질팡하는, 간접적인, 근거 없는 지식이다. 지식은 의견의 불일치를 겪지 않는, 겨우 토론이나 겪는 믿음이다.

 

 

위대한 일에는 본성적으로 치욕스런 면들이 뒤섞여 있다. 위대한 일에는 피와, 폭력과, 거짓말과, 죽음이 그득하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이름을 외우도록 강요하는 자들의 대부분은 법정에 세워야 할 자들이다. 두 사람을 죽여 보라. 당신은 곧장 감옥행이다. 그러나 20만명을 죽여 보라. 당신은 권좌에 오르고 책에 기록될 것이다. 도덕이란 터질 듯한 야망을 지닌 자들에게는 한낱 딸꾹질이고, 사상과 군중을 조작하는 데 있어서 충분한 단계에까지 오르지 못한 자들에게는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바보 마늘기인 것 같다. 좋게든, 나쁘게든, 원하는 대로 인간을 이용하는 것이 있으며, 그것은 체념과 동시에 경탄을 불러일으키고, 너무도 분명한 이 법칙들은 동시에 경악으로 빠져든다. 만물은 인간의 삶 속에서, 역사라는 이름을 지닌 체계의 이상한 면면을 취한다.

 

 

인간은 사유와 행동을 통해 놀랄 만큼 만물의 진행을 가속화시켜왔다. 그러나 인간은 이러한 그들의 행동과 사유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지 못한다. 닫힌 우주계에서는 모든 것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물에 대한 아주 자그마한 간섭이라 할지라도 누구도 깊이를 측정할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우리는 아마존 열대림에서 날개를 퍼덕이면서 차츰차츰 일본에 태풍을 일으키는 나비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인간의 사유는 나비의 날개와는 또 다르게 강력하고, 그리고 또 다르게 예측불능이다. 인간의 사유는 만물의 질서를 뒤엎고 그것을 정복하나, 인간의 사유는 자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폴 발레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행한 것이 무엇을 행하는지는 결코 알지 못한다."

 

 

시간과 악이 존재하는 것은 용서가 있기 위함이다.

 

 

나는 하루 온종일 달린다. 움직이지 않고 있더라도 나는 달린다. 나는 추억과 계획을 통해 시간 속을 두루 달린다. 나의 유일한 미래는, 나 자신이다. 인간은 인간의 미래이다. 나의 유일한 한계는 시간이다. 나의 유일한 주인은 시간이다. 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멈추게 할 수도, 늦출 수도, 피할 수도 없다. 나는 죽음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변화를 길들일 것이다. 나는 죽음을 우회함으로써 죽음에 맞서 싸울 것이다.

 

 

모든 것은 나로 말미암아 존재한다. 나는 매순간 시간과 공간과 만물과 인간을 지탱한다. 존재가 있기 때문에 만물이 있다. 존재가 있기 때문에 시간이 있다. 존재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있다. 나는 나의 가련한 아이들, 너희들을 사랑하고, 나는 너희들에 대해 감탄해 마지 않으며, 너희들의 무력한 위대함과 너희들의 절망에 처한 모습 그대로의 너희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나는 무로부터 끄집어내어져 만물 속에 던져진 너희들이 측은하다. 존재로부터 나왔으나, 너희들은 모르는 것이 만물이다. 그토록 터질 듯한 교만과 그토록 많은 헛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이 결국에는 알 수 없는 것이 만물이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것에 대해, 가련하고 가련한 아이들아, 가련한 멍청이 천재들아, 너희들은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에대해서처럼 만물에 대해, 너희들은 결코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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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이 만들어내는 문학 작품, 오래도록 사랑받는 작품은 변함없는 가치를 가진 작품 이라기보다는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작품이다....

 

 

[본문 발췌]

 

근육노동은 실제적인 것인 반면에 종이로 된 재산은 다른 사람들의 노동에 기생하는 것이지요. 

 

 

가치. 문학은 기적과 같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그것은 신의 세계 창조 행위의 모방이자 반복이지요. 전능하신 신처럼, 예술가는 마술을 부리듯 무에서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을 고무하는 것은 상상력이고, 상상력이란 현실성 보다는 가능성과 관련됩니다. 그것은 예전에 존재하지 않은 것을 불러내어 존재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작은 신이라기보다는 벽돌공에 더 가깝지요.

 

 

새롭다고 해서 모두 다 가치 있는 것은 아니지요.

 

 

과학은 발달할 수 있어도 예술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사성이 차이점보다 더 주목할 만하고, 공통적인 것이 독자적인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예술의 임무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의 생생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입니다. 현재란 대체로 과거의 재순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한 충실성이 현재에 정통성을 부여합니다. 현재를 구성하는 것은 대체로 과거이고, 미래는 이미 지난간 것을 주제로 한 일련의 가운 변주곡들을 연주하겠지요. 변화에 대해서는 의혹을 품고 다뤄야 합니다. 그것이 진전보다는 퇴보를 의미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물론 변화는 불가피한 것이지만, 인간사의 변화무쌍함은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보여주는 징후입니다. 에덴동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요. 이러한 신고전주의적 세계관이 우리의 세계관과 몇 광년은 떨어져 있는 듯이 보인다면, 부분적으로는 두 관념 사이에 낭만주의가 끼어 있기 때문입니다. 낭만주의자들의 눈에 인간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무궁무진한 힘을 소유한 창조적 정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현실은 정적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이고, 변화란 대체로 겁내기보다는 환영해야 할 것이지요.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존재이고, 무한한 진보를 이룰 수 있는 잠재력이 있습니다. 이 멋진 신세계에 들어서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쇠사슬을 채운 세력을 떨쳐내기만 하면 됩니다. 창조적 상상력은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의 이미지에 따라 세계를 개조할 수 있는 예지력입니다. 그것은 시뿐 아니라 정치 혁명에도 영감을 불어넣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재능이 새롭게 강조됩니다. 이제 인간은 늘 과오에 빠져들기 쉽고 확고한 권위의 호된 질책을 끊임없이 받아야 하는 연약하고 결함 많은 피조물로 더 이상 여겨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근원은 무한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자유야말로 인간의 본질 그 자체입니다. 열망과 분투는 인간의 본성이고, 인간의 진정한 집은 영원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너그러운 신뢰를 키워야 합니다. 열정과 애정은 대체로 온유한 것이지요. 냉정한 이성과 달리, 열정과 애정은 우리를 자연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묶어줍니다. 그것은 인위적 속박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번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훌륭한 예술 작품뿐 아니라 참으로 정의로운 사회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곳이지요. 가장 소중한 예술 작품이란 전통과 관습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런 작품은 노예처럼 과거를 모방하지 않고, 풍부하고 낯선 것을 탄생시킵니다.

 

 

무릇 문학적 고전이란 변함없는 가치를 가진 작품이라기보다는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어떤 비평가는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서서히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점진적으로 나아가면서 다양한 해석을 축적합니다.

 

 

기준이란 가치를 판단하는 방법에 대한 지침입니다. 체스를 둘 때 규칙을 따른다고 해서 게임에 이기는 것이 아니듯이, 기준을 따른다고 해서 가치 판단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체스를 둘 때 그저 규칙에 따라서가 아니라 규칙을 창조적으로 응용해서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규칙 그 자체는 규칙을 창조적으로 응용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질적 지식, 지능과 경험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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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리함, 풍요, 연결이 삶의 질과 정서적 빈곤을 가져오기도 한다.

가끔은 디스플레이, 네트웍과의 단절... 그리고 먹는것과 행동을 자발적으로 제한도 해보고, 불편하더라도 몸을 써보는 삶이 마음을 풍요롭게하고 자연을 덜 훼손할 수 있는 삶의 한 방편이다.

 

 

[본문 발췌]

 

존재는 기능주의적 근거로 자신을 증명해야 할 의무가 없다. 재즈가 뭐냐고 묻는 질문에 루이 암스트롱이 대답했듯이 "굳이 물어봐야 한다면 당신은 어차피 알 수 없다."

 

 

젊음이 우리 사이에 회자될 경우 대부분 과거의 특정 시기를 뜻하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상실과 결부된다. 사무엘 울만은 젊음이란 육체의 나이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라고 일찍이 얘기했건만, 젊은 세대는 물론 나이 들어 가는 어른들에게도 이런 지혜는 이제 별 의미를 갖지 않는 듯하다. 젊음이 요원한 이유 중 한 가지는 우리가 젊음에 둘러싸여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것은 많다. 새로운 재료와 기획으로 만들어진 사물, 사업, 사건은 많다. 그러나 지금 새롭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이미 내일이면 하루만큼 낡은 것이 된다. 새로움을 생산하는 만큼, 딱 그만큼 낡음도 생산되는 것이다. 그래서 젊음은 상태가 아닌 것이다. 잠시만 유지되는 순간적인 개념과는 정반대로, 퍽 지속될 수 있어야 비로소 젊은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젊음은 생명의 생리이다. 적어도 의욕이 넘치고, 풋풋하고, 왕성한 생명의 생리이다. 새것이 강조되기에 실은 노쇠와 권태로 둘러싸인 채 사는 우리들에게 젊다는 것의 진정한 에너지와 개념이 와 닿을 리가 없다. 그러나 열대 우림의 넘쳐 나는 젊음 한가운데에있으면 그 어떤 노화 작용도 영원히 멈추고 생명이 끝내 승리할 것만 같다.

 

 

생활을 충분히 돌아보기 위해서는 충분히 먼 곳으로 가야 한다. 가까우면 이미 정의상 제대로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먼 곳이라고 해서 반드시 다르진 않지만, 정말로 다른 곳이 가까운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장거리 이동에 항공기 이용이 일상화되면서부터 멀리 간다는 것은 거리가 아닌 시간적 개념이 되어 버렸다. 실제 이동하는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길어졌지만 여행자가 직접 경험하는 것은 기다림, 기다림, 끝도 없는 기다림이다. 창문 바깥을 쳐다봐도 구름은 제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을 뿐 내가 전진하고 있음을 상대적으로 알려 줄 움직이는 물체가 없다. 정처 없이 공중에 떠다니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덧 정신 차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해 있다. 그것마저 비행기에서 내려 천편일률적으로 생긴 공항을 빠져나와야 숨통이 트듯 실감할 수 있는 것이다. 떠남에 소요되는 시간뿐 아니라 거리가 중요한 이유는 공간적 경험이 보다 정직하기 때문이다. 시간은 어떻게든 보내고 나면 사라지고, 심지어는 '죽여' 없애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공간은 몸으로 직접 통과해야 하며 집이 여기인 한, 간 만큼 똑같이 되짚어 돌아와야 한다. 잠을 자 버리거나 눈 감고 외면하는 것이 가능한 시간적 경험에 비해, 공간적 경험은 보다 확실한 물리적 실재성을 지닌다. 목적지가 저 산 꼭대기라면 내가 서 있는 이 지점에서 그곳까지 한 뼘 한 뼘의 대지를 전부 더듬으며 가야 하는 것이다. 한 발 한 발 디디다 보면 어느 정도의 힘을 들여야 어느 정도 진척되는지 체험할 수 있다. 내 보폭은 얼마인지, 팔을 쭉 뻗으면 어디까지 닿는지 몸소 측정한다. 돌을 밟을까 흙을 밟을까 그때그때 헤아리고 순간순간 결정한다. 솔방울의 알참, 새소리의 액체성이 똑똑히 오감을 타고 들어온다. 인식과 감흥은 촘촘해진다. 그리고 경험은 완전해진다. 권태와 무의미의 짐을 어깨에서 내려놓는다.

 

 

화면이 지배하지 않는 이곳에서 나는 여기 사람들처럼 눈앞의 세계에 충실했다. 빈 방을 물끄러미 둘러보았고, 벽에 붙여 놓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본 책은 또 보고, 바닥에 떨어진 이파리는 주워서 돌리고 쓰다듬었다. 앞마당에 부는 산들바람에 내 다리털이 흔들리는 것을 보다가 눈을 들어 야자나무 잎의 야성적인 움직임에 감탄했다. 끊임없는 벌레의 이민 행려을 지켜보았고, 음식을 바라보며 식사했다. 고양이의 기지개를 따라 하고, 물고기가 첨벙거리며 남긴 동심원을 따라갔다. 햇빛이 빨래를 말리는 속도를 목격하고, 달빛으로 박쥐 날개의 실루엣을 분간했다. 나는 진짜 삼을 살았다. 현실은 충분했다. 증강 현실도, 가상현실도, 강화 현실도 모두 불필요했다. 풍요와 연결 속의 빈곤 대신 제한과 단절 속의 자족을 누렸다.

 

 

비가 탄생하고, 비가 몸을 맡기는 숲. 숲을 가능케 하고, 숲으로 스스로를 표현하는 비. 비라는 하늘과 숲이라는 땅의 맞닿음과 상호 침투. 지구상의 가장 완벽한 자연 현상. 정글, 밀림, 열대 우림, 이것이 바로 비숲이다. 나는 비숲에 살았다.

 

 

생물이 넘치는 비숲에는 오히려 인간이 적다. 아니 인간이 적어야만 여전히 비숲으로 존속한다. 그저 생물 다양성에 하나의 종을 추가하는 정도로만 존재감이 그쳐야 그것이 비숲이다. 하지만 이제 지구 어디에서도 온전한 처녀림이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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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닝>의 원작이라는 <헛간을 태우다>가 수록된 하루키의 단편집이다.

짧고 가벼운 듯한 스토리에 가볍지 않은 인간의 삶에 대한 관조...

 

 

[본문 발췌]

 

반딧불이가 사라진 후에도 그 빛의 궤적은 내 안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감은 눈의 두터운 어둠 속에서, 그 약하디약한 빛은 마치 갈 곳을 잃은 영혼처럼 언제까지고 떠돌고 있었다. ... 나는 몇 번이나 그런 어둠 속에 가만히 손을 뻗어 보았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작은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 조금 앞에 있었다. - <반딧불이>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 <반딧불이>

 

 

심각하게 생각하기에 세계는 너무나 불확실하며, 아마 그 결과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뭔가를 강요하게 될 것이다. - <반딧불이>

 

 

'세상에는 헛간이 얼마든지 있고, 그것들은 모두 내가 태워주기만 기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헛간을 태우다>

 

 

잃어버린 경험이 없는 인간에게 잃어버린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8094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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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파타야 하면 더운 날씨가 연상된다. 그런데 올해 12월초 파타야는 아침 기온이 20도 이하로 떨어지기도 하고 낮에도 그늘 바닷가에는 서늘함을 느낄 정도로 추웠다. 이런 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구거나 사우나에서 땀을 빼는 건 어떨까?

 

파타야 시내에 위치한 유노모리 온천에서 피로풀기!

입구 신발장에 신발을 넣고, 열쇠를 리셉션에 맡긴다. 리셉션에서는 쿠폰이나 카드/현금으로 결제를 하고 긴 통로를 따라 걸어가면 카페/휴식공간이 나오고 그 아래 한층 내려가면 온천 공간이다. 온천 입구에서 유타카와 타월을 건네준다. 유타카는 2~3종류 정도 맘에 드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 온천탕까지는 남여 구분되어 있다.

 

온천은 실내에 3개 정도 온탕이 있고, 야외에 노천탕과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1인용 욕조가 몇 개 놓여 있다.

실내에 뽀얀 색 탕은 미끈미끈하니 물이 괜찮다.

 

샤워장 옆으로 건식/습식 사우나가 있고, 한 바탕 땀을 뺏으면 유카타로 갈아입고 카페/휴식공간으로 올라가 일행들과 음료나 간단한 식사가 가능하고, 안쪽으로는 수면실이 있어 휴식을 취할 수도 있다. 마사지와 스파도 신청해서 할 수 있다.

 

 

두 번째 공간은 러시아식 사우나, 

달아오른 돌에 물을 뿌려 증기가 피어오르고, 자작나무잎으로 몸을 두드려 가며 사우나를 즐길 수 있다.

사우나 옆으로 제법 큰 수영장과 방갈로가 있어, 사우나에 들어갔다가 수영장에서 몸 식히고, 방갈로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

 

마찬가지로 야외공간에 음료와 간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카페가 있고, 리셉션 위쪽으로는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공간도 있다.

 

파타야에서 일본식 온천과 러시아식 사우나 즐기기~~~

 

 

Yunomori Onsen & Spa Pattaya, https://goo.gl/maps/zsFskmQYycmwYPap7

Mari-Jari Sauna and Spa Centre, https://goo.gl/maps/716EBKwFUsrWoTF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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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시대나 현재나 언론을 지배하는 것은 자본과 권력인가?

 

 

[본문 발췌]

 

모든 작가는 '정치에 거리를 두려는' 충동을 느낀다. 평화롭게 책을 쓸 수 있도록 내버려두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이상은 기업형 슈퍼마켓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를 바라는 구멍가게 주인들의 꿈보다도 실현 불가능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 우선 언론 자유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영국에서 언론의 자유는 언제나 일종의 사기였다. 마지막 순간에는 언제나 돈이 의견을 지배한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법적 권리가 있는 한 별난 작가가 빠져나갈 구멍은 언제나 있기도 하다. ... 모든 작가가 완전히 침묵하는 쪽을 택하거나, 아니면 소수의 특권층이 요구하는 마약만 만들어낼 때가 올 것이다. - <나는왜 독립노동당에 가입했는가>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대 현대의 수많은 발명품들(특히 영화, 라디오, 비행기)은 인간의 의식을 약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며, 대체로 인간을 가축에 더 가까운 쪽으로 몰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 <행락지>

 

 

<나는 왜 쓰는가> 중에서

나는 생계 때문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글을 쓰는 동기는 크게 네 가지라고 생각한다(적어도 산문을 쓰는데 있어서는 말이다). 이 동기들은 작가마다 다른 정도로 존재하며, 한 작가의 경우에도 시기별로나 시대 분위기 별로나 그 정도가 다를 것이다.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순진한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드릐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 이게 동기가 아닌 척, 그것도 강력한 동기가 아닌 척하는 건 허위다. 작가의 이런 특성은 과학자, 예술가, 정치인, 법조인, 군인, 성공한 사업가 등, 요컨대 최상층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특성이다. 사람들 절대다수는 그다지 이기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서른 남짓이 되면 개인적인 야심을 버리고(많은 경우 자신이 한 개인이라는 자각조차 거의 버리는 게 보통이다) 주로 남을 위해 살거나 고역에 시달리며 겨우겨우 살 뿐이다. 그런가 하면 소수지만 끝까지 자기 삶을 살아보겠다는 재능 있고 고집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 작가는 이 부류에 속한다. 나는 진지한 작가들이 대체로 언론인에 비해 돈에는 관심이 적어도 더 허영심이 많고 자기중심적이라고 생각한다.

2. 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어떤 소리가 다른 소리에 끼치는 영향, 훌륭한 산문의 견고함, 훌륭한 이야기의 리듬에서 찾는 기쁨이기도 하다. 자신이 체감한 바를 나누고자 하는 욕구는 소중하여 차마 놓치고 싶지가 않다. 미학적인 동기가 상당히 약한 작가들도 많긴 하지만, 팜플렛이나 교과서를 쓰는 저자라 해도 비실용적이지만 매력과 애정을 느끼는 낱말들과 문구들이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어도 글꼴이나 여백 같은 것들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는 수가 많다. 철도 안내책자 수준을 넘어선다면, 어떤 책도 미학적인 고려로부터 딱히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3. 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를 말한다.

4. 정치적 목적.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동기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 <나는 왜 쓰는가>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366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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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여행지로 손색없는 태국에 면요리를 빼놓을 수 없다.

이번 여행에서 이미 소개했던 소와 돼지 부속물이 들어간 해장용 국수집 제또를 소개했었고,

이번에는 파타야에 사는 동생이 강추하여 데려간 소고기 국수집과 란포수산시장 인근을 지나다가 우연히 찾게된 오리국수집이다.

 

우선 소고기 국수집은 카오산의 소갈비국수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훨씬 깊은 국물맛을 내는 곳이라 생각한다.

돼지고기 국수도 있고, 우리의 수육같은 메뉴 등 몇 가지 다른 메뉴도 있다.

 

오리 국수집은 내공 있어 보이는 갈색톤의 인테리어가 고풍스러움을 내보이는데, 구운 오리를 밥, 국수(비빔과 국물 중 선택), 완탕 등에 올려서 내준다.

보통 사이즈와 곱배기 사이즈 선택도 가능하고, 면은 계란이 들어간 노란면이다.

 

태국 보통의 식당에서 포장을 하는 경우 스티로폼이나 비닐봉지에 넣어주는데, 여기는 종이로 만든 용기에 넣어주는 센스가 있다.

 

국수를 좋아하시는 분들, 파타야에 가시면 제또와 더불어 아래 두 곳을 가보시길 권한다.

 

Meng Kee Roast Duck, https://goo.gl/maps/kSddKt2WnbNPmrVd9

Steamed Beef Noodles, https://goo.gl/maps/GmoicxRiCbKZUVhH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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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소중히 쓰면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삶이 즐거운 삶입니다.  우주의 생성과 지구, 생명체의 역사에서 우리의 인생은 보이지도 않는 한 점에 불과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시간은 소중하고 다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발췌]

 

 

'합리적' 인 것이 언제나 '합리적'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과학과 수학은 '합리적' 일수록 좋은 결과가 얻어지지만, 예술과 예술을 닮은 인생의 여러 장면들은 때론 중요한 인상만 '선택' 해서 간직하는 불평등과 불합리를 통해 아름다워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겐 시간이 지연되는 것을 참지 못하는 나쁜 습성이 있습니다. 기다림과 미뤄짐을 무조건 손해로 여깁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지연되었기에, 미뤄졌기에 위험을 피하게 되는 상황이 종종 벌어집니다. 그런 경험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이런 행운은 그저 행운일 뿐입니다. 어쩌다 보니 재수가 좋아 한 번쯤 이런 일도 있구나, 하고 넘어가버립니다. 보편적인 나타남은 일시적인 행운이 아닙니다. 실체를 갖춘 지혜입니다. 우리는 늦어짐의 지혜에 대해 생각해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각자의 시간에 노력이라는 열정을 어느정도 투입했는가에  따라 일의 가치가 결정된다. 

 

 

동일한 시간 동안 사람의 인생이 다르게 결정되는 이유는 시간의 '질'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질'은 기억과 관련이 깊습니다. 질 좋은 시간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질 나쁜 시간은 방금 전에 일어난 일도 기억해내지 못합니다. 기억의 형성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감정적 충격입니다. 선명한 감정적 충격이 뇌리와 마음에 깊게 새겨져 기억할 의사가 없음에도 저절로 기억되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반복입니다. 시간을 들여 반복적으로 주입시킨 기억입니다.

 

 

변화를 원한다면 조금씩,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강도를 높여나가는 방법을 택하세요. ... 인생에서 자신의 길을 중단한 사람이 곧 환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없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잠시라도 그 걸음을 멈추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지금 아파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두려움은 믿음이 약해졌다는 신호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인생이 두려운 까닭은 나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고, 사람이 두려운 까닭은 그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랑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확신합니다. 사랑 없이 우리의 생명은 유지되지 않으며, 발전 또한 기대할 수 없습니다. 당신과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당신과 내가 현재 뭔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당신이 어떤 직업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다면 다음 세 가지를 유념해야 합니다. 첫째, 그 일에 필요한 능력을 갖출 것, 둘째, 지나치게 많이 일하려고 하지 말 것, 셋째, 그 일을 사랑한다고 당신 자신을 속이지 말것.

 

 

청춘이 아름다운 것은 그 시기가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영혼이 청춘의 때와 같이 다시 한 번 흥분하는 것은 당신에게 남은 세월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9822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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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타야에도 유명한 씨푸드 레스토랑이 여러개 있지만, 시원한 바다 배경으로 식사를 할 수 있는 두 곳을 꼽자면 좀티엔 비치 너머에 있는 Pupen과 파타야 비치 북쪽 Naklua에 있는 Mum Aroi가 대표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두 곳 모두 큰 규모를 자랑하고 다양한 씨푸드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이번 파타야 여행 첫날은 숙소 근처에 Mum Aroi를 방문했는데, 음식도 맛있고 밀착 서비스도 친절하고, 가족모임이나 일로 접대하는 경우 괜찮은 장소라 생각한다. 

 

그런데, 씨푸드 레스토랑보다 훨씬 적은 가격으로 시장 구경을 겸해 싱싱한 해산물을 골라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다.

 

Mun Aroi와는 도보로 10~15분 정도 떨어져 있는 란포 수산시장이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왠만한 해산물은 다 있고, 여기서 산 해산물을 근처에 일정 금액을 받고 찜, 구이 등으로 요리까지 해주니, 숙소나 집으로 가져가 원하는 술과 함께 해산물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생선, 골뱅이 같은 고동 종류, 종류별 새우, 그리고 크레이그 피쉬와 각종 랍스터, 게류, 갑오징어 등을 골라 구워먹고 쪄먹고......

 

조리해 주는 곳에서 먹기좋게 손질까지 해서 포장을 해주니, 시장 옆에 바닷가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먹어도 좋다.

 

해산물 종류 뿐 아니라 시장 근처에 닭꼬치  등 곁들어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파는 노점상도 있어 다양하게 골라 먹을 수 있다.

 

참고로 조리 비용은 숯불구이 기준으로 생선은 마리당으로 50밧, 고동이나 새우, 갑오징어 등은 킬로당 30밧 정도 받고 있다.

 

팁1, 많은 여행자들의 숙소가 있는 파타야 비치에서 찾아간다면, 우선 돌고래상 근처 렛츠릴렉스 앞에서 나클루아 방면 썽테우를 타면 시장 입구에 내릴 수 있다. 썽테우 요금은 10밧....

 

팁2, 여행자들은 시장에서 해산물 골라 구이나 찜을 해주는 곳에 맡기고, 돗자리를 빌릴 수도 있다. 빌린 돗자리를 옆에 바닷가 공터에 펴 놓고 드시면 된다.

 

 

Mum Aroi, https://goo.gl/maps/LQ8ARMAfBQnEA46n7

Lan Po Naklua Market, https://goo.gl/maps/C5FmS3QNb8aYj82q7

Pupen Seafood, https://g.page/pupenseafood?sh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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