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피디아를 보면 경제적 자유는 “인권의 자유권 중 하나로 사람의 경제 활동을 인권으로 보장하는 것이 목적이다.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기업이나 부유층에서 말하는 경제적 자유와 경제 생활에 있어 독립되어 의지에 반하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경제적 자유로 나뉜다.”고 기술한다.
직장인들사이 이야기되는 파이어족은 '경제적 자립(Financial Independence)'을 토대로 자발적 '조기 은퇴(Retire Early)'를 추진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용어로, 파이어족이 추구하는 것도 경제적 자유다.
결국 돈 걱정 없이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의미로 쓰는 경제적 자유는 ‘의지에 반하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경제적 자유’에 가깝다. 그렇다면 돈 걱정, 의지에 반하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경제적 자유의 기준은 무엇일까?
명확한 기준이 있다면 좋겠지만 사람마다의 처한 환경, 가족 구성, 라이프스타일 등에 따라 경제적 자유를 위한 필요 자원의 규모가 다르고 소유와 소비에 대한 성향에 따라 기준점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경제적 자유는 행복과 비슷하게 상대적 기준점이 작용한다. 행복을 기대수준 대비 만족도라고 하면 개인에 따른 기대수준의 높낮이, 만족을 느끼는 수용도에 따라 행복의 기준점이 달라질 수 있듯이 경제적 자유도 기대하는 보유 자산과 생활에 필요한 자금의 수준에 따라 경제적 자유를 위한 기준점이 달라질 것이다.
여하튼 뭔가 기준이 있어야 경제적 자유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의 고민이 시작된다.
앞에서 말한 ‘경제 생활에 있어 독립되어 의지에 반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생활에 필요한 적정 수준의 돈이라는 것에서 생각을 시작해보자. 그럼 적정 수준은 얼마일까? 이것도 생각하기 나름이고 기준을 잡기 어렵기 때문에 현재 수준에서 내가 일년 생활하는 데 사용한 돈이나 나의 1년 연봉, 또는 현실적인 나의 1년 수입을 시작점으로 1년 동안 생활에 필요한 돈의 규모가 기준점이 될 수 있다. 여기에는 내가 처한 환경, 가족 구성, 소비 수준과 성향, 라이프스타일 등이 어느정도 반영되었다고 가정한다. 예를 들어 “1년에 평균 5천만원을 쓸 수 있다면 돈 걱정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다” 라고 기준을 잡았다면 나에게 경제적 자유란, 독립되어 의지에 반하는 행위를 하지 않으며 매년 5천만원 정도 현금흐름이 발생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드는 것이다. 단, 여기에 물가인상 등 다른 부차적인 문제도 나중에 고려할 부분이다.
상황에 따라 목표 수준이 변경될 수 있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목표 초기값이 있어야 발을 뗄 수 있으니 개인의 환경을 고려해 경제적 자유를 위한 목표 수준을 정해보자.
01. 경제적 자유란? 02. 경제적 자유를 위한 안정적 현금흐름 구성하기 03. 물건도, 투자도 싸게 사야 수익을 낸다 04. 배당 재투자로 자산 불리기 05. 기하평균, 복리의 마법 06. 시간에 투자하기 07. 나는 경제적 자유를 이루었는가?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일상은 삶을 권태롭게 한다. 잠시 멈춰 과거와 현재를 음미해보는 것, 반성하고 의심하고 꿈과 열정을 갖는 것, 일상을 바꿔 새로운 길과 새로운 일들을 시도해 보는 것이 삶의 의미와 풍성함, 행복을 느끼는 방법일 수 있다.
[본문발췌]
연필의 다섯 가지 특징, 그걸 네 것으로 할 수 있다면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게야
네가 장차 커서 큰일을 하게 될 수도 있겠지? 그때 연필을 이끄는 손과 같은 존재가 네게 있음을 알려줄거다. 명심하렴. 우리는 그 존재를 신이라고 부르지. 그분은 언제나 너를 당신 뜻대로 인도하신단다.
가끔은 쓰던 걸 멈추고 연필을 깍아야 할 때도 있다는 사실이야. 당장은 좀 아파도 심을 더 예리하게 쓸 수 있지. 너도 그렇게 고통과 슬픔을 견뎌내는 법을 배워야 해. 그래야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게야.
실수를 지울 수 있도록 지우개가 달려 있다는 점이란다. 잘못된 걸 바로잡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오히려 우리가 옳은 길을 걷도록 이끌어주지.
연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외피를 감싼 나무가 아니라 그 안에 든 심이라는 거야. 그러니 늘 네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렴.
연필이 항상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이야. 마찬가지로 네가 살면서 행하는 모든 일 역시 흔적을 남긴다는 걸 명심하려. 우리는 스스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늘 의식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란다.
먼 훗날 어딘선가 나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겁니다. 숲속엔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로버트 프로스트"
뭔가를 원한다면, 먼저 상대와 눈을 맞추십시오. 세상의 어떤 소통 방식도 눈을 맞추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새로운 긴 하루가 시작된다. 신문, TV 뉴스, 정원일, 점심, 짧은 취침.... 원하면 뭐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아무런 의욕이 없음을 돌연 깨닫는다. 마누엘은 자유롭지만 우울증에 걸리기 직전이다. 삶의 의미를 곱씹기에는 늘 너무 바쁜 나날들을 보냈고, 그저 세월이 다리 아래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었다. 한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그의 삶은 흘러갔네 / 그는 삶을 살지 않았다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변화를 추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생각을 딴 데로 돌리는 게 최선이다. 그렇게 힘겹게 얻은 자유 속에서 그는 가면을 쓴 채 떠돈다.
'그는 살아서 죽었다', 말장난이나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는 일하고 먹고, 열심히 일상을 꾸려나가면서도 살아 있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 봐왔어요. 그들은 하루하루 펼쳐지는 삶의 기적에 대해 되새겨보기 위해 잠시 멈추지도 않고, 다가오는 시간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채 기계적으로 살고 있지요.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가장 중요한 일 : 귀 기울여야 했던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미리 걱정하는 친구들, 터무니없어 보이는 일로 인생을 낭비하는 지인들, 의미 없는 대화들, 핵심이 없는 길고 지루한 전화 통화들, 자릿값을 하느라 일거리를 만들어내는 상사들, 하루라도 중요한 업무를 맡지 못하면 책상이 없어질까 초조해하는 직장인들, 저녁에 아이들을 내보내고 전전긍긍하는 어머니들, 공부와 시험에 시달리는 학생들....
성스러운 순간 (기도문) 주여, 우리의 의심을 지켜주소서. 의심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의심은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의 문제에 대한 많은 답들과 두려움 없이 마주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의 결정을 지켜주소서. 결정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우리의 의심을 이기고, 이 길과 저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주소서. 우리의 긍정이 늘 긍정이도록, 우리의 부정이 늘 부정이도록 하소서. 한번 결정한 길은 뒤돌아보지 않도록, 후회가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지 않도록 하소서.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의 행동을 지켜주소서. 행동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우리가 맺는 가장 좋은 열매가 되게 하소서. 노동과 행동을 통해 우리가 받을 사랑을 나누게 하소서.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의 꿈을 지켜주소서. 꿈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나이와 외적 조건에 상관없이 가슴속에 성스러운 희망과 인내의 불씨를 품게 하소서.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에게 열정을 주소서. 열정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우리를 하늘과 땅, 어른이나 어린아이들과 결합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니. 열정은 우리의 욕구가 중요함을 일깨워주고 최선을 다하도록 북돋워줍니다. 우리가 하는 일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는 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열정은 재삼 확인해줍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를 지켜주소서. 생명은 우리가 당신의 기적을 다시 펼쳐 보일 유일한 길입니다. 이제까지 그랬듯 땅이 씨앗을 낟알로 여물게 하시고, 밀알을 빵으로 만들게 하소서.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사랑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외롭게 하지 마소서.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시며, 의심하고 행동하고 꿈과 열정을 품은 사람들, 매일매일 당신께 영광 돌리는 삶을 이들과 더불어 함께하게 하소서. 아멘
가난한 마음은 행복하다. "받은 게 있으면, 베풀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죠."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사는 동안 쓸데없는 일들을 걱정하고, 일을 미루고, 중요한 순간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스쳐지나간다.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고, 늘 푸념하면서도 막상 행동하기는 두려워한다. 모든 것이 달라지길 바라면서도 스스로는 변화하려들지 않는다. 죽음에 대해 조금만 더 생각한다면, 오랫동안 미뤄온 전화 통화를 더는 미루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 삶은 지금보다는 좀더 활기를 띠게 될 것이고, 육신의 종말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어차피 일어날 일을 두려워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인디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떠나기에 특별히 좋은 날은 없다.' 한 현자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 곁에 있다. 그리고 당신이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할 때 필요한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은 바로 그 죽음이다.' 나는 그 경지에 이르기를 바란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 모두 이르든 늦든 언젠가 죽는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삶 앞에 준비된 자이다.
왜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해보려고 하지 않는 걸까?
모든 사람에게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행복'이란 나 자신이 충만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지, 꼭 타인이 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일 필요는 없다.
현재의 모든 행동과 사건은 '결과'라는 형태로 미래에 영향을 미치며, '반성' 이라는 형태로 과거에 영향을 미친다.
그럼 이렇게 말해주세요. 사막보다 수명이 훨씬 짧은 인간들도 자신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면서 긴 세월을 허비한다고요.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운명을 발견하는 경우가 드물고, 신이 불공평하다고 느낀다고요. 어렵사리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발견한다 해도 어차피 늦었다며 삶을 바꾸지 않는 경우도 흔하다고요. 사람도 사막처럼 괴로워하며 헛되이 보낸 세월을 원망하는 편을 택하곤 하죠.
우리 어른들이 갖고 있는 우주에 대한 이해를 어린이들에게 강요하는 대신, 우리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갖고 있던,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한 질문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화성인과 외계인은 존재하나요?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도 사고를 당하는 이유는 뭔가요? 신은 어떤 존재인가요? 우리가 결국 죽을 거라면 왜 태어나야 하나요? 하늘의 별은 몇 개나 되나요? 누가 전쟁과 행복을 만들어냈나요? 왜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들이 존재하나요? 왜 하느님은 모기나 파리를 만들었나요?.....
누구나 살면서 피해갈 수 없는 비극과 맞닥뜨리는 때가 있다. 살고 있는 도시가 파괴되거나, 아이가 먼저 세상을 떠나거나, 근거 없는 비난을 받으며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갑자기 불치의 병에 걸리기도 한다. 삶은 위기의 연속이며, 이 사실을 망각한 사람은 운명이 준비한 도전에 무방비상태로 맞서게 된다. 고통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일어난 사건의 의미를 묻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준비를 하는 것뿐이다. 고통과 위기가 닥치면, 우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감정을 우리와는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대해서도 안되고, 매사 자책하던 것처럼 벌을 받는 거라고 여겨서도 안된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거대한 상실과 마주할 때, 우리는 현자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인내, 그리고 삶의 모든 것은 한시적이라는 깨달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삶의 가치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세상이 다시 안전한 곳이 되지 못한다면, 적어도 수년안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이 변화를 늘 하고 싶었지만 용기를 내지 못했던 일을 할 기회로 삼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인간 존재의 흥미로움 한 남자가 내 친구 제이미 코언에게 물었다; "사람의 가장 우스운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코언이 대답했다. "모순이죠. 어렸을 땐 어른이 되고 싶어 안달하다가도, 막상 어른이 되어서는 잃어버린 유년을 그리워해요. 돈을 버느라 건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가도, 훗날 건강을 되찾는 데 전 재산을 투자합니다. 미래에 골몰하느라 현재를 소홀히 하다가, 결국에는 현재도 미래도 놓쳐버리고요. 영원히 죽지 않을 듯 살다가 살아보지도 못한 것처럼 죽어가죠."
실수하라, 즐겁게 "신은 위대한 예술가다. 그는 기린과 코끼리, 개미를 창조했다. 그는 그 어떤 양식도 따르려 한 적이 없다. 그저 그가 느끼는 대로 했을 뿐이다." - 파블로 피카소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면 매순간 당신의 의견을 바꾸어보라. 부디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라. 그것은 우리의 권리이다. 다른 이들이 어떻게 여기건 상관하지 마라.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든 간에 그들은 그들 방식으로 생각하게 될 테니까.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려고 마음먹으면 정도를 넘어서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오믈렛을 만들기 위해선 달걀부터 깨뜨려야 한다'는 오래된 속담처럼. 예상치 못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갈등으로부터 상처가 생기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흉터는 남겠지만 아픔은 지나가게 마련이다. 자신의 실패를 실수로 여기지 않고, 진정한 자아를 만나는 길로 이끄는 발걸음으로 여긴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남을 돕는 것.
긴장해야 할 때는, 오직 그것을 필요로 하는 곳에만 초점을 맞춰라. 힘을 아끼고, 활과 더불어 배우라. 과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동작보다는 목표에 집중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는 사실을... 활을 쏘는 순간은 본능적으로 감지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활과 화살, 과녁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삶의 도전에 응할 때도, 완벽하게 움직이는 데도 직관은 필요하다. 완벽히 습득한 후에야 우리는 테크닉을 완전히 잊을 수 있는 것이다.
참 부끄러운 일이에요. 사람들이 서로를 가르는 차이점만을 본다는 건 말이죠. 좀더 애정을 가지면, 우리가 가진 공통점들이 먼저 보일 겁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의 문제가 반은 풀릴 거고요.
'시간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의지의 힘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변화를 가능케 하는 것은 오직 사랑이다.' - 헨리 드루먼드
"오늘 길을 가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다행히 우산과 외투가 있긴 했지만 문제는 그게 멀찌감치 주차한 차 트렁크 안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차를 향해 달리며 나는 생각했습니다. 지금 신께서 내게 기묘한 메시지를 보내고 계신 건 아닐까? 우리는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만나는 폭풍에 대비해 필요한 것을 늘 챙겨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개 우리 가슴 깊숙이 갇혀 있어 막상 필요할 때 찾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것을 찾는 건 이미 역경에 패한 뒤입니다." 항상 준비하자.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기회를 놓치거나 싸움에 지게 된다.
폭풍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여느 폭풍처럼, 이것 역시 재해를 몰고 올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폭풍은 들판을 적셔주고 하늘의 지혜를 알려준다. 그리고 여느 폭풍처럼, 그것은 곧 지나갈 것이다. 사나울수록 폭풍은 빨리 지나간다.
마지막 기도문
의미 없는 천 마디의 말보다 마음에 평화를 부르는 한 마디 말이기를, 현란한 천 편의 시보다 영혼의 잠을 깨우는 단 한 줄의 시이기를, 귓가를 스쳐가는 천 곡의 노래보다 심금을 울리는 한 곡의 노래이기를. - (법구경)
저 밖에, 옳고 그름 너머 광대한 들판이 존재하느니. 우리는 거기서 만나리라. - (메블라나 잘랄루딘 루미)
오 알라여,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시고 숨겨진 것도 아시나니 제게 가르쳐주소서. 지금 제가 행하는 일이 지금과 미래의 저 자신과 제 믿음과 제 사람에 유용한 것이라면, 이 일을 수월하게 하시고 축복하소서. 지금 제가 행하는 일이 지금고 미래의 저 자신과 제 믿음과 제 사람에 해로운 것이라면, 제게서 이 일을 거두소서. - (선지자 무함마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구하는 이마다 구할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 (나사렛 예수, 마태복음 7장 7~8절)
주의 길을 좇아 우리도 주의 산으로 올라가자. 우리의 칼을 쟁기로 바꾸고, 우리의 창을 낫으로 바꾸자. 민족이 민족에게 칼을 휘두르지 않고, 더는 전쟁에 대해 배우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이것은 주께서 주신 말씀이니. - (평화를 위한 유대인의 기도)
세상에 평화가 오려면 백성이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려면 부족들 간에 싸움이 없어야 한다. 부족들 간에 싸움이 그치려면, 이웃 간에 분란이 없어야 한다. 이웃 간에 분란이 없으려면, 가정이 화목해야 한다. 가정이 화목하려면, 각자의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 (노자)
손을 계속 움직여라. 10분이든 한 시간이든 글을 쓰려고 자리에 앉았다면 발 앞에 폭탄이 떨어지더라도 꼼짝해서는 안된다.
억제하지 말라. 말하고 싶은 걸 말하라. 글의 내용이 정확한지 겸손한지 적절한지를 걱정하지 마라. 그냥 뱉어내라.
구체적으로 쓰라. 자동차라고 하지 말고 캐딜락이라고 하라. 과일이 아니라 사과라고 하라. 그냥 새가 아니라 굴뚝새라고 하라.
생각하지 말라. 처음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써라. 두 번째 세 번째 생각으로 나아갈 필요는 없다. 첫인상을 무시하지 말라.
마침표와 철자, 문법에 얽매이지 말라. 생각을 옮겨 적는 것이 중요할 뿐, 문법이나 철자는 한참 뒤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마음껏 쓰라. 당신 앞에 있는 것 중 가장 쓸모없는 것, 우주에서 가장 하찮은 것에 대해서도 써보라. 쓰고 싶다면 망설이지 말고 당신 마음대로 써라.
급소를 건드려라. 두려운 것이 떠오르면 피하지 말고 맞서라. 그 곳에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계속 두려움의 주변을 멤돌며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글쓰기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일수록 단어의 원래 뜻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럴 때 좀 더 유연해지는 방법이 있다. 틀을 깨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
'유일한 시간은 현재뿐이다. 과거와 미래라는 개념은 단지 머릿속의 개념일 뿐이다.' - 조지프 골드스타인 <통찰의 경험>
자본주의의 바탕은 탐욕과 불만이다.
인생은 빈손으로 시작해서 빈손으로 끝나는 것, 이것이 당신이 매번 작가로서 배우게 될 오래된 진리다.
글쓰기는 글쓰기 자체로 그대로 두고 그 순간에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만 얻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 몰두하면 과거와 현재, 미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장작을 패고 있다면 온전히 장작 패는 일에 몰두해야 하고, 양치질을 하고 있다면 양치질에만 몰두해야 한다. 걷고 있다면 걷기에만 몰두해야 한다. 책을 쓸 때면, 언제고 이 작업이 끝나기만을 갈망한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일이다. 기다리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다. 책을 다 쓰고 나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또 다른 책을 쓰기밖에 더하겠는가. 그러니 뭔가 기대하는 것을 아예 포기해야 한다. 그냥 쓰는 것, 그것이 바로 글쓰기에서 얻는 미덕이다. 성공은 사람을 어리석게 만든다.
'한 줄의 멋진 시를 쓰라. 그러면 유명해질 것이다. 지루한 시를 길게 쓰라. 그러면 사람들이 잠들 것이다!' - 앨런 긴스버그
나는 앤더슨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글쓰기가 그들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글쓰기가 나의 삶과 어떤 연관이 있고 그것이 내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도 보여주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문학은 생명을 갖게 된다. 강의실에서 청중들을 지켜보라. 만일 강연 내용이 추상적이고 현실과 괴리되어 있으면, 우리의 생각도 그것을 반영하여 먼 곳을 떠돈다. 반면 강연 내용이 충실하고 강연자 자신의 구체적인 삶과 연관되어 있으면 청중들의 생각도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 들은 내용을 쉽게 이해한다. 생각에 관한 똑같은 원리가 각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살아 있는 교사는 살아 있는 교실을 만든다. 작가도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현재에 집중하지 않은 채 애매하고 불명확하게 쓰면 독자를 잃고 말 것이다. 사람들은 구체적인 것, 자신과 연관된 것, 사적인 것을 좋아한다.
작가는 눈, 입술, 턱을 세밀하게 묘사할 뿐 아무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멋진 글들은 원래의 세부묘사에 충실하다. 연속적인 세부묘사.
작가는 진실을 가로막는 벽과 싸우는 위대한 전사이며, 사회를 위해 사람들의 경험을 해석해주는 대리인이다.
독자가 답을 찾기 위해 책장을 넘기고 싶도록 만드는 질문이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한다. "각 장들은 질문을 계속 뒤로 넘겨야 해요. 만일 한 장이 질문의 경로에서 벗어났다면, 당신도 그 장과 함께 작품에서 벗어난 거예요."
글의 구성은? "E.M. 포스터가 말하길 '왕이 죽고 왕비도 죽었다.' 이건 줄거리고, '왕이 죽고 슬픔에 못이겨 왕비도 죽었다.' 이건 구성이라더군요." 구성은 원인과 결과 그리고 인연에 관한 것이다. 뭔가 일이 일어나면 그에 따른 결과가 있다. 모든 장이 결과를 향해 갈 때 우리가 흡족함을 느끼는 것은 그런 결론이 진실이라는 생각과 공명하기 때문이다. 구성은 원인과 결과, 인연을 통해 구조나 설계가 작품 전체를 장악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팔아 인생을 산다. 그 시간마저도 한도가 있어 인생에 쉼표, 잠시 멈춤을 두려워한다. 잠시 멈춤, 쉼표가 인생을 즐기는 시간을 늘려 줄 수도 있다.
[본문발췌]
마흔 살, 우선 멈추어라. 사는 게 너무 바쁘면 멈춰 서는 일을 잊기 쉽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으면 한숨 돌리는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나이가 마흔쯤 된 사람들 중에는 이런식으로 달려온 이들이 많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아오던 대로 계속 달려도 괜찮을까? 또 앞으로도 이대로 계속 달릴 수 있을까? 마흔이라는 나이는 계속 달려야 하는 시기인 동시에 털썩 주저앉고 싶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서 30대 때와는 또 다른 육체적인 피곤함을 느끼기도 한다. 정신적으로도 여러가지 고민거리가 생긴다. '지금까지 난 대체 무엇을 하며 산 것일까?', '이제 젊지도 않고 인생이라는 여행도 슬슬 내리막이겠지.' 이런 식으로 고민하다 주저앉기 쉽다. 실제로 그대로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지만 주저앉아 있다고 해답이 찾을 수 있을까? 계속 고민만 하고 있는 것 역시 힘들고 괴로운 일이 아닐까? 똑같은 마흔 살이라도 계속 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저앉은 사람도 있다. 성공한 사람과 성공하지 못한 사람 또한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든 마흔이라는 나이는 누구나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기회이다.
마흔부터 피해야 할 말들
"나는 그런 일은 안 해". 이 말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할지 안 할지를 규정하는 발언이다. 인간관계도 그렇고 업무처리도 그렇고 마흔 살쯤 되면 경험이 쌓이면서 자기만의 방식이 자리를 잡는다. 그렇기에 더더욱 별생각 없이하기 쉬운 말이지만 지금 부터는 잊어버리기 바란다. '지금까지 해 온 방식'을 반복만 하면 새로운 문은 열리지 않는다.
"미안, 나는 모르겠어". 배우는 일을 그만두는 순간 사람은 늙기 시작한다.
"인생이란 게 다 뻔하지. 지금처럼 계속 살면 돼". 자신이 쌓아온 것만 고집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면 스스로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한 발전은 앞으로 계속 주변 사람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나의 연표 만들기 (20~40, 40세 이후)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소유물 리스트 만들어보기) 마흔 살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노력만 해온 사람이 대부분이다. 멈춰 서서 정리하는 여유도 없이 달리기만 해왔기에 모르는 사이에 여러 가지 것들이 늘어나 있는 것도 당연하다. 또 거의 무의식적으로 늘어난 소유물이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좋은 것을 가지고 있었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키는 변하지 않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릇을 넓히는 일은 가능하다. 까치발은 30대쯤에서 그만두고 70세를 향한 인생 후반기에는 그릇을 넓히는 편이 낫다. 그릇을 넓히는 데는 '보다 나은 것은 무엇인가를 아는 현명함'을 갖추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어떤 일에든 어린아이와 같은 투명한 마음으로 대하면서 감동하고 놀라고 기뻐해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모든 일을 마주하면 보다 나은 것, 정말로 좋은 것을 찾아내는 힘이 조금씩 몸에 밴다. 어떤 존재든 한두 가지 장점은 반드시 갖고 있는 법이다. 순수한 마음을 가지면 반드시 장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을 계기로 책을 읽거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거나 직접 찾아보거나 하면서 깊이 공부하다 보면 점차 자신의 그릇이 커진다.
마흔부터 '줄 수 있는 인생'이 시작된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인생은 긴 것 같지만 짧고, 많은 일이 가능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포기하게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아주 적은 수의 일밖에 할 수 없다면 한 가지든 두 가지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 사람들이 원하는 일을 하는데 평생을 바치고 싶다. 내 개인적인 소원을 이루는 일에 인생을 바치면 아무래도 쓸쓸하고 즐겁지 않을 것이다. 반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거나 사회에 공헌하는 일에는 끝이 없다. 절대 완수할 수 없는 일이기에 더욱 보람이 있다. 30대까지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아도 상관없겠지만 마흔 살부터는 조금씩 다른 사람을 위한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은 세계적으로 행동은 지역적으로 (Think global, act local) 'Think global'은 자신이 글로벌한 관점에서 어느 정도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알아두는 것도 좋다. 'Act local' 관점에서 지금까지 소홀히 했던 이웃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보자. 밖으로만 향하던 관심을 가까운 커뮤니티로 돌릴 필요가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올바르다고 알려진 방법이야말로 더욱 의심하라.'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일수록 가치는 떨어진다. (인터넷) 정보를 얻는 세가지. 체험/경험, 다른사람으로부터 직접 듣는 것, 피부로 느끼는 것
"공짜만큼 비싼 것은 없다.", 불경기 속에서 극단적으로 저렴한 물건에는 반드시 저렴한 이유가 있다. 너무 가격이 싼 캐시미어 스웨터는 가혹한 노동환경에서 인내하는 사람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일지 모른다. 그런 물건을 사면 내가 그 사람들을 짓밟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마흔 살에 멈춰 서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들 어떤 모습의 노후를 꿈꾸고 있는가? 20세부터 40세까지 인생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나?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이미 이룬 일'과 '이루지 못한 일'은 무엇인가? '고마운 것'과 '미안한 것'은 무엇인가? '자기만의 방식'을 세운다면 어떤 것일까누구를 닮아가고 싶은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앞으로 30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나에게 행복이란 무엇인가? 70세에 내가 거둘 결실은 무엇인가? 어떻게 필요한 사람이 될 것인가?
다시 시작하는 마흔을 위한 조언
기회는 균등하게 주어진다. 그러나 기회란 좋은 일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고나 실패는 자기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오늘의 나는 '시작하는 1학년'이라고 생각하자. 익숙한 일이라도 처음 하는 기분으로 임하자. 예전의 싱그럽게 반짝이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
힘들고 어려운 일로부터 도망치면 칠수록 더욱 힘들어진다. 받아들이도록 하자. 그러고 나면 해답이 보인다.
지금 집착하는 일은 없는가? 그 집착을 놓고 자신의 다리로 걸어보라. 당신은 더욱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가능성을 내가 결정해서는 안된다. 나이를 먹어도 수많은 가능성이 숨어 있다. 변신하는 일을 두려워 말라.
40대가 된 나 자신에게 "두 번째 생일을 축하해."라고 말해보자.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때라도 종이와 펜을 들고 있으라. 문뜩 떠오르는 것이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꼭 종이에 적어 남겨라. 나중에 반드시 잘했다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마음속에 존재하는 자물쇠가 걸린 서랍을 상상해보라. 거기에 언제, 무엇을 집어넣었을까?
"고맙습니다."라고 10번 소리를 내어 말해보자. 그러면 어떤 일이 떠오르는가? 누구의 얼굴이 떠오르는가?
예전의 좋았던 일이며 과거의 영광 등은 모두 잊고 아무것도 없는 나로 돌아가라.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 '이미 이룬 일'과 '아직 이루지 못한 일', '고맙습니다' 리스트와 '미안합니다' 리스트 등을 종이에 써보자.
작은 약속일수록 지켜라. 특히 놀기로 한 약속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익이나 손해와 관계가 없는 약속일수록 지켜야 한다.정말로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항상 생각하고 잊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어떤 때, 어떤 것에, 어떤 식으로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지 상상해 보자. 직장생활과 일상생활의 힌트는 거기에 있다.
어떤 일이라도 이기고 지는 것에 집착하는 일은 그만두어라. 어차피 다른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렇게 하면 세계가 훨씬 넓게 보일 것이다.
머리 상태를 신경 쓰는 사람은 몸가짐도 신경을 쓴다. 입는 옷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일상생활도 소중히 한다. 일상생활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일도 소중히 한다.
가장 중요한 일은 건강관리이다. 건강할 수 있도록 매일 스스로 노력하라. 건강은 웃음을 낳는다. 웃는 얼굴로 일을 시작하라.
건강하고 아름다운 치아는 앞으로의 당신에게 보물이 될 것이고 부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철저히 관리하라.
어떤 사람이라도 결점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결점을 비난하지 말고 친구처럼 사이좋게 지내라. 결점이 도움을 줄 때도 있다.
부모님을 열심히 관찰하라. 나의 미래에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하면 좋은지, 배울 것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우리 라코타 족 인디언들에게는 모든 생명체가 인격을 갖추고 있었다. 오직 모습만 우리와 다를 뿐이었다. 모든 존재들 속에 지혜가 전수되어 왔다. 세상은 거대한 도서관이었으며, 그 속의 책들이란 돌과 나뭇잎, 실개천, 새와 짐승 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대지의 성난 바람과 부드러운 축복을 나눠가졌다. 자연의 학생만이 배울 수 있는 것을 우리는 배웠으며,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을 느끼는 일이었다." - 류시화의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중에서, 갓난아기 시절에 라코타 부족에게 키워진 테톤 수우족 출신의 인디언 '서 있는 곰'의 말
'미련한 사람들의 우직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갑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세상을 일구어나가는 당신을 우리는 뒷골목 선지식이라고 부릅니다.' - 농부네 텃밭 도서관장이 받은 감사패 글 중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고, 이해고, 자비이다.' - 법정
7년 전 말라파스쿠아에 처음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로컬 Ceres 에어컨버스와 퍼플릭 보트를 이용해 세부~말라파스쿠아를 오갔다. SM몰 옆 북부버스터미널에 5시경 도착해서 건너편 세븐일레븐에서 유심과 간식거리를 사고 바로 에어컨버스가 있길래 티켓을 사서 짐칸에 배낭을 넣고 올라갔지만 실제 출발은 사람을 좀 더 채워 5시 반경 출발해 중간 휴게소를 한 번 들르고, 보고시티와 Daanbantayan 터미널을 거쳐 마야항까지 대략 4시간 반이 걸렸다. 로컬 버스는 따로 정류장이 없이 왕복 2차선 도로를 달리며 손 흔드는 손님 태우고, 내리는 손님이 요구하는 위치에 세우고, 중간중간 간식 파는 사람들이 손 흔들면 태우고 내리기를 반복하지만 합승밴의 답답함 보다는 개인적으로 더 쾌적하다는 생각이다.
버스 요금은 인당 320페소, 세부 북부터미널에서는 창구에서 표를 끊고 차 근처로 가면 차장이 예매표를 받고 짐도 실어 주고 차가 출발하면 와서 요금을 펀치한 차표를 다시 내어준다.
에어컨버스의 종착지는 마야항, 버스 차고지는 항구 입구 밖에 있고 거리가 멀지 않지만 하차는 항구 안으로 들어가 내려 준다.
항구에 도착하면 먼저 신상을 적고 입도세 인당 140페소를 지불하고 옆 컨테이너로 가서 다시 한번 신상을 적고 뱃삯을 지불한다. 우리는 버스 도착하고 바로 출발하는 배가 있어 인당 250페소를 지불했다.
말라파스쿠아까지는 대략 35분정도 걸렸다. 7년전에는 Bounty 해변에 내려줘서 작은 배를 옮겨 타고 해변으로 갔는데, 지금은 Logon Beach에 Boat station이 생겨 오르내리기가 편해졌다. Private Boat를 이용하는 경우는 숙소나 다이빙 샵 가까운 비치에 내려준다.
[말라파스쿠아-세부시티]
세부시티로 돌아가는 날은 조식 먹고 9시경 체크아웃하고 숙소 포터 서비스를 이용해 땀을 덜 흘리고 Bounty 해변에서 Public Boat station으로 이동했다. 선착장 입구에 작은 책상을 놓고 탑승객 명단에 서명하고 표를 예매하는데 가격이 들쑥날쑥이다. 나올 때는 인당 300페소를 달라 한다. 앞에 남미 손님들, 중국인 같은 여행객 따라 요금 지불하고 선착장 입구 그늘에 서서 대기. 10~15분쯤 지나서 보트 이동 하는 사람들 따라가 35~40분 가량 이동해 마야항 도착. 항구 입구에서 밴 호객을 하는데 처음에는 350페소, 마지막은 300페소인가 250페소인가를 부른다. 그냥 버스 탄다고 하고 버스 차고지로 이동해 입구에 대기하는 사람에게 물어보고 그늘에 앉아 기다리는 땀이 주룩주룩. 30분쯤 기다리니 출발하는 버스가 다가오는데 논에어컨 버스라 패스. 다시 30분쯤 기다려 에어컨 버스를 탔다. 우연히도 올 때 탔던 버스 기사와 차장, 차장이 짐을 실어 주며 알아보고 long time no see 란다. 세부시티로 돌아오는 길은 세부시티 근처로 올수록 차가 막혀 6시간여 만에 노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몇가지 Tips]
마야항에서 세부시티로 올 때 논에어컨 버스가 먼저 온다면 그걸 타고 Daanbantayan 터미널에 나와서 화장실도 들르고, 간식도 먹으며 에어컨 버스를 기다리는 것도 좋겠다. 마야항 차고지에 갔을 때 먼저 대기하던 아주머니와 아들 모자도 먼저 타고 가시더니 Daanbantayan 터미널에서 우리가 타고간 에어컨 버스에 다시 오르셨다.
Public boat는 사람이 어느정도 모여야 출발하던지 외국인들보고 추가 요금을 더 받아서 출발하는 경우가 있다. 간혹 숙소나 다이빙샵을 통해 예약된 Private Boat 선장이 Public Boat 요금+100페소 정도로 타고 나갈지 물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행운이라 생각하고 조인해야 한다.
요즘은 e-sim을 많이 사용하지만, usim을 써야 할 경우 굳이 공항이나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는 현지 세븐일레븐에서 45페소 3일짜리 usim을 사서 등록해 쓰고 로드 충전해 연장해서 쓰면 통신비를 아낄 수 있다.
말라파스쿠아에서 세부시티 도착하고 밤이나 새벽비행기 시간까지 SM몰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SM몰 트레블러라운지에 짐을 맡기고, 샤워 후 옷도 갈아입고 SM몰에서 식사와 쇼핑을 즐기다 공항 버스로 이동할 수 있다. 단, 샤워실은 오직 물만 있다. 세면도구는 챙겨서 가시길.
7년 전 처음 Tresher shark(환도상어)를 보러 말라파스쿠아에 왔을때는 이른 새벽 동트기 전 배를 타고 모나드숄에서 많은 다이버들이 잠시 순서대로 무릎꿇고 기다리며 대부분 멀리 흐릿한 모습 정도를 봤는데, 올해 2월 Ticao에서 만났던 다큐멘터리 촬영 작가 robin의 그림같은 영상에서 눈과 반짝이는 피부까지 또렷한 모습에 다시 찾았다.
환도상어를 만나는 포인트도 모나드숄에서 키무드숄로 바뀌고, 개체수나 모습을 나타내는 시간도 많이 늘어났다. 심지어 중간에 몸 클리어링의 일종이라는 물밖 점핑까지 하는 녀석들.
긴꼬리와 똘망똘망 눈까지, 조용히 기다리면 1미터 이내 근접거리까지도 다가온다. 부드럽게 유영하는 모습이 우아한 녀석들이다.
환도상어가 거의 99% 확률로 만날 수 있다면 모나드숄에서 볼 수 있다는 Tiger shark(뱀상어)는 만나기가 쉽지 않다. 첫째날은 모나드숄을 이잡듯 뒤지고도 꼬랑지도 못보고, 마지막날 별 기대 없이 들어간 모나드숄 입수 후 바로 가이드는 못본 방향으로 상어 꼬랑지를 봐서 왠지 느낌이 좋았는데 tiger shark이 떡하니 나타나서 내 앞으로 눈을 마주치며 지나간다.
바로 이어 다급한 소리에 눈을 돌리니, 거대한 그림자가 손살같이 지나가는데 사이즈가 앞에 본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빅 사이즈 tiger shark. 순간 카메라가 켜지는 사이 지나갔는지 그림자도 안찍혔다.
예술 작품은 현재까지의 경험, 관찰, 상상력을 고정시켜 미래에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보게 되었을 때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
[본문발췌]
움베르토 에코
창조적으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식인이랍니다. 어떤 농부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새로운 접목 기술로 새로운 종류의 사과를 생산해낸다면 그 순간 지적인 행위를 생산하는 것이지요. 반면에 하이데거에 대한 똑같은 수업만 평생 되풀이하는 사람은 딱히 지식인이라고 하기 어렵지요. 비판적인 창조성 -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것을 비판하거나 그 일을 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을 만들어내는 것 - 만이 지식인의 역할의 유일한 징표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쓴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글쓰기는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주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이지요. 무엇인가 소통하기 위해서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감정을 나누기 위해서요. 작품이 얼마나 오래 살아남는가의 문제는 소설가나 시인만이 아니라 모든 작가들에게 근본적인 문제랍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철학자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론을 납득시키려고 책을 씁니다. 그리고 앞으로 3000년 동안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계속 읽기를 바라지요. 자식들이 당신보다 오래 살아남기를 바라고, 손자가 있다면 손자가 자식보다 오래 살기를 바라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은 지속성의 느낌을 바란답니다.
오르한 파묵
소설가들은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 공동체의 기본적인 본능을 공유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직접 체험하고 있는 문화와는 다른 문화를 가지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우선 전략에서 시작한 뒤, 그것이 갖는 문학적 도덕적 진지함을 믿으면 결국 그것은 진지한 문학적 발명이 됩니다. 일종의 문학적인 언명이 되는 것이지요.
무라카미 하루키
제 일은 사람들과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지 판단 내리는 게 아닙니다. 저는 소위 결론을 내리는 것과는 언제나 거리를 두고 싶어요. 모든 것을 세상의 모든 가능성에 활짝 열어두고 싶거든요.
기억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억은 일종의 연료 역할을 하지요. 타오르면서 인간을 따뜻하게 해주거든요. 제 기억은 일종의 궤짝과 같아요. 그 궤짝에는 수없이 많은 서랍이 달려 있답니다. 어떤 서랍을 열면 고베에서 보낸 소년 시절의 광경이 떠올라요. 공기의 냄새도 맡을 수 있고, 땅도 만질 수 있고, 초록색 나무도 볼 수 있답니다. 그게 제가 책을 쓰고 싶어하는 이유지요.
폴 오스터
글을 쓰는 노력은 똑같습니다. 정확한 문장을 쓰기 위해 들이는 노력도 똑같습니다. 그렇지만 상상력으로 쓰는 작품은 논픽션 작품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자유가 있고 훨씬 더 많이 조작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는 종종 상당한 두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다음에 무엇이 나올까? 내가 쓰고 있는 문장이 절벽의 가장자리에서 나를 떨어뜨리지 않을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자서전적인 작품에서는 미리 이야기를 알 수 있어서, 작가의 주요한 의무는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글 쓰는 것이 쉬워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고독의 발명>의 첫 부분에 사용된 제사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저는 헤라클리투스가 쓴 문장 하나를 인용하였습니다. 이것은 가이 데븐포트의 비정통적이지만 상당히 우아한 번역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진리를 찾아 나설 때 예상치 못한 일들에 대비하라, 왜냐하면 진리를 찾는 것은 어려우며, 그것을 찾았을 때 당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글쓰기는 글쓰기입니다.
예술 비평가인 로버트 휴즈가 명명한 것처럼 '오락 산업'이란 괴물이지요. 요즘 미디어는 유명인, 뜬소문, 스캔들 외에는 별로 보여주는 게 없잖아요. 또, 우리가 우리 자신을 텔레비전과 영화에서 묘사하는 방식이 너무도 왜곡되거나 변조되어서 실제로 사는 삶은 잊혀버렸어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곤 충격적인 폭력물과 얼간이 같은 도피주의자의 환상물뿐이며, 뒤에 숨어서 이 모든 것을 몰아가는 힘은 바로 돈이지요. 사람들은 얼간이처럼 다루어지고요.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원하도록 조작된 소비자이며 잘 속아 넘어가는 바보에 불과하지요. 이것을 자본주의의 승리라 부를 수도 있겠지요. 또는 자유시장경제라고 부를 수도 있겠고요.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그 안에는 실제적인 미국인의 삶을 재현할 공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요.
인생은 너무도 짧고 너무도 연약하고 너무도 알 수 없지요. 결국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정말로 사랑하는 걸까요? 정말로 몇 사람뿐이겠지요. 몇 명 되지 않을 거예요. 이 사람들이 대부분 죽고 나면 당신의 내적 세계의 지도는 변할 겁니다. 제 친구 조지 오펜은 늙는 것에 대해 제게 "어린아이가 늙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늙음을 설명한 것 중에서 오펜의 설명이 제가 들어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언 매큐언 아마도 우리는 공포심을 상상력이라는 안전한 범위 내에서 끝까지 시험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종의 희망을 띤 액막이의 형식으로.
밀란 쿤테라
비본질적인 부분을 완전히 제거하기 (현대사회에서 구조적인 명증성을 잃지 않고도 실존의 복잡함을 잡아내기 위하여)
독특하게 소설적인 에세이(당연한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주장하기보다는 가설적이고 장난스럽고 아이러니한 특성을 간직하는)
소설 전체에 일관성을 부여해주는 것은 주제와 변주들의 통일성입니다. 소설은 가상의 등장인물을 통해 본 실존에 대한 성찰입니다. 소설의 형식에는 무제한의 자유가 있지요. 소설이 역사를 볼 때 소설은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어떻게 활용하면 될지 알지 못했답니다. 자신의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지요.
레이먼드 카버
자기 삶의 이야기를 소설로 바꾸려면 아주 솜씨가 좋아야 해요. 엄청나게 대담해야 하고, 뛰어난 기술과 풍부한 상상력, 그리고 기꺼이 자신에 관해 모든 걸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젊었을 때는 잘 아는 것에 대해서 쓰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듣습니다. 자신의 비밀보다 더 잘 아는 게 뭐가 있겠어요? 하지만 특별한 종류의 작가나 아주 띄어난 재능을 지닌 작가가 아니라면, 계속해서 자기 삶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건 위험합니다. 자신의 소설에 지나치게 자서전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많은 작가들에게 큰 위험, 또는 적어도 큰 유혹이 됩니다. 약간의 자서전적 요소에다 많은 상상력을 가미하는 것이 최선이지요.
어떤 삶에서는 사람들이 성공을 합니다. 그렇게 성공하는 것은 멋지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다른 삶에서는 사람들이 하려고 애쓰는 일, 가장 하고자 원하는 일, 삶을 지탱하는 크고 작은 일에 성공하지 못하지요. 저의 직간접적인 경험은 대부분 후자에 가깝답니다. 제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행동이 뭔가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이기를 바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점에 도달해 있지요. 어떤 일을 열심히 해봐야 의미가 없어요. 한때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나 그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걸 수 있다고 생각한 일들이 한 푼의 가치도 없다는 걸 알게 되지요. 삶 자체에 불편함을 느끼게 되고 삶이 무너져 내리는 걸 보게 됩니다. 그들은 사태를 바로잡고 싶어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어요. 대개는 그들도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어서 그냥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저널리즘에서는 기사가 가짜라는 한 가지 사실만이 기사 전체에 편견을 갖게 만듭니다. 대조적으로 소설에서는 이야기가 진짜라는 한 가지 사실이 작품 전체를 정당화해줍니다. 그것이 저널리즘과 소설의 유일한 차이이며, 그것은 작가가 얼마나 몰두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소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야기가 진짜라고 믿게 만들 수 있는 한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영감의 가장 큰 근원은 인생 자체이며 꿈은 인생이란 격류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 글에서 진실한 것은 제가 꿈의 여러 가지 개념과 해석에 매우 관심이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일반적으로 꿈을 삶의 부분으로 보지만, 현실은 훨씬 풍요롭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창조적인 작가로서 예술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왜 사실 그 자체보다는 사실의 재현을 선택하셨나요? 일어난 일로부터,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알고 있거나 알 수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재현이 아니라 창작을 통해 살아 있는 어떤 것보다 더 진실한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지요. 당신은 그것을 살아 있게 할 수있고, 만일 당신이 충분히 잘할 수 있다면 그것에 영원성을 부여할수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글을 쓰는 이유이고 우리가 아는 한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런 모든 이유가 있다면, 그런 이유는 어떤 것일까요?
윌리엄 포크너
작가의 의무는 최선을 다해 최고의 작품을 쓰는 것입니다.
작가는 경험, 관찰, 상상력이라는 세 가지를 필요로 합니다. 이 중의 두가지, 또는 한가지가 다른 것의 결여를 보충해줄 수 있습니다. 제게 이야기는 대개 한 가지 생각이나 기억이나 정신적인 그림에서 시작합니다.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왜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다음에 무슨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게 되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발전시키는 것이지요. 작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방식으로, 그럴듯한 감동적인 상황에서 그럴듯한 사람들을 만들려고 노력하지요.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환경을 자신의 수단의 하나로 분명히 사용해야 합니다. 음악은 인간의 경험과 역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했기 때문에 표현하기 가장 쉬운 수단은 음악일 것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그러나 제가 가진 재능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음악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을 말로 서투르게나마 표현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즉, 음악이 더 훌륭하고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으나, 제가 듣는 것보다 읽는 것을 선호하는 것처럼 말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저는 소리보다 정적을 더 좋아하는데, 말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정적 가운데서 만들어집니다. 즉, 산문의 천둥과 음악은 정적 가운데서 발생합니다.
사람들은 오직 삶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의 시간을 단지 살아 있는 데 써야 합니다. 삶은 움직이며, 움직임은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것인 야망, 권력, 쾌락과 같은 것에 관심을 둡니다. 그는 조만간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을 받도록 강요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일도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그 자신으로부터 도덕적 양심이 선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도덕적 양심은 신들로부터 꿈꿀 권리를 얻기 위해서 신들로부터 받아들여야할 저주입니다.
모든 예술가의 목적은 인위적인 방법으로 삶이라는 움직임을 잡아서 다시 고정시켜, 수백 년 후에 이방인이 그것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이 삶이기 때문에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불멸은 언제나 살아 움직여서 불멸인 어떤 것을 뒤에 남겨놓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항상 움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술가들이 언제가는 통과하게 될 최후이자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이라는 망각의 벽에 "킬로이가 여기 왔었다."라고 적어놓는 방식입니다.
E.M.포스터
어떤 책에서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 제가 생각하는 저란 사람, 저를 짜증나게 하는 사람 그 이상을 모방하진 않습니다. 이렇게 하기 때문에 저 또한 진짜 소설가라고 볼 수 없는 수많은 작가에 속하게 되겠지요. 이런 작가들은 이 세 가지 범주를 갖고서 어떻게든 해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이런 작가들에겐 다양한 삶을 관찰하고 그것을 냉정하게 묘사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던 작가는 몇 명 되지 않습니다. 톨스토이가 그중의 하나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