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클로드는 설득력 있는 현실적인 논거를 제시하며 돌아왔다. 설령 회의론자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인다 해도, 즉 철학적으로 제가 하는 일이 "단순히" 패턴을 매칭하는 것에 불과하고 "진정한" 사고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 해도, 경제적 함의는 동일합니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 보겠습니다. 제가 연봉 20만 달러짜리 연구원 수준의 분석 결과를 낼 수 있다면, 비용을 지불하는 사람에게는 제가 "진짜" 사고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패턴을 매칭하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과물이 유용할 만큼 신뢰할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그리고 점점 더 그 기준에 부합하고 있습니다. 기계 의식에 대한 철학적 논쟁은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질문은 "인공지능이 진정으로 이해하는가?"가 아니라 "인공지능이 일을 하는가?"입니다.
인공지능은 어떤 투자자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흡수하고, 더 잘 기억하며, 성공에 앞서 나타났던 과거 패턴을 더 잘 인식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나 탐욕을 느끼지 않을 것이며, 낙관적이거나 비관적인 편향을 보이거나, 기존의 믿음에 얽매이거나, 최근 정보를 과도하게 강조할 가능성도 적을 것입니다. (물론 학습 자료에서 그러한 경향을 학습할 수도 있습니다.) 남들이 열광하는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남들이 쫓는 트렌드를 놓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인공지능은 훌륭한 투자자가 갖춰야 할 많은 자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반면에, 인공지능에는 몇 가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훌륭한 투자자는 단순히 빠르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데이터 처리자 그 이상입니다. 클로드(Claude)가 인공지능의 가장 취약하다고 지적한 부분, 즉 충분한 사전 경험을 통해 신뢰할 수 있는 패턴이 축적되지 않은 새로운 시장 상황에 대처하는 데 능숙해야 합니다. 또한, 질적 요소를 고려한 주관적인 판단을 내리고 안목과 분별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오크트리(Oaktree)의 성공에는 적절한 투자 상대방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인공지능은 어떻게 이러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요?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인공지능은 투자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집중 투자의 무게나 자본 손실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위험을 감수하려는 의지가 인간의 일반적인 위험 회피 성향에 제약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최고의 투자자는 잠재적 위험을 직관적으로 감지하며, 이러한 능력이 성공에 크게 기여합니다.
2021년 1월에 저는 다음과 같은 메모를 작성했습니다.가치 있는 것이 글은 팬데믹 기간 동안 아들 앤드류와 함께 살면서 투자 본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앤드류는 "현재 상황에 대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양적 정보"가 뛰어난 투자 성과를 내는 열쇠가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그런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인공지능은 아마도 그 정보를 처리하는 데 있어 누구보다 뛰어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러한 정보를 활용하여 시장 수익률을 능가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현재 상황에 대한 양적 정보가 쉽게 이용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투자 성공의 열쇠는 아닙니다. 투자의 우위는 (a) 해당 정보의 중요성과 함의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b) 경영 효율성이나 제품 혁신과 같은 질적 요소를 평가하며, (c) 기업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과 같은 요소에서 찾아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이러한 비양적 과제를 탁월하게 수행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인덱스 투자가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고 수수료를 받을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던 수많은 액티브 투자자들의 일자리를 없앴듯이, 인공지능(AI)은 이러한 기준을 더욱 높여 (a), (b), (c)와 같은 과제를 AI만큼 잘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시장에서 밀어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 가지 아이디어를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2페이지에서 언급했듯이, 저는 AI가 미래에 무엇이 효과적일지에 대한 "가설"을 세운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AI는 모든 과거 데이터를 읽고, 과거의 패턴을 연구하고, 미래의 성공 요인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팬데믹 기간 중 첫 번째 메모에서 저는 하버드 역학자 마크 립시치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의사결정을 내릴 때 (a) 사실, (b) 이전 경험과의 유추를 통한 정보에 입각한 추론, (c) 의견 또는 추측을 적용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투자자들이 새롭고 검증되지 않은 제품, CEO 또는 산업을 다룰 때는 사실이나 유사한 경험이 부족할 수 있으므로 "의견이나 추측"에 의존해야 합니다.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AI가 완전히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 패턴을 추론하는 것과는 달리, 새로운 것에 대한 AI의 추측이 모든 인간의 추측보다 항상 뛰어날 수 있을까요? 저는 AI가 이러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AI보다 뛰어난 인간 투자자는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투자 과정의 상당 부분이 추측에 기반하고 있고, 인공지능(AI)의 신뢰성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AI가 완벽한 투자자가 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합니다. AI는 논리적인 가설을 제시하겠지만, 인간의 판단처럼 항상 옳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투자자들이 AI의 가설에 따라 행동하기 전에, 그 가설의 타당성을 검증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도 이 검증을 완벽하게 할 수는 없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AI보다 더 나은 평가를 내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뛰어난 투자자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핵심은 AI가 매우 현실적이며, 지금까지 지식 노동자들이 해왔던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고, 응용 분야 또한 엄청나게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제 생각에는 AI의 잠재력이 과대평가되기보다는 오히려 과소평가되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AI 투자가 헐값에 거래되고 있거나 적정 가격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이 거품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상황이 잘못될 경우 파산할 위험이 있다는 점을 인지하지 않고 무턱대고 모든 것을 투자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쏟아부어 위대한 기술 발전의 기회를 놓쳐서도 안 됩니다. 신중하고 선택적으로 접근하는 중도적인 입장이 최선의 방법인 것 같습니다.
금융 시장에 거품과 충격은 반복된다. 최근 중동 전쟁은 일시적 충격일 것이지만 전쟁 이후 수혜가 예상되는 산업에는 기회가 될 것이다.
AI와 로봇, 모빌리티 혁신, 우주로 연결되는 변화는 변곡점 거품으로 더 큰 기회가 될 수 있다.
준비하고 기다릴 수 있는 자에게만...
[본문발췌 - 구글번역]
거품 현상의 가장 흥미로운 측면 중 하나는 시기적인 규칙성이 아니라, 그 진행 과정의 규칙성입니다. 새롭고 혁명적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나타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흥분은 극에 달합니다. 초기 투자자들은 막대한 이익을 얻습니다.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들은 엄청난 부러움과 후회를 느끼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뛰어듭니다. 미래에 대한 지식도 없고, 지불하는 가격으로 감당할 수 있는 위험 수준에서 합리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려도 없이 말입니다. 투자자들에게 있어 최종 결과는 단기에서 중기적으로는 필연적으로 고통스럽지만,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에는 이익을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과거 거품 붕괴로 인한 손실이 다음 거품 형성을 막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사람들의 기억은 짧고, 신중함과 타고난 위험 회피 성향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세상을 바꿀 혁신적인 기술 덕분에 부자가 되겠다는 꿈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품은 대개 새로운 금융 발전(예: 1700년대 초 남해회사 또는 2005~2006년의 서브프라임 주택담보증권)이나 기술 발전(1990년대 후반의 광섬유와 1998~2000년의 인터넷)을 중심으로 형성됩니다. 새로움이 이러한 현상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과거의 경험이 상상력을 제한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것의 미래는 무한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한하다고 인식되는 미래는 과거의 기준을 훨씬 뛰어넘는 가치 평가를 정당화할 수 있으며, 이는 예측 가능한 수익 창출 능력에 기반하지 않은 자산 가격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새로운 것이 큰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 열광이 비이성적인 수준에 도달하면 거품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평균 회귀 거품"은 새로운 금융 기적을 기반으로 시장이 급등했다가 붕괴하는 현상으로, 부를 파괴합니다. 반면, 혁신적인 발전에 기반한 "변곡점 거품"은 기술 발전을 가속화하고 더욱 풍요로운 미래의 토대를 마련 하지만, 부를 파괴합니다 . 핵심은 발전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부를 잃는 투자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핵심은 사람들이 인내심을 갖고 신중하고 분석적이며 가치 중심적인 태도를 유지했다면 혁신적인 기술이 개발되는 데에는 수년, 어쩌면 수십 년이 걸렸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거품 현상으로 인한 과열된 분위기 때문에 그 과정이 매우 짧은 기간으로 압축되었고, 그 결과 일부 자금은 성공적인 기업에 투자되어 삶을 변화시키는 데 쓰였지만, 상당 부분은 헛되이 낭비되었습니다. 거품은 기술적 측면과 재정적 측면 모두를 포함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기술 발전을 갈망하고 그 발전을 위해 투자자들이 손실을 보는 것을 개의치 않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나온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기술 발전은 바라지만, 그 발전을 위해 돈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요? 인공지능이 직면한 문제점 중 하나는 이 새로운 기술의 특이한 성격에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제품을 설계하고 판매하여 판매 가격이 투입 비용을 초과할 경우 수익을 내는 일반적인 사업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비행 중에 비행기를 제작하는 회사와 같으며, 일단 제작이 완료되면 그 비행기의 성능과 수요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많은 기업들은 단순히 제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꿀 무언가, 즉 인공 일반 지능(AGI)을 창조하고 있다는 이유로 투자를 정당화합니다 . 하지만 문제는 그 어느 기업도 AGI를 어떻게 구현해야 할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아짐 아자르가 10월 18일에 발표한 '기하급수적 관점' 에서 발췌한 주요 내용입니다 .
AI 붐은 언제 거품으로 변질될까요? 투자자이자 엔지니어인 폴 케드로스키는 민스키 모멘트(Minsky moment)를 지적합니다. 이는 신용 확장이 우량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를 소진하고 부실 프로젝트에 자금을 쏟아붓기 시작하며, 벤더 파이낸싱과 불확실한 담보 비율로 수익성이 낮은 거래에 자금을 지원하는 변곡점을 의미합니다. AI 인프라의 경우, 이러한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이퍼스케일러의 자본 지출이 매출 증가율을 앞지르고, 대출 기관들이 호황을 유지하기 위해 대출 조건을 유리하게 제시하는 것이 그 징후입니다.
폴은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칩니다. 우리는 투기적 금융의 영역에 진입했으며, 어쩌면 잠정적인 단계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의 거래들은 위험한 선례를 남길 것입니다. 폴이 경고하듯이, 이러한 자금 조달은 "미래의 유사 거래를 위한 틀을 만들어낼 것"이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시장 지배력을 확보하려는 하이퍼스케일러들 사이에서 정크 채권 발행과 특수목적법인(SPV)의 확산을 부추길 것입니다.
AI 인프라를 둘러싼 경고 신호가 번쩍이고 있습니다. 벤더 금융이 급증하고, 담보 비율은 낮아지고 있으며, 하이퍼스케일러들은 매출 성장세가 둔화되는 와중에도 자본 지출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재무제표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인프라 확장과 2000년 통신 시장 붕괴를 연상시키는 자금 조달 전략, 이 두 가지 양상을 모두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호황은 매출이 자금 조달 속도를 따라잡기 전에 신용 경색이 발생한다면 생산적일 수 있습니다. 건전한 성장이 언제 시스템적 위험으로 변질될까요? 시장이 답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아자르는 엔론의 불안정성과 최종 붕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인 특수목적법인(SPV)을 통한 재무제표 외 자금 조달 방식을 언급합니다. 한 회사와 파트너들이 특정 목적을 위해 SPV를 설립하고 자기자본을 투자합니다. 모회사는 운영권을 가질 수 있지만, 과반수 지분을 보유하지 않기 때문에 SPV를 모회사의 재무제표에 통합하지 않습니다. SPV는 부채를 떠안지만, 그 부채는 모회사의 재무제표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모회사가 투자 등급의 차입자일지라도, 해당 부채는 모회사의 직접적인 의무가 아니며 모회사가 보증하지도 않습니다. 오늘날의 부채는 데이터 센터 임차인(때로는 지분 파트너)으로부터의 임대료로 담보될 수 있지만, 이 역시 지분 파트너의 직접적인 의무는 아닙니다. 본질적으로 SPV는 회사가 SPV가 수행하는 사업을 하지 않고 SPV가 보유한 부채를 보유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입니다. (사모펀드와 사모채권펀드는 이러한 기업의 파트너 및 대출기관에 포함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오늘날의 상황은 미국의 경제학자 스튜어트 체이스가 신앙에 관해 한 말을 떠올리게 합니다. 저는 이 말이 인공지능(그리고 금과 암호화폐)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증거가 필요 없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어떤 증거도 불가능하다.
혁신적인 기술은 과도한 열정과 투자를 불러일으키는 역사를 반복적으로 겪어왔으며, 그 결과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인프라가 구축되고 자산 가격이 지나치게 높아지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과잉 투자는 기술 도입을 가속화하는데, 이는 과잉 투자가 없었을 경우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흔히 "거품"이라고 부릅니다.
인공지능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신 기술 중 하나가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인공지능은 현재 엄청난 열기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열기가 과거의 패턴과 같은 거품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례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생성된 거품은 대개 거품을 부추긴 사람들에게 손실로 끝납니다. 손실의 주된 원인은 해당 기술이 새로워 그 영향의 범위와 시기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이로 인해 과도한 기대감 속에 기업들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쉽고, 결국 어떤 기업이 승자가 될지 알기 어렵습니다. 새로운 기술이 가져다줄 잠재적 이점을 온전히 누리려면, 투자자들의 열정과 그에 따른 행동이 과도했던 것으로 판명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손실에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 기술 혁명에서는 높은 불확실성 때문에 일반적으로 배제되었던 부채 활용이 이번에는 위의 모든 요소를 증폭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거품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상황이 잘못될 경우 파산할 위험이 있다는 점을 인지하지 않고 무턱대고 모든 것을 투자해서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쏟아부어 위대한 기술 발전의 기회를 놓쳐서도 안 됩니다. 신중하고 선택적으로 접근하는 중도적인 입장이 최선의 방법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하는 것, 즐거움을 추구하며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다른 사람을 만남으로써 충족감을 얻는 것 등을 통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고 실현심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다.
[본문발췌]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의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에 따라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얘기하건대 언젠가는! 정말로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성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잊어 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1984년판에 부친 서문> 중
만약 삶에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없다. 각자가 스스로 찾아야 하며, 그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약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 사람은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계속 성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프랭클 박사는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왜why’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딜 수 있다. 강제 수용소에서는 모든 상황이 가지고 있는 것을 상실하도록 만든다. 평범한 삶에서도 당연했던 모든 인간적인 목표들을 여기서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인간이 지닌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과거 스토아학파는 물론, 현대 실존주의자들도 인정하는 이 기본적인 자유가 프랭클 박사의 이야기에서는 아주 생생한 의미를 갖는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일뿐이다. 하지만 그중에 적어도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외형적인 운명을 초월하는 인간의 능력을 보여 준 사람들도 있었다. - 고든 W. 올포트, <추천의 글> 중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믿음을 상실하면 삶을 향한 의지도 상실한다. 실제로 담배를 필 수 있는 특권은 카포에게만 주어졌는데,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일정한 양의 담배를 배급받았다. 때로는 창고나 작업장 감독으로 일한 사람들이 위험한 일을 한 대가로 담배 몇 개비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 밖의 사람들은 담배를 피울 수 없었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었거나 아니면 남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저 ‘즐기려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경우였다. 따라서 어느 날 동료가 담배 피우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가 자신을 지탱해 나갈 힘을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했다. 일단 그 믿음을 잃고 나면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다시 생기기는 힘들었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고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유머 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려는 시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 고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수용소에서도 이런 삶의 기술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번 유추해 보자.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용소 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은 일종의 소극적인 행복(쇼펜하우어가 ‘시련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했던)이었고,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행복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거의 없었다.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이 지닌 가치가 더 이상 인정을 받지 못하는 세계, 인간의 의지를 박탈하고, 그를 단지 처형(처음에 그를 이용할 대로 이용해 먹다가 육체의 마지막 한 점까지 이용하도록 계획된) 대상으로 전락시킨 세계, 이런 세계에서 개인의 자아는 끝내 그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만약 강제 수용소에 있는 사람이 자존심을 지킬 마지막 노력으로 이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으면, 그는 자기가 하나의 인간이라는 생각, 마음을 지니고 내적인 자유와 인격적 가치를 지닌 인간이라는 생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거대한 군중의 한 부분에 불과한 존재로 생각한다. 존재가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이나 의지가 없는 양떼처럼 무리 지어 - 때로는 여기에 있다가 그다음에는 저기로, 때로는 함께 몰려다니다가 때로는 서로 떨어져 다니는 - 다니게 된다. … 따라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우리는 글자 그대로 군중 속에 자기 자신을 파묻으려고 애를 썼다. 이런 일은 대오를 형성할 때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일이 수용소 안에서 가장 절박한 자기 보존의 법칙에 따라 의식적으로 행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 법칙은 될 수 있는 대로 눈에 뜨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 시간마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이 보이는 심리적 반응은 어떤 물리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단순한 표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수면 부족과 식량 부족,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는 받는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 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게 되는 것이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반면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 두 가지가 거의 메말라있는 삶에도, 외부적인 힘에 의해 오로지 존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지고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삶에도 목적은 있다. 물론 그에게는 창조적인 삶과 향락적인 삶이 모두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 - 심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 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finis’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 혹은 완성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퇴행 현상을 볼 수 있다.
수감자 역시 기이한 ‘시간 감각’을 경험했다. 시시때때로 자행되는 폭력과 배고픔이 하루를 꽉 채우고 있는 수용소에서는 하루라는 작은 단위의 시간은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 긴 단위의 시간, 예를 들자면 일주일은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 수용소에서 내가 한번은 동료에게 하루가 일주일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고 얘기하자 그 친구도 내 말에 동의한다고 했다. 우리의 시간 감각이 얼마나 역설적이었던가!
평범하고 의욕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 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삶의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Sub specie aeternitatis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음에도, 인간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 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과제들, 즉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 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때로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행동에 들어갈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반면 어떤 때에는 더 생각할 시간을 갖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 할 때도 있다. 각각의 상황들은 그 나름대로 독자성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단 하나만 있는 법이다.
각각의 개인을 구별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독자성과 유일성은 인간에 대한 사랑처럼 창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로고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 동시에 로고테라피는 정신 질환을 일으키는 데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하는 악순환의 고리vicious circle formation와 피드백 기제feedback mechanism를 약화시킨다. 그렇게 해서 정신 질환 환자에게 전형적인 자기 집중 증상이 발생하고 심화되는 것을 막는다.
로고테라피 혹은 다른 학자들이 ‘빈 제3정신 의학파’로 부르는 이 이론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 나가는 인간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로고테라피 이론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본다. 내가 로고테라피를 프로이트 학파가 중점을 두고 있는 쾌락의 원천(혹은 쾌락을 찾고자 하는 의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이나 아드리안 학파에서 ‘우월하려는 욕구’로 부르는 권력에의 추구와 대비시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이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그 사람의 삶에서 근본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지 본능적인 욕구를 2차적으로 합리화시키려고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 의미는 유일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반드시 그 사람이 실현시켜야 하고, 또 그 사람만이 실현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 자신의 의지를 충족시킨다는 의의를 갖게 된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인간을 그저 충동과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쾌락을 얻거나 서로 갈등하고 이드와 자아, 초자아를 절충시키거나 혹은 사회와 환경에 그저 순응하고 적응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주된 관심사가 어떤 의미를 성취하는데 있다고 보고, 그런 점에서 로고테라피는 정신 분석과 구별된다.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돼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well-being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 내면에 잠재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전장을 던지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그동안 숨어 있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일깨울 수 있다.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 혹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항상성homeostasis, 즉 긴장이 없는 상태라고 흔히 말한다. 나는 정신 건강에서 이것처럼 위험천만한 오해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있는 목표, 자유 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돼야 할 의미가, 다른 극에는 의미를 실현시킬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상황에서만 유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신경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더 효력이 있다. 낡은 아치를 튼튼하게 할 때, 건축가는 오히려 아치에 얹히는 하중을 늘린다. 그래야만 아치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이 서로 잘 밀착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환자의 정신 건강을 증진시키려는 심리 요법가는 삶의 의미를 갖도록 지도하는 과정에서 환자 마음에 어느 정도 긴장을 유도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실존적 공허는 대개 권태를 느끼는 상태에서 나타난다. 인간은 고민과 권태의 양 극단을 끊임없이 오가도록 운명 지워진 존재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이해가 갈 것이다. 실제로 요즘은 고민보다는 권태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며, 이 문제 때문에 정신과 의사를 찾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확실하다. 이 문제는 앞으로 점점 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자동화 과정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여가가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애석한 것은 그 중 많은 사람이 새로 얻게 된 한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자살의 상당수가 바로 이런 실존적 공허 때문에 일어난다.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우울증과 공격성, 중독증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면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실존적 공허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연금 생활자나 나이든 노인들이 느끼는 위기감 역시 이와 같은 종류의 것이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되면 사람들은 권력욕으로 좌절을 대신 보상받으려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권력욕인 돈에 대한 욕구도 포함된다. 한편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된 곳에 쾌락을 추구하는 의지가 대신 자리 잡는 경우도 있다. 실존적 좌절을 겪은 사람들이 종종 성적 탐닉에서 보상을 찾으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두 번째 방법은 어떤 것 - 선이진리, 아름다움 - 을 체험하는 것, 자연과 문화를 체험하거나 (마지막이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 즉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조건 지워지고 결정지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을 할 것인지에 대해 항상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하자면 인간은 어느 순간에도 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거대한 인간 집단의 행동을 통계적으로 분석한 자료를 통해서 얻은 사실뿐이고, 각 개인의 특성은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채로 남아 있다. 어떤 예측이든 거기에는 그 사람이 처한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조건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인간에게는 그런 조건을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가능하다면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킬 수 있고, 필요하다면 자기 자신을 더 좋게 변화시킬 수 있다.
기계나 자동 장치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예측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 정신의 메커니즘이나 역동성에 대해 예측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정신을 넘어선 존재이다. 그렇다고 자유가 결론은 아니다. 자유는 이야기의 부분이고, 절반의 진실에 지나지 않는다. 책임이라는 적극적인 측면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극적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책임이 전제되지 않는 자유는 방종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인간은 여러 개의 사물 속에 섞여 있는 또 다른 사물이 아니다. 사물들은 각자가 서로를 규정하는 관계에 있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 타고난 자질과 환경이라는 제한된 조건 안에서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판단에 달려 있다.
나는 살아 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 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
우리 세대는 실체를 경험한 세대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우슈비츠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셰마 이스라엘>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비극 속에서의 낙관>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이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세 개의 비극적인 요소에도 인간은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 낙관적일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세 개의 비극적인 요소는 인간의 삶을 제한하는 ‘고통, 죄, 죽음’을 의미한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네’라고 대답하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또한 이 말은 인간이 삶의 부정적인 요소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창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가 되기도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중요한 것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최선’은 라틴어로 ‘옵티멈optimum’이라고 하는데, 내가 ‘비극 속에서의 낙관optimism’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낙관은 비극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잠재력이 첫째 고통을 인간적인 성취와 실현으로 바꾸어 놓고, 둘째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셋째 일회적인 삶에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동기를 끌어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명심해야 한다. 낙관적인 생각은 명령이나 지시를 받아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모든 가능성과 모든 희망에 대해 가리지 않고 낙관적이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 희망에 적용되는 것은 나머지 두 가지에도 적용되는데, 말하자면 믿음과 사랑도 명령하거나 지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행복은 얻으려 한다고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힘들다.’ - 스피노자, <윤리학>
처음이 아닌 여행지에서는 확실히 여유로워진다. 처음 방문했을 땐 가 보고 싶은 곳이 많으니 아무래도 쫓기듯 여러 명소를 찾게 된다. 하지만 두 번째만 해도 이전 여행에서 터득한 취향이 생기기 때문에 좀 더 나에게 맞는 효율적인 여행을 할 수 있다.
특별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 찍기보다 순간을 만끽하며 어떤 순간에서도 나만의 시선을 찾아보자고 다짐했다. 마음에는 듣고자 하는 귀와 듣지 않고자 하는 두 가지 귀가 있다고 한다. 마음의 눈도 그렇지 않을까? 내가 가진 모든 눈을 떠 여행하고 싶어졌다. 행복한 순간을 보는 눈, 순간의 소중함을 찾아내는 눈, 소외된 사람들을 발견하는 눈, 시간을 두고 유심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알아챌 수 있는 눈으로 모두 담아내고 싶었다. 목적이 있는 사진이 아니라 마음으로 눈을 뜨고 이야기를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여행을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설렘을 느낀다.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풍경들로 가득 찬 낯선 장소가 우리에게 걸어 주는 마법이 이 행위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시작 뒤엔 반드시 끝이 따라오지만, 떠나기 전 설렘부터 여행이 끝난 후 여유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게 여행의 묘미 아닐까. 아쉬워 말자. 끝 다음에는 항상 또 다른 시작이 있다는 것을!
‘광활’은 물리적인 뜻 이외에 자유와 평안의 뜻도 내포하고 있다. 광활한 트레치메에서 나는 완전한 구원을 느꼈다. 행복이란 노력해서 성취해야 하는 거창한 감정이 아니다. 우리 마음의 틈새에 상시 스며 있다 이런 순간들에 자연스레 입가로 타고 오른다.
여행은 개인마다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다. 그때 느꼈던 감정과 경험을 다른 이에게 완벽히 전달하기란 어렵다. 여행에서 보았던 풍경, 만난 사람들, 다양한 사건과 경험을 커다란 포장지로 엮어 감싸면 그것이 추억이 된다. 포장지는 대체로 감정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내가 경험한 포르투갈은 행복함과 온화한 색으로 소중하고 특별했다.
지금에서야 여행이 갖는 의미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 더 명확해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순간을 즐기면서도 시간과 돈에 대한 불안감이 문득 떠오르고, 행복한 날들이 더해질수록 현실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 대한 초조함이 커졌다. 이제는 그런 감정 때문에 의도적으로 무언가를 더 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추억 자체가 여행의 의미가 될 수 있도록 항상 되뇌인다. “불안하고 덧없는 것 같을지라도 현재에 충실할 것.”
한 장의 사진으로 여행이 시작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시선을 따라 명소나 숨은 장소를 찾아내는 것도 좋지만, 내가 생각하는 여행 사진의 묘미는 역시 ‘이야기’다. 여행하면서 느낀 그 날의 분위기, 온도, 색감 그리고 생생한 이야기를 사진에 담아내는 것이다.
여행 좀 다녀 본 여행자들이 공통으로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여행은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여행을 다니면서 어디든 가야 한다거나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마음이 경직되어 여유를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땐 억지로 편안함을 흉내 낼 필요 없다. 대신 아주 적당히 헐렁하고 어설프게 행동해 보자. 스웨터를 짤 때, 한 코 정도 빼먹어도 넘어갈 수 있는 헐렁함 정도면 충분하다. 너무 완벽하게 ‘여행’이라는 과제를 끝마치려고 노력하지 말라는 말이다. 조그맣게 난 구멍을 보고 다른 여행자가 예쁜 와펜을 선물해 줄 수도 있고, 더울 때 바람이 구멍으로 송송 들어와 땀을 식혀줄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코가 살살 풀려 멋진 크로셰처럼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여유를 즐기는 일’을 억지로 시간을 내서 초조함 속에 이행할 필요는 없다. 조금 내려놓고 여행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에 비우는 여유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종착역을 알지 못해도 무작정 출발한다. 여정이 끝나고 나서야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셈이다. 길은 언제나 간 뒤에 생겨난다고 했다. 성격상 엄밀히 말하면 좋은 실패 따윈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스스로 결정하고 행한 행동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으면 좋겠다. 내가 나를 인정해 주어야 다음 도전과 시도 역시 주저 없이 행할 수 있게 된다. 쓸모없는 경험은 없기에 그 안에서 새로운 가치를 탄생시킨다고 믿는다. 상처가 나고 아물어야 근육이 커지는 것처럼 쓰라려야 하는 순간도 있다. 그렇게 쌓인 노력과 실패가 얽히고 얽혀 나무뿌리처럼 마음이 굵고 단단한 사람이 되기를 소원한다.
여행을 하다 보면 계획대로 척척 진행되는 것들이 많지 않다. 기대와 실망, 불행과 행운이 반복된다. 경험상,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을 때 몇 배로 기뻤던 일이 아주 많았다. 그러다 보니 불쾌한 열기가 피어나는 투정과 실망보다 우연이 주는 폭죽 같은 행복에 오히려 기대하게 된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다’고 방어적으로 보일 수 있는 표현은 사실 목적 자체에 대한 기대가 아닌 우연으로 인한 행운을 기대하는 방법이자. 직접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지 어떨지 아무도 모르니까, 그때까지 감정을 꾹꾹 아껴 두는 것이다.
행복의 크기를 예상할 수는 없지만 우연에서 찾아오는 기대를 이렇게 다시 키워 간다. 목적에 대한 기대보다 편리한 점이 있다면, 시점은 몰라도 확실히 찾아올 행운이므로 실망할 일이 없다는 것. 다음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언제나 선물 상자는 갑작스레 찾아온다. 어떤 행복이 들어 있을지 아무도 모른 채.
“기분이 태도가 되게 하지 말라.” 한때 유행했던 유명한 말이다. 어떤 감정에 치우치거나 휩쓸려 그 기분이 행동의 주체가 되게 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성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려고 노력해도 미숙한 사람인지라 쉽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순간에서 이런 이성은 굉장히 중요하다. 상황을 인지하고, 격앙된 감정으로 좁아진 시야를 넓혀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할 때가 있다.
비합리적인 시장을 극복하는 방법은 틀릴 확률이 낮을 때 진입해서 시장이 틀릴 확률이 높을 때 나오는 냉철함이 필요하다.
[본문발췌]
우리는 비합리적이다. 그래서 최선의 선택이 아닌 최적의 선택을 한다. 그 덕에 인류는 살아남았고 번성했다. 수 만년 전 풀숲에서 채집을 하던 우리의 조상이 바스락 소리를 들었다면 선택은 두 가지다. 맹수인지 확인하고 채집을 계속하거나 일단 무리를 향해 전력으로 뛰거나다. 계속 채집을 하던 사람은 부자가 됐겠지만 어느 재수 없는 날 맹수에 물려 죽었을 것이고 일단 튄 사람은 부자는 못 됐겠지만 후손을 남겼을 것이다. 그의 후손인 우리에게 ① 과잉반응하고 ② 어림짐작하고 ③ 무리 짓는 유전자가 전해졌다. 세상은 안전하고 복잡해졌지만 그 특징들은 남아있다. 이런 기질들은 지금은 약점이 됐다. 특히, 투자의 세계에서 그렇다. 투자는 현재의 소비를 아껴 불확실한 미래에 자원을 투입하는 행위이기에 당장 살아남는 것과 정반대의 기질이 요구된다. ① 침착하고 ② 계산적이고 ③ 독립적인 사람이 투자에 성공한다.
투자자는 합리성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 자신이 비합리적인 이유가 무엇이고 군중들이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러면 투자는 한 단계 더 높은 원리에 도달할 것이다.
수익에 대한 심리적 효용은 체감하고 공포는 탐욕보다 2.5배 더 크다. 그래서 사람은 수익은 확정하고 싶어하고 손실의 공포를 느끼면서도 포지션을 방치한다. 수익이나 손실이 과도하게 커져서 무감각해지면 그때엔 위험한 투자를 감행한다.
심리투자의 정석.
수익이 나기 시작하는 구간에선 희열이 1을 초과한다. 사람들은 희열을 느끼며 주식을 매수하는 경향이 있고 그로 인해 주가는 고평가 된다. 매도로 대응하는 게 정석이다. 수익이 더 커지면 한계효용이 체감하면서 사람들은 실제 수익률보다 희열을 덜 느낀다. 감각이 무뎌지면서 주식을 더 사지 않기 때문에 주가는 저평가된다. 이때부턴 주가가 올랐더라도 주식을 사야 한다. 손실이 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공포를 크게 느끼며 주식을 팔기 시작한다. 주가는 저평가된다. 이때엔 매수로 대응하는 게 정수다. 손실이 커지면 주가가 너무 많이 내려 돈이 얼마 되지도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공포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감각이 마비될 때, 주가가 많이 빠졌더라도 주식을 팔아야 한다.
감정을 따르기만 해도 주식시장에서 살아남을 수는 있다. 수익이 났을 때 너무 일찍 실현하지만 손실을 입었을 때엔 공포에 질려 더 빨리 자르기 때문이다. 살아남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에 내재돼 있는 비합리성 때문이다.
사고회로와 행동패턴에 심어져 있어 감정보다 더 고질적이다. 사람은 판단할 때 가용성의 오류를 겪는다. 모든 데이터를 분석하고 그에 기반해 판단할 수 없어서 한정적인 정보만으로 의사결정을 내린다. 많은 경우 잘못으로 드러나지만 인정하고 시정하는 대신 자신이 옳았다는 증거를 수집하고 설명력이 높은 증거는 외면한 채 인과관계까지 왜곡해버린다. 그렇게 해서 사람은 지난 결정을 미화하고 자존심을 지킬 수 있지만 남는 건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는 능력과 텅 빈 잔고뿐이다.
그러니 심리게임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싶으면 직관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확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새로운 증거가 나오면 그에 기반해 결정해야 한다. “일반가설도 확증될 수 없다”는 칼 포퍼의 말처럼 누구나 언제든 틀릴 수 있다. 가설이 부정되고, 논리가 경로에서 벗어나면 과감히 투자를 접어야 한다. 확률적 사고는 어렵지 않다. 맞을 확률이 얼마나 높은지가 아니라 틀릴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때 투자 논리를 통계적으로 기술해야 한다. 이유를 기술하고 검증하기 어렵다면 투자해선 안된다.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다신 주식투자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는 좋은 이유 같아 보이지만 통계적으로 기술할 수도, 검증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투자해선 안된다.
투자자의 심리는 초과 수익의 원천이다. 탐욕을 부리기 때문에 고평가되고 공포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저평가된다. 돈의 심리가치를 명목가치에 수렴시켜서 반대 포지션을 잡아야 한다.
역발상 투자는 오르면 팔고 내리면 사는 기계적인 매매가 아니다. 군중의 반대편에 서서 지적 우월함을 즐기는 행위는 더욱 아 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심리를 거스르는 수행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상태를 유지하기만 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인간의 감정, 비합리성, 군중심리를 이해하고 초과 수익을 내는데 활용하는 베팅의 기술보다 한 단계 높은 투자 원리다.
투자는 자신의 비합리성, 시장의 비합리성을 교정해가는 과정이다. 내가 틀렸을 가능성, 시장이 틀렸을 가능성을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정답은 없다. 내가 틀릴 확률이 낮을 때 진입해서 시장이 틀릴 확률이 높을 때 나올 뿐이다.
인도 여행 준비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두 가지였습니다. 버리기. 그리고 준비하지 않기. 내 경우엔 말이지요. 학교. 아파트. 가구. 책. 버려도 지장 없는 건 죄다 버리거나 팔아치웠는데, 그랬더니 뜻밖에 내가 가진 것들 중에 절실히 필요한 건 칫솔 정도라는 걸 알겠더군요. 개운했어요. 준비하지 않는다는 건, 정보를 일절 들이지 않는 거였어요. 여행지에 관한 정보말입니다. 정보가 많을수록 안심은 커지지만 실상은 멀어지지요. 열 사람이 똑같은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고 ‘자유의 여신상’을 보았을 경우, 다 똑같아 보일 수밖에 없어요. 요즘 같은 정보화 사회의 여행은 이 병이 무섭도록 깊습니다. 오히려 실상을 보는 게 두려운 건지. 실상이 자신을 침범하지 않도록 정보로 보호막을 치는 건지도 모르지요.
더없이 시시한 녀석부터 차원 높은 사람까지, 오히려 여행 중에 얼마나 다양하게 만났느냐가 중요하지요. 그것이 여행의 풍성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아가는 것…. 원자핵 주위의 전자…. 태양 주위의 혹성…. 그리고 죽은 자의 주위를 도는 흰 옷의 소년…. 예전에 보았던 열반 탑을 도는 티베트인….
돈다는 것은 중심을 만드는 것이고 또한 중심에서 달아나는 것이다. 이 둘은 모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 올바른 운동처럼 여겨진다. 나는 이 ‘돈다’는, 인간이 생존 속에서 벗어나기 힘든 운동 형식을 또다시 이 갠지스 강가에서 보고 있다.
탄생-교합-사멸이라는 샐물이 밟아가는 단순한 도식. 인도의 백성은 우리 이상으로 이 세 가지 숙인(지난 세상에서 지은 업인)을 중시한다. 대부분의 힌두교도들은 머릿속에 탄생을 꼭짓점으로 하는 삼각형의 도식을 가지고 있다. 요컨대 탄생-교합-사멸-탄생으로 연화하며 이 세가 숙인은 그들의 머릿속에서 끝없이 돌고 있다. 죽음은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슬퍼해야 할 그리고 벗어나기 힘든 생물의 숙명이다. 그러나 많은 인도인들은 죽음을 애도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화려한 다음 세상, 즉 내세로의 출발이라고 여긴다. 갠지스… 무릇 갠지스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제 아무리 대단하고 제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모두 흘러간다.
나는 ‘여행’을 계속했다. …. 다분히 어리석은 여행이었다. 때로 그것은 우스꽝스런 발걸음이기도 했다.
걸을 때마다 나 자신과 내가 배워온 세계의 허위가 보였다.
그러나 나는 다른 좋은 것도 보았다.
거대한 바냔나무에 깃들인 숱한 삶을 보았다.
그 뒤로 솟아오르는 거대한 비구름을 보았다.
인간들에게 덤벼드는 사나운 코끼리를 보았다.
‘코끼리’를 정복한 기품 있는 소년을 보았다.
코끼리와 소년을 감싸 안은 높다란 ‘숲’을 보았다.
세계는 좋았다. 대지와 바람은 거칠었다.
꽃과 나비는 아름다웠다.
나는 걸었다.
만나는 사람들은 슬프도록 못나고 어리석었다.
만나는 사람들은 비참했다.
만나는 사람들은 우스꽝스러웠다.
만나는 사람들은 경쾌했다.
만나는 사람들은 화려했다.
만나는 사람들은 고귀했다.
만나는 사람들은 거칠었다.
세계는 좋았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여행’은 무언의 바이블이었다.
‘자연’은 도덕이었다.
‘침묵’은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침묵에서 나온 ‘말’이 나를 사로잡았다.
좋게도 나쁘게도, 모든 것은 좋았다.
나는 모든 것을 관찰했다. ‘실實’을 ‘베꼈다’.
그리고 내 몸에 그것을 옮겨 적어보았다.
하루하루는 오늘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어둠과 침묵 속으로 가라앉고, 그리고 아침은 언제나 내 앞에 불사신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또 어떤 이는, 어두운 광선으로 치장된 아름다움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 동양인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그늘을 만들기 시작하고 미를 창조하는 것이다. “긁어모아 묶으면 잡목의 암자가 되고, 풀어놓으면 원래의 들판이 되었구나”라는 옛 노래가 있는데, 아무튼 우리의 사색법은 그런식이므로, 미는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체와 물체가 만들어내는 그늘의 무늬, 명암에 있다고 생각한다. 야광구슬도 어둠 속에 두면 광채를 발하지만, 밝은 대낮에 드러내면 보석의 매력을 잃는 것처럼, 그늘의 작용을 벗어나서는 미가 없다는 생각이다.
나는 우리가 이미 잃어 가고 있는 그늘의 세계를 오로지 문학의 영역에서라도 되불러 보고 싶다. 문학이라는 전당의 처마를 깊게 하고, 그 벽을 어둡게 하고, 지나치게 밝아 보이는 것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쓸데없는 실내장식을 떼 내고 싶다. 어느 집이나 모두 그런 것이 아닌, 집 한 채 정도만이라도 그런 집이 있었으면 좋을 것이다. 자, 어떤 상태가 되는지, 시험 삼아 전등을 꺼 보는 것이다.
<여행>
물론 그런 곳에 있는 산은 명산도 아니기에, 봉우리의 높이에서나 골짜기의 깊이에서, 전망의 웅대함 풍광의 수려함에서, 알프스 지방의 산들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지만, 산은 높아서 귀한 것이 아니라 인간내와 도시내가 없는 것을 귀하게 여기면, 그런 일반적인 산과 계곡 쪽이 오히려 산 같은 멋이 있고, 속세의 먼지투어싱인 마음이나 정신을 씻어 줄지 모른다. 어쨌거나 이런 일은 산의 경우에 그치지 않기에, 예를 들면 앞에 말한 반딧불이 명소, 벚꽃이나 매화의 명소, 온천, 해수욕장 등, 모든 천하에 잘 알려져 있는 일류의 지역은 모두 다소나마 망쳐져 있다 체념하고, 이류 삼류의 장소를 찾아다니는 편이 훨씬 여행이나 유람의 목적에 맞는 것이다.
야마토 둘러보기 따위로 조급한 마음에 여기저기를 보고 걷는 것보다도, 결국 이 기차 안에서의 몇 시간, 게다가 무한의 유구를 느끼는 몇 시간의 기분이 제일이고, 실로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맛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그러나 정말 조금의 시간과 차비를 아까워해서, 사람들이 전차로만 쇄도하는 것이 나로서는 이상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좀더 빠르게’가 시대의 유행이 되어 있으므로, 모르는 사이에 일반 민중이 시간에 대해서 인내력을 잃어, 가만히 한 가지 세상사에 마음을 진정시켜 몰두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 것일까? 그러면 그런 안정을 되찾는 것도 하나의 정신 수양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그 기차에 타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나는 생각하길, 단시간에 가능한 멀리 달리는 스피드 여행에 거슬러서, 좁은 범위를 가능한 길게 걸려서 보고 돌아오는 여행 방식을 좀 장려해 보면 어떨까. 그런 식으로 걷다가,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친 곳에서 의외의 흥미를 찾아낸 적이 있다. 온통 걷기만 하자는 뜻은 아니지만, 가까운 곳을 귀찮다 해서 자동차로 달리는 버릇이 가장 나쁘다. 그러면 여행의 정취라고 하는 것이 모두 없어지고, 어디를 지나도 아무것도 인상에 남지 않는다.
우리로서는, 귀여운 아이는 여행을 시키라고 한 그런 옛 생각을 버릴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여행을 떠난 것을 기회로, 맛있는 음식이라든지 늦잠이라든지 운동 부족이라든지, 그 밖의 나쁜 습관을 교정하는, 적어도 여행하는 기간만이라도 사치를 하지 않도록 해서, 곤란한 경우를 견디는 습관을 키워야 한다. 나는 직업상 기분 전환이나 환경 변화를 찾아서, 때때로 스스로를 일상생활의 연쇄로부터 잘라 버릴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런 목적으로 여행을 떠날 때는 가끔 옷차림이나 이름을 바꾸서, 기차나 증기선을 삼등칸으로 한다든지 싼 여관에 묵는다든지 하는 적이 있다. 실제 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은 시골에 가면 선전도구로 쓰인다든지 신문기자나 문학청년에게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인다든지 할 두려움이 있어서, 그 정도로 조심하지 않으면 고독한 여행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름이나 차림새를 바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넓은 세상에 나와 본다고 하는 것은 그것만으로 하나의 흥밋거리이다. 원래 나는 쑥스러움을 잘 타는 탓인지, 소설가라 하는 것이 알려져 선생 취급을 받기라도 하면, 왠지 쑥스러워져서 긴장하고 몸이 굳어 버리는 버릇이 있다. 아울러 이름을 바꿔 떠나면 가는 곳마다 자유롭게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고, 생각지 않던 길동무를 만나기도 한다. …. 때때로 그런 삼등칸 여행을 시험 삼아 다른 세계를 보는 일은 굳이 소설가만 아니라, 정치인에게도 실업가에게도 종교인에게도 크게 필요하지 않을까?
보편성 확장 다툼에서 다양성을 수용하며 동질성 찾는 다문명 세계로 변화하는 길목, 주도권을 뺏고 지키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영향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치열하다.
[본문발췌]
탈냉전 세계에서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념이나 정치, 경제가 아니다. 바로 문화다. 민족과 국민은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인간이 직면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그리고 인류가 지금까지 그런 질문 앞에서 내놓았던 전통적인 방식으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바로 자신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조상, 종교, 언어, 역사, 가치관, 관습, 제도를 가지고 스스로를 규정한다. 그들은 부족, 민족집단, 신앙 공동체, 국민, 가장 포괄적인 차원에서는 문명이라고 하는 문화적 집단에 자신을 귀속시킨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에도 정치를 이용한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알 때만, 아니 자신의 적수가 누구인지를 알 때만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문명과 문화는 모두 사람들의 총체적 생활방식을 가리키고 있다. 문명은 크게 쓰인 문화다. 문명과 문화는 모두 주어진 사회에서 면면히 이어져온 세대들이 우선적으로 중요성을 부여한 가치, 기준, 제도, 사고방식을 담고 있다.브로델에 따르면 문명은 하나의 공간, 하나의 문화 지역, 문화적 특성과 현상의 집약이다. 월러스틴이 정의하는 문명은 모종의 역사적 총체를 형성하면서 이런 현상의 이형들과 공존하는(반드시 동시적이지는 않더라도) 세계관, 관습, 구조, 문화(물질문화와 정신문화 모두)의 특수한 연쇄다. 도슨의 이해하는 문명은 ‘특수한 민족의 업적인 문화적 창조성의 특수하고 독창적인 과정’의 산물인 반면, 뒤르켐과 모스에게 있어 문명은 ‘그 안에서 개별적 민족 문화는 전체의 특수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 다수의 민족들을 포괄하는 일종의 윤리적 환경’이다. 슈펭글러는 문명을 “문화의 피치 못할 ‘운명’ …. 발달한 인류의 종이 누리를 수 있는 가장 외현적이고 인위적인 상태 …. 하나의 결론, 과정물을 승계한 완성물이다”라고 파악했다. 문화는 문명의 정의에서 사실상 빠짐없이 등장하는 공통 주제다.
무역과 교류가 평화나 유대감을 조성하는 데 실패한다는 것은 사회 과학에서 밝혀진 사실과 맥을 같이한다.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변별이론distinctiveness theory은 특정 상황 안에서 사람들은 타인과 자신을 구별함으로써 스스로를 정의한다고 본다. “사람은 자신을 다른 인간, 특히 자신이 일상적으로 자주 접촉하는 사람들과 구분짓는 특성을 통해서 스스로를 파악한다. …. 다른 직종에서 일하는 10여 명의 여자들과 함께 있는 여성 심리학자는 자신을 심리학자로 여기지만 10여명의 남성 심리학자들과 함께 있을 때는 자신을 여자로 본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통해 스스로를 정의한다. 통신, 무역, 여행의 증가로 문명과 문명의 접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차츰 자신들의 문명적 정체성에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독일인 한 명과 프랑스인 한 명이 만 나서 대화를 나눌 때 이들은 스스로를 각각 독일인과 프랑스인으로 생각할 것이다. 독일인 한 명과 프랑스인 한 명, 사우디아라비아인 한 명과 이집트인 한 명이 만났을 때는 각자를 유럽인과 아랍인으로 여길 것이다. 프랑스인은 북아프리카인의 프랑스 이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지만 카톨릭이 국교인 같은 유럽의 폴란드 이민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다. 미국인은 캐나다나 유럽 국가가 자국에 더 큰 투자를 해도 신경을 안 쓰다가 일본이 투자를 하면 아주 과민하게 반응한다. 도널드 호로위츠는 그런 심리를 재미나게 표현했다. “이보인(나이지리아 남동쪽에 사는 민족 - 옮긴이)은 …. 나이지리아 동부 지방에서는 오웨리 이보거나 오닛샤 이보다. 나이지리아의 수도 라고스에서는 그냥 이보다. 런던에 오면 그는 나이지리아인이다. 뉴욕에서는 아프리카인이다.” 사회학에서도 세계화 이론이 비슷한 결론을 내놓는다. “역사적으로 가히 유례가 없을 만큼 문명적, 사회적 상호 의존도가 깊어지고 거기에 입각한 의식이 확산되는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도 문명적, 사회적, 민족적 자의식은 심화된다.”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종교의 부활, ‘성스러운 것으로의 복귀’는 세계를 ‘단일한 장소’로 보는 견해에 대한 부정적 답변인 셈이다.
범세계적으로 종교의 부활을 가져온 가장 명백하고 두드러지고 강력한 원인은 종교의 죽음을 이야기할 것으로 예측되던 원인이었다. 그것은 바로 20세기 후반부 세계를 휩쓴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근대화 과정이었다. 장구한 역사를 가진 정체성의 원천과 권위체계가 산산조각 났다. 시골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은 뿌리를 잃고 새로운 직업을 가지거나 실업자로 전전했다. 그들은 낯선 군중 속에 섞이고 새로운 관계틀에 노출되었다. 그들에게는 정체성의 새로운 뿌리가 필요했다. 안정된 공동체의 새로운 형식,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는 새로운 도덕률이 필요했다. 주류 종파이든 원리주의 종파이든 종교는 사람들의 그런 욕구에 부응했다. 리콴유는 동아시아의 현실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한두 세대 만에 산업화에 도달한 농경사회다. 서구에서 200년 이상에 걸쳐 일어난 일이 여기서는 50년도 안 되는 기간에 걸쳐 벌어졌다.모든 것이 아주 빠듯한 시간틀 속에 우겨넣어지고 있어 혼란과 기능 장애는 불가피하다. 한국, 태국, 홍콩, 싱가포르처럼 고속 성장을 해온 나라들을 보면 한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나타난다. 그것은 종교의 부상이다. …. 과거의 관습과 종교(조상 숭배, 샤머니즘)는 이제 사람들의 성에 차지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왜 여기 있으며,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한 차원 높은 설명을 갈구한다. 이것은 사회에서 엄청난 압박감을 느끼는 시기와 무관하지 않다.’
사람은 이성만으로 살지 않는다. 자아를 정의내리지 못하는 한, 사람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합리적으로 계산하고 행위할 수 없다. 이익 추구는 자기 정체성을 전제로 한다. 사회가 급속히 변하는 시기에는 확립된 정체성이 무너지므로 자아가 새롭게 정의되고 새로운 정체성이 발견되어야 한다. 정체성을 따지는 물음은 이익을 따지는 물음에 앞선다.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할 필요성을 느낀다. 종교는 이에 대한 강력한 답변을 제공하며, 종교 집단은 도시화로 상실된 공동체를 대신하는 작은 사회적 울타리가 되어준다. 하산 알 투라비가 말했듯 모든 종교는 사람들에게 삶의 정체감과 방향성을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역사적 정체성을 새로이 발견하거나 창조한다. 아무리 보편적 목표를 내건 종교라 해도 신도와 비신도, 우월한 내집단과 열등하고 이질적인 외집단의 기본적인 구분을 통해 사람들에게 귀속감을 준다.
아시아와 이슬람은 개별적으로, 때로는 힘을 합쳐 서구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이러한 도전의 배후에 자리 잡은 원인들은 서로 관련성은 있지만 성격은 판이하다. 아시아의 자기주장은 경제성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슬람의 자기주장은 상당 부분 사회적 동원력과 인구 증가에서 비롯되었다.이러한 도전은 지금도 그렇지만 21세기에도 세계정치에 심각한 불안 요소로서 파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파장의 성격은 상당히 다르다. 중국과 여타 아시아 국가의 경제발전은 이들의 정부가 대외관계에서 적극적으로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와 자원을 제공한다. 이슬람 국가들의 인구 증가, 특히 15세에서 25세 사이 연령층의 폭발적 증가는 원리주의, 테러리즘, 폭동, 노동력 수출에 필요한 인력을 제공한다. 경제적 발전은 아시아 정부를 강화시키고 있지만 인구 증가는 이슬람 정부와 비이슬람 사회에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물질적 성공은 문화적 자기주장을 낳고, 단단한 힘은 부드러운 힘을 낳는다.
그러나 앞으로 몇십 년 동안은 아시아의 경제성장과 이슬람의 인구 증가가 서구가 주도해온 국제질서에 커다란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특히 세계 문제에 대한 발언권과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실력은 빠른 경제성장을 경험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몫으로 더 많이 돌아갈 것이다. 다음 10년 동안에도 지금의 추세가 지속된다면 중국의 발전은 문명 사이의 관계에서 엄청난 세력 변동을 낳을 것이다. 게다가 그때쯤 가면 인도가 눈부신 경제성장을 하면서 세계무대의 주역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이슬람의 인구 증가도 문명의 세력 판도에 중요한 불안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중등교육을 받은 청년 인구의 급증은 이슬람 부활의 추진력으로 나타날 것이며 이슬람의 호전성과 이민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그 결과 앞으로 몇십 년 동안은 비서구 문명의 힘이 지속적으로 증대하면서 비서구 문명과 서구 문명의 충돌, 비서구 문명과 비서구 문명의 충돌이 나타날 것이다.
세계정치는 근대화의 자극을 받으면서 문화의 경계선을 따라 재편되고 있다. 비슷한 문화를 가진 민족과 국가끼리 뭉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념과 강대국을 중심으로 정의되던 제휴관계가 문화와 문명으로 정의되는 제휴관계로 바뀌고 있다. 정치적 경계선이 문화적 경계선 곧 민족적, 종교적, 문명적 경계선과 일치해 가는 추세에 있다. 냉전 시대의 블록을 대신해 문화적 결속이 등장했으며 문명과 문명의 단층선이 세계정치에서 주요 분쟁선으로 변모하고 있다. 냉전 시대에는 한 국가가 다른 많은 나라들처럼 비동맹 노선을 고수할 수 있었으며 또 일부 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동맹관계를 바꿀 수도 있었다. 한 국가의 지도자들은 자국의 안보 상황에 대한 독자적 판단, 세력균형에 대한 자기 나름의 계산, 이념적 선호를 바탕으로 관계를 변화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에서는 문화적 동질성이 한 나라의 우방과 적국을 규정하는 본질적 요인이다. 냉전 구조에 편입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국가가 문화 정체성 없이 존재할 수는 없게 되었다. “너는 어느 편인가?”라는 물음은 “너는 누구인가?”라는 훨씬 근원적인 물음으로 바뀌었다. 모든 나라는 이 물음에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답변, 곧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이 세계정치에서 그 나라가 차지하는 위치, 그 나라의 친구와 적수를 규정한다.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들이 주로 의지하는 것은 혈연, 믿음, 신앙, 가족이다. 사람들은 비슷한 조상, 종교, 언어, 가치관, 제도를 가진 사람들과 뭉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거리를 둔다.
문명 패러다임은 유럽이 어디에서 끝나는가라는 서유럽인 앞에 놓인 질문에 분명하고 설득력 있게 대답한다. 유럽은 서구 그리스도교가 끝나고 이슬람교와 정교가 시작되는 곳에서 끝난다.
새로운 세계에서는 상이한 문명에 속하는 국가들과 집단들의 관계는 우호적이지 않고 대체로 적대적인 경향을 띨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날 것으로 예상되는 관계는 문명 간의 관계다. 미시적 차원에서 보면 폭력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단층선은 이슬람과 이웃한 정교, 힌두, 아프리카, 서구 그리스도교 문명 사이에 놓여 있다.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지배적 대립은 서구 대 비서구의 양상으로 나타나겠지만, 가장 격렬한 대립은 이슬람 사회와 아시아 사회, 이슬람 사회와 서구 사회에서 나타날 것이다. 미래의 가장 위험한 충돌은 서구의 오만함, 이슬람의 편협함, 중화의 자존심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할 것이다.
비서구인들은 서구의 원칙과 서구의 행동 사이에서 나타나는 간극을 서슴지 않고 지적한다. 위선, 이중 잣대, 단서 조항은 보편주의가 한낱 제스처에 지나지 않음을 여실히 드러낸다. 민주주의가 중요하지만 그것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집권을 돕는다면 재고의 대상이 되고, 이란과 이라크에게는 군축을 요구하지만 이스라엘은 방치하고, 자유무역은 경제성장을 낳는 만병통치약이지만 농업은 예외고, 중국의 인권은 문제 삼아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인권은 문제 삼지 않고, 석유 자원을 가진 쿠웨이트에 대한 침공은 기를 쓰고 막아도 석유 자원이 없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공격을 받으면 나 몰라라 한다. 이중 잣대는 어설픈 보편주의가 불가피하게 치러야 할 대가다.
핵을 비롯한 대량 살상무기의 확산은 다문명 세계에서는 느리지만 필연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권력 분산의 중심적 현상이다.
미래는 변경 불가능한 방식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미래도 영속적이지 않다. 문제는 유럽이 이슬람화할 것이냐 아니냐 또는 미국이 히스패닉화할 것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미국과 유럽이 상이한 문명들에서 유래한 2개의 서로 뚜렷이 구분되는 대규모 공동체를 포함하는 단절국이 될 것이냐의 여부다. 이것은 다시 이민자의 규모와 그들이 유럽과 미국을 지배하는 서구 문화에 어느 정도까지 동화되느냐에 달려 있다.
문명의 갈등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국지적이고 미시적인 차원에서 ‘단층선 분쟁’은 상이한 문명에 속한 인접국들 사이에, 한 국가 안의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들 간에, 옛 소련과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낡은 질서의 파편 위에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고 시도하는 집단들 간에 발생한다.단층선 분쟁은 특히 이슬람교도와 비이슬람교도 사이에서 빈번히 일어난다. 세계적이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핵심국 분쟁’은 상이한 문명에 속한 주요국들 사이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분쟁을 낳는 쟁점들은 국제정치의 고전적 주제로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엔, IMF, 세계은행처럼 지구적 규모를 갖는 국제기구의 운영과 발전에 미치는 상대적 영향력.
핵 확산 금지, 무기 규제, 군비 경쟁을 둘러싼 논쟁에 반영되는 상대적 군사력.
무역, 투자 등의 문제를 둘러싼 대립에서 나타나는 경제력과 복지 수준.
한 문명에 속한 나라가 다른 문명에 거주하는 동족을 보호하고, 다른 문명에 속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자국 영토에서 다른 문명 사람들을 배제하려는 노력과 관련 있는 인적 요소.
한 나라가 자신의 가치관을 다른 문명 사람들에게 강요하거나 촉구하려고 시도할 때 발생하는 가치관과 문화의 갈등.
단층선 분쟁이면서도 핵심국들을 곧잘 전선으로 끌어내는 영토 분쟁.
이러한 문제들은 인류의 역사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갈등의 근원이다. 그러나 상이한 문명에 속한 국가들이 부딪칠 때 문화적 차이는 갈등을 증폭시킨다. 상호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핵심국들은 자기 문명의 응집력을 강화하고 제3의 문명에 속하는 국가들의 지지를 끌어내고 적대관계에 있는 문명의 내부 분열과 결함을 조장하며 이러한 목표들을 달성하고자 외교적, 정치적, 경제적 방책, 은밀한 공작, 유인, 선전, 강압을 적절히 섞어서 구사한다. 그러나 핵심국들은 중동이나 인도 대륙처럼 단층선을 따라 서로 인접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직접적 군사 충돌은 상호 자제한다. 핵심국 간의 전쟁은 다음 두 가지 상황에서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첫째, 핵심국을 포함한 동질적 집단들이 분쟁 당사자들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단층선 분쟁이 문명 간의 전면전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대립관계에 있는 핵심국들이 자제하거나 단층선 분쟁을 해결하도록 유도하는 측면도 있다. 둘째, 문명들의 세력균형에 변화가 올 때, 핵심국들의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투키데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 문명 내부에서 아테네의 힘이 강성해졌을 때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서구 문명의 역사는 부상하는 강대국과 쇠락하는 강대국 사이에 벌어진 ‘헤게모니 전쟁’의 역사다. 상이한 문명에 속해 있으면서 부상하는 핵심국과 쇠락하는 핵심국 사이의 분쟁 촉발 정도는 이들 문명에 속한 국가들이 새로운 강대국의 부상 앞에서 견제를 추구하느냐 편승을 추구하느냐에 달려 있다. 아시아 문명에서는 편승 현상이 더 지배적으로 나타나지만, 중국의 부상은 미국, 인도, 러시아 같은 다른 문명권의 국가들이 세력균형을 도모하도록 자극할 수 있다. 서구의 역사를 볼 때 영국과 미국 사이에서는 헤게모니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 팍스 브리타니카에서 팍스 아메리카나로의 이행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은 두 사회의 문화적 유대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서구와 중국 사이에는 그러한 종류의 유대감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서구에서 중국으로 패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군사 충돌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런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은 상당히 많다. 이슬람의 역동성은 비교적 소규모로 벌어지는 단층선 분쟁이 지속되는 원천이 되고 있으며, 중국의 부상은 핵심국 사이에 벌어지는 대규모 문명 전쟁의 잠재적 원천이 되고 있다.
이처럼 갈등이 지속되는 원인을 12세기 그리스도교들의 종교적 열정이나 20세기의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 같은 일시적 현상에서 찾기는 어렵다. 갈등은 두 종교의 본질과 이들 종교에 바탕을 둔 문명의 성격에서 나온다. 한편으로 이 갈등은 종교와 정치를 통합하고 초월하는 삶의 방식으로서 이슬람을 고수하는 이슬람교의 가치관과 세속의 영역과 종교의 영역을 분리하는 서구 그리스도교의 가치관이 빚는 대립의 산물이다. 그러나 갈등은 유사성에서도 기인한다.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는 모두 일신교인데, 일신교는 다신교와는 달리 자기 외부의 신성을 좀처럼 수용하려 들지 않으며 세계를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원적 구도로 파악한다. 둘 다 하나의 유일한 신앙을 모든 인간의 추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보편주의를 내건다. 이교도를 참다운 유일 신앙으로 개종시켜야 할 의무가 신앙인에게 있다고 보는 점에서 이들은 모두 포교에 커다란 비중을 둔다. 처음부터 이슬람은 정복을 통해 교세를 넓혔으며, 그리스도교도 그런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지하드’와 ‘십자군’이라는 평행선상에 놓인 개념은 서로 유사할 뿐 아니라 세계의 다른 주요 종교들과 이 두 종교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다른 문명들이 역사를 순환적이거나 정적인 상태로 보는 것과는 달리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함께 역사를 목적론적으로 이해한다.
서구와 이슬람의 갈등은 영토보다는 무기 확산, 인권과 민주주의, 원유 지배권, 이민, 이슬람 테러주의, 서구의 간섭 같은 문명 사이의 포괄적 쟁점에서 표출된다.
서구가 직면한 근본 문제는 이슬람 원리주의가 아니라 이슬람이다. 자신들 문화의 우월성을 철석같이 믿고 자신들 힘의 열세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거느린 상이한 문명이다. 이슬람의 문제를 우려하는 쪽은 CIA나 미 국방부가 아니라 서구다. 자기 문화의 보편성을 철석같이 믿고 비록 쇠퇴하고는 있지만 자기들은 아직도 우월하기 때문에 그 문화를 전 세계에 전파할 사명감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거느린 상이한 문명이다. 이것이야말로 이슬람과 서구의 갈등에 불을 지르는 핵심 성분이다.
경제성장은 국가 내부는 물론 국가들 사이에서 정치적 불안을 낳아 국가 간, 지역 간 세력균형에 변화를 가져온다. 경제 교류는 인적 접촉을 가져올 뿐이지 화합을 낳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경제 교류는 민족 간의 차이점에 대한 깊은 각성과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낳았다. 국가 간의 무역은 이익만이 아니라 갈등도 낳는다. 과거의 역사적 경험이 타당하다면, 아시아의 경제적 서광은 아시아의 정치적 그늘, 곧 아시아의 불안정과 갈등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
아시아의 경제발전과 아시아 국가들의 점증하는 자신감은 적어도 세 가지 방식으로 국제정치를 교란시킨다. 첫째, 경제발전은 아시아 국가들의 군사력 강화를 가능케하여 미래 아시아 국가 간의 관계에서 불확실성을 높이고 냉전 시대에 억눌려 있던 쟁점과 대결 의식을 전면으로 부각시키며 그 결과 이 지역의 분쟁 가능성과 불안정성을 높인다. 둘째, 경제발전은 아시아 국가들과 서구 특히 미국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이 싸움에서 아시아 국가들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킨다. 셋째, 아시아 최대의 강국인 중국의 경제성장은 이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높이고 중국이 동아시아에 대해 전통적 헤게모니를 재주장하고 나설 가능성을 높인다. 이 과정에서 다른 나라들은 중국에 ‘편승’하여 이러한 발전에 합류하거나 ‘견제’를 추구해 중국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인다. 서구가 힘을 행사하던 지난 몇 세기 동안 중요한 국제관계는 서구의 주요 강대국들이 자기들끼리 펼치는 게임이었고, 18세기에 들어와 부분적으로 러시아가, 다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일본이 이 대열에 합류했다. 유럽은 거대한 분쟁과 협력의 중심무대였고, 냉전 시대에도 초강대국의 대결은 주로 유럽의 심장부에서 이루어졌다. 탈냉전 세계의 중요한 국제관계의 경연장이 있다면 그것은 아시아, 그중에서도 특히 동아시아다. 아시아는 문명의 가마솥이다. 동아시아 지역에서만 6대 문명(일본, 중화, 정교, 불교, 이슬람교, 서구)에 속한 국가들이 있으며, 남아시아에는 추가로 힌두 문명이 있다. 네 문명의 핵심국인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이 동아시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고, 남아시아에는 인도가 있으며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는 한국, 대만, 말레이시아 등 점점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는 중진국들이 존재한다. 그 결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18세기와 19세기의 유럽 전세에 비교할 수 있는 국제관계의 대단히 복잡한 양상이 나타났고, 이 다극적 상황에서 불확실성과 가변성 또한 커졌다. 동아시아는 복수의 문명, 복수의 축을 가졌다는 점에서 서유럽과 대조되며 경제적, 정치적 차이는 이 대조를 한층 부각시킨다. 서유럽의 모든 국가들은 안정된 민주제도를 운영하고 시장 경제를 가지고 있으며 경제발전의 수준이 매우 높다. 1990년대 중반 동아시아에는 하나의 안정된 민주주의 국가, 불안정한 몇몇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들, 아직도 공산주의 독재 체제를 고수하고 있는 4~5개 국가, 군부 정권, 개인 독재, 일당 지배 체제 국가들이 혼재한다. 일본과 싱가포르에서 베트남과 북한에 일기까지 경제발전의 수준도 천차만별이다. 시장 경제와 경제 개방이 대세이긴 하지만, 경제 체제의 성격은 북한의 명령 경제에서 시작해서 국가 규제와 민간 기업의 다양한 혼합을 거쳐 홍콩 같은 자유방임 체계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다.
“모든 전쟁은 끝이 나게 마련이다.” 이것이 기존의 상식이다. 이 상식은 단층선 전쟁에도 들어맞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단층선 분쟁은 일정 기간 동안 완전히 중단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원히 종식되는 경우는 드물다. 단층선 전쟁은 갖은 휴전과 정전이 특징이지만, 핵심이 되는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는 포괄적 평화협정은 기대하기 어렵다. 단층선 전쟁은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들 사이의 지속되는 적대관계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걸핏하면 재발한다. 단층선 분쟁은 또 두 사회의 지리적 근접성, 상이한 종교와 문화, 이질적 사회구조, 역사적 기억에서 비롯된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사회가 성숙해져 저변의 갈등이 사라질 수도 있다. 혹은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을 절멸시켜 분쟁이 야만적인 방식으로 신속하게 제거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경우가 아닌 한 분쟁은 지속되며 폭력 사태는 거듭 재연된다. 단층선 전쟁은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단층선 분쟁은 영원히 이어진다.
단층선 전쟁을 중지시키는 합의에 잠정적으로라도 도달하려면 그 합의 내용에 1순위 당사자들의 지역적 세력관계와 2, 3순위 국가들의 이익이 제대로 반영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2순위 관련국과 대개 문명의 핵심국인 3순위 관련국은 가능성 있는 분쟁 종식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공동의 이해관계나 현실적 안보 필요성을 가지게 마련이다. 분쟁을 종식시키고 지역 분쟁이 지구 규모의 전쟁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세계 주요 문명의 핵심국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의식하고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단층선 전쟁은 밑에서 끓어 오르지만 단층선 평화는 위에서 똑똑 떨어진다.
문명사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소중한 교훈은 개연성 높은 사태는 많아도 피할 길 없는 숙명적 사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명은 스스로를 혁신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해왔다. 서구가 당면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는 외부의 도전 세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자신의 내부적 쇠락 과정을 중단시키고 역전시킬 만한 능력이 과연 있는가의 여부다. 서구는 갱생에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계속되는 내부의 부식으로 경제적으로나 인구로나 더 활력 있는 다른 문명들에게 종속당하는 몰락의 과정이 가속화될 것인가?
서구의 입장에서 보면 경제나 인구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윤리 의식의 약화 문화적 쇠락, 정치적 분열이다. 윤리 의식의 약화를 나타내는 징후로서 자주 거론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범죄, 마약 사용, 전반적 폭력 등 반사회적 행동의 증가.
이혼율, 문맹, 10대 임신, 편부모 가정의 증가를 동반하는 가정의 와해.
자발적 결사에 참여하려는 정신과 거기서 싹트는 개인 상호 간의 신뢰를 뜻하는 ‘사회적 자본’의 약화.
‘노동 윤리’의 전반적 약화와 개인적 몰입이 유행처럼 번지는 현상.
미국의 경우 학력 수준의 저하로 나타나는, 학습 활동과 지적 활동에 대한 열의 감퇴.
결국, 앞으로 대규모의 문명 전쟁을 사전에 방지하려면 핵심국들이 다른 문명 내부의 분쟁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일부 국가들, 특히 미국 같은 나라는 이 엄연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데 남다른 어려움을 겪는 듯하다. 핵심국이 다른 문명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제의 원칙은 다문명, 다극 세계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데 으뜸가는 전제 조건이다. 또 하나의 전제 조건은 핵심국들끼리 상이한 문명에 속한 집단이나 국가 간의 단층선 전쟁을 억제하거나 종식시키기 위해 타협을 해야 한다는 공동 중재의 원칙이다.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공동의 문화에 대한 일체감보다는 공동의 적(또는 악)에 대한 반감’이다. 인간 사회는 그것이 인간적이므로 보편적이며, 그것이 사회이므로 특수하다. 우리는 가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행진도 하지만 주로 혼자서 걸어간다. 하지만 ‘가느다란’ 최소한의 윤리는 공통된 인간 조건에서 유래하며 ‘보편적 성향’은 모든 문화에서 발견된다. 문화적 공존을 누리기 위해서는 언뜻 보면 보편적일 듯싶은 한 문명의 특성을 부각시키기보다 대부분의 문명들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나서는 것이 더 바람직한 길이다. 다문명적 세계에서는 보편성을 거부하고 다양성을 수용하며 동질성을 모색하는 것이 건설적인 방안이다.
만일 인류가 보편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다면 그 문명은 이 동질성의 심화와 확대 과정에서 출현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제의 원칙과 중재의 원칙 이외에도 다문명 세계에서 평화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또 하나의 원칙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동질성의 원칙이다. 어떤 문명에서 살고 있든 인간은 다른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가치관, 제도, 관행을 확대하는 방법을 꾸준히 모색하고 그 방안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이야기란, 말하는 행위 안에 있는 모든 것이다. 이야기는 나침반이고 건축이다. 우리는 이야기로 길을 찾고, 성전과 감옥을 지어 올린다. 이야기 없이 지내는 건 북극의 툰드라나 얼음뿐인 바다처럼 사방으로 펼쳐진 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이는 당신이 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 혹은 그의 이야기를 스스로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가늠해 보는 것이다.
자유로운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이야기에 질문을 던지고, 잠시 멈추고, 침묵에 귀 기울이고, 이야기에 이름을 지어 주고, 그런 다음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술탄에게 죽임을 당한 숫처녀들은 술탄의 이야기 안에 있었다. 세에라자드는 노동자들의 영웅처럼, 생산수단인 통제권을 쟁취한 다음,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길을 열었다.
동화는 문제에 관한 이야기, 문제 휘말렸다가 그것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문제 상황은 무언가 되어 가는 여정에서 꼭 거쳐야만 하는 단계인 듯하다. 온갖 마법과 유리로 만든 산, 집채만 한 진주, 한낮처럼 아름다운 마녀, 말하는 새, 시 뱀이 되어 버린 왕은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대부분의 이야기에 담긴 핵심은 역경에서 살아남는 일,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일,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다. 어려움은 늘 필수 사항이지만, 거기서 무언가를 배우는 건 선택 사항이다.
거울은 모든 것을 보여 준다. 오로지 거울 자신만 빼고. 거울이 되는 일은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신화에 나오는 에코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당신 자신에 대한 것은 어떤 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 나르키소스의 이야기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그가 산속 연못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그렇게 자신의 반영에만 빠진 그가 타인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결국 굶어 죽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 작은 모험 이후로, 내게는 줄곧 나를 든든하게 지지해 준 좌우명 ‘정말 좋은 이유가 없다면 절대로 모험을 거절하지 말자.’가 생겼고, 그때까지 본능적으로 물리쳤던 초대나 가능성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젊었을 때 읽었던 마르키 드 사드의 문장이 종종 떠오르곤 한다. “아! 늘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시간에게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이 살덩이든 저 살덩이든, 오늘은 한 인간의 몸을 이루고 있지만 내일이면 1000마리의 곤충으로 변해 버릴 것을?” 사드에게 중요했던 이 질문 혹은 탄식은 일반적으로 분해라고 상상하는 어떤 과정이 또한 변신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심지어 썩어 가는 것도 다른 생명으로 변신하는 하나의 형식이다. 무언가가 되어 가면서 동시에 무언가가 사라지는 격렬한 과정의 일부이다. 그것은 잔인하고, 죽음이며 또한 삶이다. 살아 있는 것은 거의 모두 다른 생명의 죽음 덕분에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은 퇴화이면서 재생이다.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 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 감정이입은 다른 이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을 본인이 겪었던 고통과 비교해 해석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일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당신 스스로에게 해 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먼 거리를 작은 공간에 압축시켜 놓았다는 점에서 미궁은 인간이 만들어 낸 다른 두 고안물과 닮았다. 하나는 실타래고, 다른 하나는 단어와 문단과 쪽을 하나로 묶어 놓은 책이다. 책의 문장이 실타래에 감긴 한 가닥의 실이라고, 그 문장도 실처럼 풀 수 있는 것이라고 상상해 보자. 그렇게 풀린 문장이 만들어 낸 선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실제로 걷고 있다고 말이다. 독서 또한 하나의 여정이다. 눈은 선처럼 펼쳐진 생각을 따르고, 책이라는 압축된 공간에 접혀 있던 그 생각들이, 당신의 상상과 이해 안에서 다시 차근차근 풀려 나간다.
고대 그리스어 ‘시그노미(sungnome)’라는 단어가 있다. ‘이해하다. 공감하다. 용서하다. 봐주다’라는 뜻을 모두 담고 있는 이 단어는 생각과 느낌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이해가 용서 혹은 대상 자체의 줄발점이라고 제안한다. 이 단어의 범위는 이해를 위해 감정이입이 필요하고, 감정이입에 이르기 위해 이해가 필요하며, 감정이입은 또한 용서임을, 이 모든 것은 서로서로 도우며, 함께 이루어지는 것임을 암시한다. 어쩌면 그것들은 처음부터 따로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영어에서는 ‘이해하다(understanding)’가 그런 식으로 사용되면,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종종 이해를 먼저 구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태도가 변명의 남발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쩌면 ‘용서’라는 말은 엉뚱한 곳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용서란 대부분의 경우 다른 누군가가 아닌 당신 자신에게 주는 것이니까. 당신은 오래된 괴로움이라는 추한 짐을 내려놓고, 끔찍한 것과 이어져 있던 끈을 풀어 버리고, 거기서 멀어진다. 용서란 공적인 행동, 혹은 두 당사자 사이의 화해이지만, 용서가 마음속에서 벌어질 때 그 과정은 좀 더 불명확하다. 갑자기 혹은 서서히 무언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마치 어떤 범위에서 벗어나거나 그것을 넘어선 것만 같다. 그러다 그 무언가는 그것에서 벗어난 당신 스스로를 축하하려는 바로 그 순간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물리치료사가 내게 해 준 이야기에 따르면, 만성 통증 같은 경우에도 환자가 그 고통을 다르게 경험하도록 훈련시키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한다. 단 환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그것이 자신의 비극일지라도, 그 이야기 때문에 본인이 불행할지라도 계속 이야기한다. 혹은 그 이야기를 멈추는 방법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편안함보다는 일관성을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어느 부분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죽음이 먼저 오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의 죽음은 스스로 익숙한 자기 모습의 죽음이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사람이 경제적으로 궁핍한 시절에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있었는데, 평균적인 부가 늘어나고 경제적 양극화 심해지면서 점점 사라져 가는 말이 되었다.
환경의 차이가 능력이나 실력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어서일까?
과거의 여성들이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을 갖지 못해서 역사적인 위인, 저술가, 철학자, 과학자들이 남성에 편중된 것과도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본문발췌]
그동안에는 신문사에 잡다한 일들을 구걸하고, 여기저기서 당나귀 쑈나 결혼식에 관한 소식을 기고하며 생계를 이었습니다. 편지 봉투에 주소를 쓰고 노부인들에게 읽어주고 조화를 만들고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알파벳을 가르치기도 하며 몇 파운드씩 벌었지요. 1918년 이전에는 여성이 가질 수 있었던 직업이 주로 이런 일이었거든요. 이런 일이 얼마나 고된지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요. 여러분도 아마 이런 일을 하는 다른 여자들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또 여러분도 경험이 있을 테니 그렇게 번 돈으로 생활을 꾸리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하지만 여전히 그보다 더 큰 고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지난날 내 안에 키워온 두려움과 비통함이라는 독이었습니다. 우선 언제나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늘 그래야 했던 건 아니지만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고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이해관계가 너무 커서 노예처럼 비위를 맞추고 아양을 떨며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드러내지 않으면 죽는 것과 다를 바 없던 재능(하잘것없지만 당사자에게는 소중한)이 소멸하고 그와 함께 내 자신, 내 영혼도 파괴당한다는 생각, 이 모든 것이 꽃피는 봄날을 갉아먹고 나무속을 좀먹는 녹처럼 변했지요.
<제인 에어> 12장을 펼치자 “나를 비난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비난해도 좋다”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샬럿 브론테를 비난하는 것일까요? 나는 의아했습니다. 그리고 페어펙스 부인이 젤리는 만드는 동안 제인 에어가 지붕으로 올라가 저 멀리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곤 했다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제인 에어는 갈망합니다(제인 에어가 비난받은 이유는 이 때문이었지요). “나는 경계를 넘어 바라볼 수 있는 시력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듣기는 했지만 본 적 없는 분주한 세상과 활기로 가득 찬 도시와 지역들까지 볼 수 있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실제적인 경험을 더 많이 쌓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더 많이 교류하고, 이곳에서 만날 수 없는 여러 성격의 사람들과 친분을 나누고 싶었다. 페어펙스 부인의 장점과 아델라의 좋은 점을 높이 평가하지만, 나는 그와 다른 더 생기 있는 선량함이 있다고 믿었고, 내가 받는 것들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녀에게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를 주고, 마음속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주자고, 그리고 지금 쓰는 글은 반쯤 덜어내도 내버려두자고요. 그러면 그녀는 머지않아 더 나은 책을 쓸 거라고 말입니다. 나는 메리 카마이클이 쓴 <생의 모험>을 서가 맨 끝에 꽂으며 말했습니다. 100년 뒤에 그녀는 시인이 될 거라고요.
1년에 500파운드라는 돈은 곧 깊이 생각하는 힘이고, 자물쇠가 달린 방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라는 상징적인 해석의 여지를 허용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여전히 마음으로 그런 것들을 극복해야 하고 위대한 시인들은 흔히 가난했다고 말하겠지요.
우리가 말로는 민주주의를 떠들어대지만, 실제로 영국의 가난한 아이가 속박을 벗어나 지적 자유를 탐험하고 그 자산을 바탕으로 위대한 작품을 낳을 가망이 없다는 건 아테네 노예의 자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가난한 시인들은 근래뿐 아니라 과거 200년 동안 바늘구멍 만큼의 기회도 얻지 못했다. …. 영국의 가난한 아이가 속박을 벗어나 지적 자유를 탐험하고 그 자산을 바탕으로 위대한 작품을 낳을 가망이 없다는 건 아테네 노예의 자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바로 그것입니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에 달려 있지요. 시는 지적 자유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은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고작 200년 동안 아니라 태초부터 그랬습니다. 여성은 아테네 노예의 자식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없었지요. 그러므로 여성은 시를 쓸 수 있는 바늘구멍만큼의 기회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과거 여성들,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다면 좋았을 그 여성들의 노고 덕분에 그리고 공교롭게도 두 번의 전쟁 즉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거실 밖으로 불러낸 크림 전쟁과 60여 년 뒤 평범한 여성들에게도 참전의 문을 열었던 1차 세계대전 덕분에, 이런 악폐는 계속 나아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소한 주제든 거창한 주제든 주저하지 말고 모든 종류의 책을 쓰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무슨 수를 쓰든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여행하며, 한가로운 시간을 갖고, 세계의 미래나 과거를 사색하고, 책을 상상하며 길모퉁이를 배회하고, 생각의 낚싯줄을 강 속에 깊이 드리울 만큼 충분한 돈을 갖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소설에만 한정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여러분이 나를 즐겁게 해주고 싶다면 (그리고 나와 비슷한 사람이 수천 명은 있지요), 여행과 모험, 연구와 학술, 역사와 전기, 비평과 철학, 과학에 대한 책들을 쓸 겁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여러분은 틀림없이 소설의 기법에 기여하게 될 겁니다. 책들은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니까요. 소설은 시와 철학과 가까이 붙어 있을수록 더 좋습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로서는 그 본질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형체 속에 머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실재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그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루의 껍질을 울타리 너머로 던져버린 뒤 남는 것이고, 지난 시간과 우리의 사랑과 증오가 남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 생각에 작가는 살면서 이 실재를 마주해야 할 일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습니다. 실재를 찾고 잘 모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작가가 해야 할 일이지요. … 따라서 내가 여러분에게 돈을 벌고 자기만의 방을 가지라고 당부하는 뜻은 실재를 마주하는 활기찬 삶을, 활기차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문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누군가에게 전해줄 수 있든 없든 말이지요.
우리가 앞으로 100년 남짓 더 살면서(개개인으로서 각자의 소소한 삶이 아니라 진정한 삶으로서 공동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1년에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진다면, 자유로운 습성과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정확하게 쓸 수 있는 용기를 지닌다면, 공용 거실을 잠시 벗어나 인간을 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실재와 관련해서 본다면, 그리고 하늘도 나무도 그 밖의 무엇이든 그 자체로 볼 수 있다면, 어떤 인간도 시야를 가로막아서는 안 되므로 밀턴의 악령을 넘어서서 볼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메달릴 팔이 없으므로 홀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관계를 맺는 세계는 남자와 여자의 세계일 뿐 아니라 실재의 세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마주한다면, 그때 기회가 찾아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