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신념, 철학.... 관점에 따라 말하는 것이 다르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르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 뛰어나다 비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
[본문발췌]
'사기', 「태사공자서·논육가요지」 무릇 음양가, 유가, 묵가, 명가, 법가, 도가는 모두 통치에 힘썼지만, 단지 관점에 따라 말한 것이 달랐기 때문에 살핀 것과 살피지 않는 것이 있을 따름이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음양가는 징조를 중시하고 꺼리는 것이 많아서 사람들을 압박하여 두려운 것이 많게 했다. 그렇지만 음양가가 사계절의 커다란 순서를 규정한 것은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유가의 학설은 넓지만 요점이 적고 수고스럽지만 효과는 적다. 그러므로 유가의 일은 모두 따르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유가가 군신과 부자의 예라고 규정하는 것, 그리고 부부와 장유의 구별을 분명히 한 것은 바뀔 수 없는 것이다.
묵가의 학설은 검약하여 따르기가 힘들다. 그러므로 묵가의 일을 모두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농사를 강화하고 비용을 절약하라는 묵가의 주장은 없앨 수 없는 것이다.
법가의 학설은 엄격하여 자애로움이 부족하다. 그렇지만 법가가 군신과 상하 관계의 직분을 바로잡은 것은 고처서는 안된다.
명가의 학설은 엄밀한 논리를 강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진실함을 잃게 한다. 그렇지만 명가가 이름과 실제를 바로잡은 것은 살피지 않을 수가 없다.
도가의 학설은 사람의 정신을 전일하게 하고 보이지 않는 도에 부합하도록 행동하게 하고 만물을 풍족하게 만든다. 도가의 학술은 음양가가 말한 사계절 순서에 근거하고 유가와 묵가의 장점을 모으며 명가와 법가의 핵심을 취한다. 그래서 도가는 때와 사태에 따라 변화하여 풍속을 진작시키고 일을 시행하여, 어느 경우든 합당하지 않은 적이 없다. 도가의 학설은 간단하여 적용하기 쉽고, 일은 적지만 효과는 크다
'묵자' - 「비유 하」 유가들은 "군자는 옛것을 따르지 새로운 것을 만들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에 답하겠다. 옛날 예는 활을 만들었고 여는 갑옷을 만들었고 해중은 수레를 만들었으며 교수는 배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가죽 공인, 갑옷 공인, 수레와 배 공인은 모두 군자이고 예, 여, 해중, 교수는 모두 소인이라는 것인가? 게다가 유가들이 따르는 것은 사람들 중 누군가 반드시 만든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유가들이 따르는 것은 모두 소인의 도가 된다.
'순자', 「해폐」 묵자는 실용에 사로잡혀 문화의 가치를 몰랐고, 송견은 욕망에 사로잡혀서 욕망 충족의 중요성을 몰랐고, 신도는 법에 사로잡혀 사람의 능력이 가진 중요성을 몰랐고, 신불해는 권세에 사로잡혀서 사람의 지혜를 몰랐고, 혜시는 문장에 사로잡혀서 사물의 실정을 몰랐고, 장자는 자연에 사로잡혀 인위를 알지 못했다.
'순자', 「천론」 신도는 사후적인 대응만을 보고 사전적인 예측을 보지 못했고 노자는 소극적인 태도만을 보았지 적극적인 태도는 보지 못했고 묵자는 평등만을 보았지 차등을 보지 못했고 송견은 욕망의 적음만을 보았지 욕망의 많음을 보지 못했다.
순자에 따르면 장자가 인위적인 노력보다는 자연적인 숙명이 가진 힘을 숙고한 철학자였다면, 반면 노자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는 소극적이고 겸손한 태도로 삶을 영위하려는 인생 철학자였다.
'회남자', 「범론훈」 돌아가며 인사하고 양보하는 것으로 예를 닦고, 두텁게 장례를 치르고 오랫동안 상례를 치름으로써 죽은 자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공자가 정립했던 것인데, 묵자는 이것을 비판했다. 서로를 차별 없이 사랑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숭상하고, 귀신을 돕고 숙명론에 반대하는 것이 바로 묵자가 정립한 것인다, 양주는 이것을 비판했다. 생명을 온전하게 하고 참된 것을 보존하고, 외적인 것들로 자기 몸을 얽어매지 않는 것은 양주가 정립했던 것인데, 맹자는 이것을 비판했다.
춘추시대 사상사는 세 가지 특이점으로 구성된다. 패자를 지향했던 관중의 정치철학, 주례를 복원하려고 했던 공자의 유학, 그리고 공자의 보수성을 공격하면서 등장했던 묵자의 실천 철학이 바로 그것이다. 전국시대의 사상사는 춘추시대의 사상사보다 훨씬 더 복잡한 양상을 띤다.
첫째, 유가와 묵가는 춘추시대를 넘어서 전국시대에까지 사상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하지만 묵가는 전국시대가 끝나자 마자 마치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중국 사상계에서 사라진다.
둘째, 제나라의 직하학사가 갖는 사상적 중요성이다. 직하학사는 거의 1000여 명의 사상가가 제나라의 경제적 후원을 등에 업고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을 만끽했던 장소다. 사상가들이 모여 사상적 헤게모니를 놓고 다른 사상가들과 치열한 논쟁을 펼치게 된다. 이런 논쟁 과정을 통해 그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철학의 한계와 가능성을 자각하고, 반대로 상대방의 철학이 가진 장점과 단점을 이해하게 된다. 그들이 자신이 가진 철학적 통찰력을 더 세련되고 논리적인 형시으로 체계화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논쟁의 힘이었던 셈이다. 이런 치열한 논쟁이 제자백가로 하여금 정당화의 논리나 설득의 수사학을 모색하도로고 강제했다는 점이다. 또한 직하학사에서는 사상의 자유가 철저하게 보장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양주와 송견처럼 반전 평화주의를 표방하는 아나키스트들도 직하학사에서는 속내를 거침없이 토로할 수 있었다.
셋째, '사기'나 '한서'에서 도가로 분류되는 노자와 장자의 철학이 전국시대 중기 직하학사에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다.
넷째, 전국시대 중기부터 천하 통일 직전까지 직하학사에서 정치 철학자로 각광을 받았던 신도와 신불해의 사상이 한비자의 정치철학, 다시 말해 전제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현실주의적 정치철학으로 종합된다.
사회, 경제, 정치체계와 플랫폼 기업의 서비스는 사람들에게 풍요와 편익을 제공하며 부지불식간에 시스템의 노예로 만든다.
[본문발췌]
내가 사랑한 것이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분별없는 끌림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의 우행(愚行)이 사랑' 이라면 결혼은 '장기간에 걸친 우행' 이라는 니체의 말을 나는 결혼 전부터 언제나 숭상했다.
서울은 이른바 문화의 드높은 '중심'이고 소비자본의 아름다운 '첨단'이나, 동시에 갈 길 모르는 망명자들의 감미로운 '피난처'이기도 했다. 나도 한때 그 분위기에 끼이고자 나의 고절한 시간들을 견딘 적이 있었다. 갈 길 모르던 망명자 시절의 이야기였다. '젊었을 때 우리는 배우고 늙었을 때 우리는 이해한다'는 잠언은 틀린 말이었다. 젊은이들이 화려한 문화의 중심에서 만 원씩 하는 커피를 마실 때, 늙은 아버지들은 첨단을 등진 변두리 어두컴컴한 작업장 뒤편에서 인스턴트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들고 있는게 우리네 풍경이었다. 문제의 잠언은 '젊을 때 소비하고 늙을 때는 밀려난다'고 바꿔야 마땅했다.
어머니는 일종의 자본가였고, 아버지는 어머니와 세 자매의 몸종이나 청지기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금 나와라 뚝딱, 하면 어머니를 통해 금이 나왔고 은나와라 뚝딱, 하면 어머니를 통해 또 은이 나왔다. 그녀와 언니들이 자연히 어머니를 중심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머니를 사랑해서라기보다 어머니가 분배해주는 달콤한 과실에 철저히 굴종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분배해줄 것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들은 어머니에게마저 그런 존경과 신뢰를 바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소금은, 모든 맛을 다 갖고 있다네. 단맛, 신만, 쓴맛, 짠맛. 단것, 신것에 소금을 치면 더 달고 더 시어져. 뿐인가. 염도가 적당할 때 거둔 소금은 부드러운 짠맛이 나지만 32도가 넘으면 쓴맛이 강해. 세상의 모든 소금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맛이 달라. 소금에 포함된 미네랄이나 아미노산 같은 것이 만들어내는 조화야. 사람들은 닷맛에서 일반적으로 위로와 사랑을 느껴. 가볍지. 그에 비해 신맛은 나에게 시비를 거는 것 같고, 짠맛은 뭐라고 할까, 옹골찬 균형이 떠올라. 내 느낌이 그렇다는 거야. 쓴맛은 그럼 뭐냐. 쓴맛은, 어둠이라 할 수 있겠지...."
"염전의 바닥을 까뒤집어 고르게 하면 증발이 잘되니까 생산량이 물론 높아지지.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일세. 내가 지금 판을 까뒤집는 건 단지 생산량 때문이 아닐세. 갯벌 아래, 그러니까 저기 눌린 어둠속에 미생물이 더 많아서 까뒤집는 거야. 그것들이 많이 포함돼야 모든 맛이 균형 있게 녹아들어 하나로 합쳐지니까. 나는 짜기만 한 소금은 싫어. 이제 세계인의 지상명령어가 돼 자네 같은 시인도 무심코 내게 들이대는 말, 그 생산량이란 말만 해도 그렇잖아. 예컨대 공업적으로 불순물을 제거한 정제염은 염화나트륨 성분이 거의 전부야. 거기엔 오로지 짠맛밖에 없어요. 생산량이란 말도 바로 그렇지. 다른 게 끼어들 틈이 없는 말이거든. 생산량의 증가를 가로막는 다른 것은 모두 불순물이라고 불러. 단연 제거해야 할 것이라고. 생산량이란 관점으로는 좋을지 모르지만 사람에게 해로울 뿐이지. 젊은 사람이 애할지는 모르겠지만, 소금은, 인생의 맛일세!"
모든 문제는 잉여 재산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잉여는 소비를 부르고, 소비는 더 큰 욕망과 더 큰 잉여를 부르도록 운명 지워져 있었다.
"이걸로 돈을 벌어 많이 모아야 한다면 상관이 있겠지만, 우리 가족 먹고사는 거야 그래도 충분하니까 된 거지. 생산성이란 말, 나는 증오하네. 잉여 재산을 쌓으려고 생산성 타령을 하는 것이겠지. 지구인들을 노예로 만드는 낱말이 바로 그거야, 생산성! 재물 쌓아서 뭐하겠나. 애들 물려주려고? 핏줄 배불리려고? 돈을 물려주는 것보다, 저 혼자서 굶주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기르면 되는 거지. 난 우리 애들, 생산성의 노예로 살게 할 마음 없어. 포악한 말이야." 생산성의 폭압적인 가치를 버리는 대신 자연주의적 정성의 집결체로서 사람을 살리는 소금이 토판염이라 했다. 좋은 소금은 만물을 살린다고 그는 말했다.
가출 전의 그는 빨대 하나 들고 세상의 구조에 충직하게 복무했다. 만족은 오지 않았다. 불가사리 같은 자본 중심의 체제에 기생해 그 역시 빨대를 꽂고 죽어라 빨았으나, 넷이나 되는 처자식이 그의 몸뚱이에 빨대를 또한 꽂고 있었으므로 그가 빨아올리는 꿀은 늘 턱없이 모자랐다. 모자라면 더욱 몸이 달았다. 그 체제는 그에게 약간의 꿀을 제공하는 대신, 그를 계속 노예 상태로 두고 부려먹기 위해 그의 후방에 있는 처자식을 끊임없이 부추겨 그가 빨아 오는 꿀을 더 재빨리 소모시키도록 획책했다. 회사의 매출이 10으로 늘어나면 '단맛'에 길들여진 가족들의 소비 욕구는 어느새 100이 되었다. 회사와 회사를 거느린 체제가, 그에게 10을 주고 뒷구멍에서는 그의 가족들이 100의 욕구를 갖도록 끊임없이 획책했다는 것을, 그는 가출하기 전엔 몰랐다. 그가 죽어라 빨대를 꽂아 빤 10의 꿀은 빚까지 보태 가족들에게 100으로 빨렸고, 그 100은 다시 고스란히 회사와 회사를 거느린 체제 안으로 되돌아가는 방식이었다.
체제의 입장에서는 아주 효율적인 구조였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연봉이 올라도 계속 방어 불능 상태에 남게 되는 잔인한 구조가 아닐 수 없었다. 그 구조 안에 들면 부모 자식, 부부 관계되 안전하게 영위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자식들은 커가면서 아비의 말보다 저들에게 더 다급하게 영향받는 욕마의 '괴물'로 시시각각 변해갔다. 가족끼리 둘러앉아서도 더, 더, 더라고 말하면서 소비의 단맛을 쫓아가도록 만드는 효과적인 프로그램은 얼마든 널려 있었다. 동료에게든 친구에게든, 비인간적인 빨대를 꽂아 욕망을 채우도록 유도하는 프로그램들도 다 그 범위 안에 있었다.
나의문화유산 답사기를 읽고 떠나는 여행! 눈으로 보기만 하는 여행에서 느끼고 내 기억속에 녹아드는 여행!
[1권 - 남도답사 일번지 본문발췌]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국토박물관의 참 모습과 참된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외국을 관광하고 돌아오는 사람 중에는 "대영 박물관에 가보았더니 한국미술품이 너무 초라하더라" 는 식으로 말을 아주 쉽게 해버리는 경우를 자주 만난다. 그러나 이 말을 정확한 표현으로 고친다면 고친다면 "대영박물관의 한국미술품 컬렉션은 별볼일 없더라"라고 해야 옳다.
사람들은 생래적으로 흔한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 습성이 있다. 인간은 아는 만큼 느낄 뿐이며, 느낀만큼 보인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만큼만 느끼는 법이다. 그 경험의 폭은 반드시 지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경험, 삶의 체험 모두를 말한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아나니 그 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 유한준 인간의 손때보다 더 더러운 것이 없다더니 저 더러운 손길이 닿을 적마다 옛 정취도, 자연의 생태계도, 인간의 마음씀도 송두리째 바뀌어버리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농촌은 곡식을 길러내는 농사의 터전에서 돈많은 도시인의 휴양지로, 소유욕과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연지빛, 등황빛, 치자빛, 쪽빛의 정순한 색감. 남도의 봄,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자연의 원색이고 우리의 원색인 것이다. 먼저 깨친 사람이 나중 사람에게 배운 것을 나누어주는 데 인색해서 안된다. 절이라는 것은 소원성취 해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다. 절이란 돌덩이, 쇳덩이 앞에서도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자기의 겸손을 보여주는 것이다. 승자는 역사 속에서 정사(正史)라는 이름 아래 허구를 치장하겠지만 패자는 야사(野史) 속에서 위대한 전설을 남길 것이다. 역사 속에서 패자의 모습은 안좋다. 칼을 쥔 자, 붓을 쥔 자의 일방적 폭력은 그렇게 나타나곤 한다. 경험에 기초하지 않은 상상력은 보잘것없다.
일본인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중일 3국의 미술적 특성을 비교하면서 '중국 미술은 형태미가 강하고, 일본 미술은 색채감각이 뛰어나며, 한국 미술은 선이 아름답다'면서 중국 도자기는 권위적이고, 일본 도자기는 명량하고, 한국 도자기는 친숙감이 감도는 것이 특징이라고 했다. 그래서 중국 도자기는 멀리서 감상하고 싶어지고, 일본 도자기는 곁에 놓고 사용하고 싶어지는데 한국 도자기는 손으로 어루만져보고 싶어진다고 했다. 그런 친숙감이 우리나라 정자에도 그대로 어려 있다.
사의. 산, 물, 바람, 인심이 좋다. 다산이 말한 사의란 '맑은 생각, 단정한 용모, 과묵한 말씨, 신중한 행동'
종묘는 봄여름보다 가을 겨울이 더 좋다. 종묘의 단풍은 울긋불긋 요란스레 화려한 것이 아니라, 참나무 느티나무의 황갈색이 주조를 이룬 가우데 노란 은행나무와 빨간 단풍나무가 점점이 어우러져 가을날의 차분한 정취가 은은히 젖어들게 한다. 그때 종묘에 가면 아마도 인생의 황혼 녘에 찾아오는 처연한 미학을 느끼게 될 것이며, 그렇게 늙을 수만 있다면 잘 산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은 그런 가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뒷산 너머에 있는 창덕궁 후원의 단풍이 '화이불치(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고 한다면 종묘의 단풍은 '검이불루(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라 할 만하다. 겨울 어느 날, 눈이 내려 정전의 지붕이 하얗게 덮일 때 종묘는 거대한 수묵 진경산수화와 같은 명장면을 연출한다. 늦가을의 토요일 오후, 눈 내린 겨울날의 토요일 오전이 제격이다.
부감법은 새가 날아가면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각 구성법으로 풍광을 일목요연하게 장악한다. 궁궐들을 부감하기 좋은 곳
덕수궁은 서울시청이 개방되어 훌륭한 조망을 제공
경복궁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8층에서 보면 <북궐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훤하게 보인다.
종묘는 세운상가 옥상에서 보면 숲속의 정전이 그림처럼 드러나고
창덕궁은 근래에 문을 연 '공간' 신사옥 4층의 카페에서 보면 측면관을 조망할 수 있다.
창경궁은 서울대병원 암센터 6층 옥상에서 행복정원이 생겨 더 없이 훌륭한 조망을 제공한다.
입밖으로 나온 말은 주어담을 수 없고 말이 화의 근원이 되는 예도 많다. 반대로 말로 천냥 빚을 갑는다는 속담도 있다.
삶에서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본문발췌]
말의 한계가 그 사람의 한계다. 어른은 어른답게 말해야 한다. 말하기에 자신이 없다면,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첫째, 오락가락하지 않아야 한다. 머릿속 생각과 내뱉는 말이 따로따로이면 안 된다. 어제 한 말과 오늘 한 말이 일관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심을 말해야 한다.
둘째, 배울 점이 있어야 한다. 어른의 말은 적게 말하면서 많은 것을 들려준다. 천방지축 끼어들고, 참견하고,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본보기가 되어 남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 위로와 용기와 깨우침을 준다. 얻을 게 하나도 없는 말은 '꼰대'의 잔소리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셋째, 징징대고 어리광부리지 않는다. 감정을 절제해 의젓하게 말한다.
넷째, 나답게 말한다. 말이란 곧 나이기에 그렇다. 내 말이 소중하다고 믿고, 말이 거칠어지거나 투박해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인다. 더불어 내 말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부지런히 공부한다.
귀로 듣는 게 잘 듣는 것일까? 혹은 시간을 내 들어주면 잘 듣는 것일까 아니다. 마음으로 들어줘야 잘 듣는 것이다. 마음으로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말하는 사람의 심정과 처지에서 듣는 것이다. 듣고 나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을 찾아 해주고, 그것을 생색내지 않는 것이다.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그렇다.
반대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 상대 의견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해준다. "얘기 잘 들었습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요"라고 말한다.
둘째, 공통점을 찾는다. "이러이러한 점에서 저와 의견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기뻤습니다."라고 말한다.
셋째, 내 의견을 피력하기 위한 자락을 만들어둔다. 이른바 쿠션 화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상대의 불쾌감을 덜 수 있도록 본론을 꺼내기에 앞서 '이렇게 말씀드려 죄송합니다만', '결례인 줄 압니다만', '언짢게 들리실 수도 있는데'와 같이 완충 작용을 하는 말을 먼저 덧붙이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가 마음의 준비를 하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존중받았다고 느낀다.
넷째, 이제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 반대하는 이유와 근거, 대안을 포함해 말해야 한다. 그래야 반대를 위한 반대가 되지 않는다.
끝으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반대하는 이유가 개인의 이해득실이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이익 때문에 반대해서는 설득력이 없다. 손해를 감수하면서 반대했을 때 명분이 생긴다. 또한, 사람이 싫어서 반대한다는 인상을 주면 안 된다. 반대하는 사안과 사람을 분리해야 한다. 그래야 앙금이 남지 않는다. 내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마음가짐도 중요하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사실 땅위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곧 길이 된 것이다. - 루쉰, <고향>
의제를 설정하고 여론을 만들어가는 힘이 일부 집단에 편중되어 있는 사회, 언론과 정치와 권력기관이 말을 장악하고 있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힘있는 사람끼리 은밀히 말을 주고받으며 자기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말이 투명하게 공개되고 공유되어야 한다. 시민이 언론과 정치권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말을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정치권과 언론이 시민의 말을 두려워해야 한다. 시민이 균형 있는 공론의 장을 이끌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시민의 입이 열려 있어야 하고, 시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
대화에 집중하는 몰입과 동시에 적당한 거리두기가 균형을 이룰 때 대화는 더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자기 자신과도 거리를 둬야 한다. 나를 객관화해서 보고, 내 삶을 관조하는 거리두기 말이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늘 하는 말이 과연 사실인가? 나는 언제나 진실한가? 남들은 내 말을 어떻게 평가할까? 이런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갖는 거리두기가 가끔은 필요하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 보게 되고, 과정을 눈여겨보지 않으니 칭찬에 인색해지는 것이다. 결과는 한 번뿐이고 늘 좋을 수는 없다. 반면, 과정은 보기에 따라 무수히 많은 칭찬거리를 제공한다.
사람들은 남의 얘기에서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각각의 경험에서 배운 것, 느낀 것, 새롭게 알게 된 것, 깨달은 것을 추가해 경험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랬더니 이제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단다. 그런데 하나 더 필요한 게 있다고 한다. 지금 상태는 저자 개인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 '이건 내 얘기만이 아니라 당신에게도 해당하는 얘기'라는 생각을 갖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경험을 모두의 경험으로 만드는 일반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나의 경험을 보편적인 경험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게 인용이다. 인용은 내 말의 신뢰도를 높여줄 뿐 아니라 나의 특수한 경험을 일반화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누구도 그랬고, 누구도 이렇게 말했어'라는 것이다. 경험은 가장 중요한 말하기의 밑천이다. 말문이 막히거나 말하기가 막막할 때는 경험을 얘기하면 된다. 그리고 그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인용을 달아주면 된다.
말 잘하는 사람은 7가지를 맞춘다.
눈을 맞추고 말해야 한다. 단순히 시선만 맞추는 것이 아니라 교감하며 말하는 것이다. 상대의 반응에 응답하고 감정을 교류하며 말한다.
상황을 맞춰야 한다. 정치나 종교 얘기가 특히 그렇다. 상대의 정치적 성향이나 종교적 신념을 고려하지 않고 말하면 관계를 해치거나 시비가 붙을 수 있다.
속도도 맞춰야 한다. 말하는 속도만이 아니라, 상대가 이해하는 속도에 맞춰 말해야 한다.
관심사를 맞춘다.
스타일을 맞춘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걸 좋아히지 않는 사람도 있다. 공격적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고 수줍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스타일이 제각각이다. 상대 스타일을 파악해 맞춰줄 필요가 있다. 말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 말수를 좀 줄여 상대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더 주고, 수줍게 말하는 사람의 말은 적극적으로 반응해줘서 자신감을 북돋아줘야 한다.
수위를 맞춰야 한다. 수위는 말의 톤에 해당한다. 따뜻하고 차가운, 부드럽고 거친 정도를 의미한다.
수준을 맞춰야 한다. 사람마다 수준이 다르다. 어린아이와 나이 지극한 사람의 수준이 다르고, 많이 배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수준이 다르다.
관찰이 차이를 만든다.
우리는 살면서 몇 안 되는 세계를 체험한다. 나머지는 자신이 경험한 세게를 바탕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편견과 오해, 선입견, 고정관념이 만들어진다. 경험하지 않은 세계를 아는 길은 관찰뿐이다.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면 거기에 오묘한 세계가 있다. 알면 알수록 더 궁금해지고 파면 팔수록 더 깊이가 느껴지는 또 다른 세상 말이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은 대체로 자신이 모르는 미지의 것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다. 그래서 사람을, 사건을, 사물을 유심히 본다. 호기심이 발동해 관찰하고 본 것을 말한다. 아니 말하기 위해 열심히 관찰한다. 관찰은 나만의 느낌과 독창적인 생각을 만드는 출발점이다. 보는 것만 실재하는 세계이고, 말하기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관찰하고, 그걸 말로 표현하는 법을 태어난 직후부터 끊임없이 배우는데 그 단계는 다음과 같다.
"대화의 요체는 말하는 수사학에 있지 않고, 말을 듣는 심리학에 있다."
말의 선명도를 낮추는 5적(賊). 명확하게 말하기 위해 피해야 할 다섯 가지
첫 번째 적은 전제 조건을 다는 것이다. 하고자 하는 말 앞에 '....합니다만'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자기 말에 자신이 없는 경우다.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만들어놓는 것이다.
두 번째 적은 말끝을 흐리는 것이다. 얼버무린다고도 하는데, 끝까지 말하지 않고 말줄임표로 말을 마친다. '~같다', '...인 듯하다', '~로 보여진다'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한다. '본다'라고 하면 될 것을 '보인다'도 아니고 '보여진다'고 말한다.
세 번째 적은 주어를 빼고 말하는 것이다. 사돈 남 말 하듯 하는 것이다. 방송기자들이 자주 쓰는 '~라고 알려졌습니다'도 여기에 해당한다. '알려졌다'의, 주어는 사람이 아니다.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사실은 누가 말한 것인가. 확인되지 않은 풍문이나 낭설에 불과한 것인가?
네 번째 적은 지시대명사의 남발이다. '그것', '저것', '이것' 등의 지시대명사를 많이 쓰면 '거시기' 화법이 될 공산이 크다.
다섯 번째 적은 이중부정과 피동형이다. '꼭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등과 같이 비비 꼬아 이중부정하거나 '~라고 예측한다', '~라고 부른다' 하면 될 것을 '~로 예측된다', '~라고 불리운다'같이 피동형으로 말한다.
말은 곧 자기 생각과 마음이다. 말이 바뀌면 생각과 마음이 바뀌고, 생각과 마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현실이 바뀐다. 모든 것이 말한 대로 된다.
우리는 상대에게 말을 건네기 전에 무슨 말을 할지, 또 그것을 어떻게 전달할지를 충분히 고민한다. 그러나 누구에게 말하는지는 간과하기 쉽다. 내 의견을 어떻게 설득할까에 대해서만 생각하지, 듣는 사람이 어떤 성향을 가졌는지, 그가 무엇을 기대하는지는 뒷전일 경우가 많다. 사실 이것이 가장 중요한데 말이다. 말은 내가 하는 것이니 내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말은 하지 않을 때까지만 내 것이다. 내뱉는 순간, 그 말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그때부터 말의 소유권은 들은 사람에게 옮아간다.
상관과 리더의 차이는 무엇일까? 상관은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리더는 의욕이 샘솟게 한다. 상관은 책임을 추궁하고 리더는 문제를 해결한다. 상관은 '해'라고 말하고, 리더는 '합시다'라고 말한다. 결국 상관과 리더의 가장 차이는 질책하는 순간에 나오는 말의 품격에서 드러난다.
협상을 잘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상대를 잘 파악해야 한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고 무슨 대화가 오갈지 예상해봐야 한다. 가상 시나리오를 써보는 것이다.
대화의 주도권을 잡을 필요는 없다. 주도권을 잡으려 하면 할수록 상대는 더 멀리 도망간다. 상대의 기를 꺾기보다는 체면을 세워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듣고 나중에 말하고, 많이 듣고 적게 말하는 편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상대 생각을 알면 내가 할 말의 윤곽이 더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진정성으로 승부하는 게 낫다. 사람들은 다소 논리가 빈약하더라도 충정이 느껴지는 사람에게 끌리고, 논리적 설득보다는 인간적 신뢰가 협상 결과에 더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껄끄럽고 합의하기 어려운 사안을 뒤로 미뤄두면 대부분 타협을 하고도 협상 말미에 어려움에 봉착한다. 그러나 어려운 것을 먼저 해결하면 거기에 들인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쉬운 것은 서로 양보하며 결론을 내게 돼 있다. 사안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려운 과제를 뒤로 미뤄두고 싶은 심리가 발동해 쉬운 것부터 합의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협상은 이기고 지는 승부가 아니라, 거래를 통해 서로 원하는 것을 얻는 흥정이다. 이기려 들지 말고 함께 성공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툭 까놓고 말하는 게 낫다. 투명해야 한다. 내 카드를 보여줘야 실질적인 협상이 가능하다. '모 아니면 도가 아니라 차선책을 찾는 유연함이 있어야 한다. 독식하려 말고 교환해야 한다.
말은 듣는 사람의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생각은 자유'다. 그러나 그것이 말로 나오는 순간 이미 나의 것이 아니다. 말은 드는 사람이 주도권을 쥔다. 어떤 말을 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들었느냐가 중요하다. "병은 입으로 들어가고 화는 입에서 나온다."
내 평판 혹은 내 삶이 왠지 꼬이는 것 같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의 말버릇을 되돌아보면 어떨까. 나는 '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인가, '반이나 남았다'고 말하는 사람인가. 말 습관이 바뀌면 인상이 바뀌고 인생이 바뀐다.
누구보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나만의 콘텐츠와 이야기를 갖는 것. 달라진 시대, 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전략 중 하나다.
이 하루가 고맙지 않을 이유가 없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입에 달고 살아보자.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감사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게 고마울 뿐이다. 고맙다는 말은 그 말을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하고, 그렇게 말하는 자신의 마음도 따뜻하게 만든다. 미움과 원망과 불평이 가져오는 해악을 생각해보면,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는 오늘도 이렇게 말한다. "빈손으로 태어나 무어라도 가졌으니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지금 이렇게 살아 있어 감사합니다."
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책을 읽으면서, 또 읽고 나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읽으면서 메모하고, 읽고 나서 누군가에게 말해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할 때 독서는 명실상부한 말하기 훈련이 된다. 이밖에도 독서를 하면 얻는 게 많다. 말할거리를 얻을 수 있고, 책을 읽으면서 어휘력과 스토리텔링 능력을 키울 수도 있다. 다만 말할거리를 얻기 위해서는 메모해야 하고, 어휘력과 스토리텔링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저자가 쓴 단어와 글의 구성에 주목하며 읽어야 한다. 메모하지 않거나, 내용을 파악하는 데만 몰두해서 읽으면 말하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권교정의 만화 <매지션>에 코끼리를 갖고 싶어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코끼리가 너무 좋아서 코끼리 한 마리를 갖는 것이 소원이었다. 자나깨나 코끼리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뜨거웠다. 그는 차츰 알게 되었다. 당장 코끼리를 갖게 된다 해도 자신은 그걸 키울 능력이 없다는 것을. 그는 평범한 넓이의 마당을 가진 작은 집에 살고 있었고, 아주 가난하진 않았지만 농담으로라도 부자라고 말할 수 있는 형편이 전혀 아니었다. 코끼리를 손에 넣는다 해도 그것을 데려다 놓을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날마다 코끼리를 배불리 먹일 만큼의 사료를 살 돈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코끼리가 과연 자기에게 오게 될지도 의심스러웠지만, 만에 하나 갑자기 그 일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해도 그것을 유지조차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돈을 모으려고 밤낮으로 노력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그가 일차적으로 원하는 것은 코끼리이지 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코끼리를 위해서가 아니면 그에게 있어서 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곧잘 돈을 모을 기회를 놓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코끼리를 너무도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그는 싫지만 돈을 모아야 했다. 왜 하필 코끼리냐고 사람들은 그에게 묻곤 했다. 개나 고양이라면 쉽게 키울 수 있을 것 아닌가? 물론 그 자신도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이 아니었지만, 그의 마음은 온통 코끼리한테 사로잡혀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도 부자가 되지 못했고, 아직 코끼리는 그의 것이 아니다. 이제 그가 원하는 것은 코끼리가 아니다.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은 이것이다. '코끼리를 포기할 수 있는 마음.' 삶이 불행한 것은 코끼리를 손에 넣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코끼리를 원하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에는 끝이 없지만, 원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는 끝이 있다. 고통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고통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삶의 기술은 내려놓음의 기술이다
실제의 불만족과 행복의 부재를 심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 이다 세상의 종교들이 가장 큰 어리석음으로 꼽는 망상은 '삶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착각'이다. 모두는 이 즐거운 망상 속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고 있다. 세속적인 삶의 목적은 기쁨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 그리고 부의 축적뿐이다.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삶에서 우리가 행하는 이 모든 행위들은 두말할 나위 없이 바보 같은 짓이다. 감각기관을 즐겁게 하는 것, 관계를 갖는 것, 결혼하는 것, 집을 소유하는 것, 부를 축적하고 자동차를 사는 것, 다양한 즐거운 경험을 쌓는 일들이 죽음에 직면해서 무슨 의미를 갖겠는가?
진정한 만족은 원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욕망의 자유가 아니라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세상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그 원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일이다. 고타마 붓다가 깨달은 첫 번째 진리가 '행복의 부재'였다면, 그의 두 번째 진리는 '세상에는 행복이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고, 행복을 원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곧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므로. 원한다는 것은 곧 고통이다. 당신이 갈망하는 코끼리를 소유하려고 하는 시도, 조종하는 것, 생각하는 것, 계획하는 것 모두가 고통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원하는 것에는 끝이 없지만, 원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에는 끝이 있다. 만일 당신이 전혀 원하는 것이 없고 계획도 필요없다면, 얼마나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내려놓는다면 거기 모든 문제는 사라진다. 당신은 이미 코끼리 등 위에 올라앉아 있다. 이것은 깨달음의 아름다운 순간이다.
"깨어 있으라. 무엇에도 얽매이지 말라. 마음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흐르는 대로, 있는 그대로 놓아 두라."
"세상에서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은 단 한 권이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라는 책이다" - 아잔 차
태양이 내리비치는 인도의 시장에 앉아 칠리를 먹는 남자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저녁 무력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그는 여전히 괴로워하며 칠리를 먹고 있었다. 보다 못한 근처 가게 주인이 그에게 물었다. "그 많은 칠리를 먹어도 단맛이 나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왜 계속해서 먹고 있는 거요?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오?" 남자는 이제는 고통에 익숙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힘들게 참고 먹어 왔는데, 이제 와서 포기할 순 없지 않소? 지금 포기한다면 여기에 바친 내 시간들이 얼마나 아깝고 무의미하겠소? 이제 이것은 희망의 문제가 아니라 내 존재의 문제가 되었소." 당신과 나의 삶이 그러하다. 이제 그것은 단맛 나는 칠리에 대한 희망의 문제가 아니라, 코끼리를 갖게 될 가능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너무 오랫동안 그것을 갈구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 그것을 포기하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근본에서부터 흔들린다. 당신은 진심으로 행복하고, 진심으로 만족하는 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을.
누가 쓴 대본에 따라서 웃고 울고, 좋아하고 싫어하는가? 누가 쓴 대본에 따라서 날마다 기뻐하고 슬퍼하고, 행복하고 불행해하는가? 그 대본을 하나님이 쓰는가, 붓다가 쓰는가? 아니면 운명이 쓰는가? 부모인가, 세상인가? 그렇지 않다. 그 대본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 쓰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쓰는 대본에 따라 우리는 사랑하고 미워하고, 즐거워하고 불만족스러워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직 남아 있는 일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이미 자신이 해낸 일을 본다면, 지금가지 한 것은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쌓은 벽돌 벽의 경우처럼, 만일 우리가 잘못된 것과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결코 마음의 평화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지혜로운 정원 주인은 자연의 '완벽한 불완전함' 속에서 아무 생각도, 아무 계획도, 그리고 아무 죄책감도 없이 한 시간의 평화를 즐길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잠시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라져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사라져 줌으로써 그들 자신의 평화를 누릴 자격이 있다! 우리 삶을 구원해 주는 그 한 시간의 중요한 평화를 누린 뒤, 우리는 정원 일의 의무로 되돌아갈 수 있다. 정원에서 평화를 누리는 법을 이해할 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평화를 발견하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특히 우리 자신의 마음의 정원에서 평화를 발견하는 법을. 비록 때로는 너무나 어수선하고 할 일이 너무 많다고 생각될지라도.
'어둡다고 불평하는 것보다 촛불을 켜는 것이 더 낫다.' - 불교 잠언 고민하는 대신 거기 언제나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비록 그 무엇인가가 불평하지 않고 잠시 평화롭게 앉아 있는 일이라 해도.
행복과 고통을 거의 같은 비율로 얻는 것이 삶의 본질이다. 만일 우리가 지금 고통에 처해 있다면, 이것은 우리가 전에 받거나 잃은 행복 때문이다. 행복은 고통의 끝이 아니고, 고통은 행복의 끝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 순환을 돌고 있을 뿐이다. 조금 놓아 버리면 조금의 평화가 오고, 크게 놓아 버리면 큰 평화를 얻을 것이다. 만일 완전히 놓아 버린다면 완전한 평화와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을 상대로 한 그대의 싸움은 끝이 날 것이다.
아내와 남편이 숲으로 산책을 가 "꽥, 꽥!" 우는 소리를 듣고 닭이다, 거위다 싸운다. 그것이 닭이든 거위든 무슨 상관인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조화이며, 기분 좋은 여름날 저녁 함께 산책을 즐기는 일이다. 얼마나 많은 결혼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 때문에 금이 가는가? '닭이냐, 거위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이혼이 발생하는가? 이 이야기를 이해한다면 무엇이 최우선인가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결혼 생활은 닭이냐 거위냐를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게다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하고 장담하는가. 그러고는 나중에 가서야 자신이 완전히 틀렸음을 발견한다. 누가 아는가? 그것이 유전자를 조작해 거위 울음소리를 내도록 변형시킨 닭일지!
사랑할 때의 문제는, 환상이 사라지고 나면 뒤따라는 실망감이 우리의 마음에 심한 상처를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사실 이성과의 사랑에서 우리는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을 사랑할 뿐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우리가 느끼는 행복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을 그리워하게 되고, 뭔가가 든 병을 보내 달라고 부탁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행복감이 그렇듯이 얼마 후면 그것마저도 시들해진다. 진정한 사랑은 에고가 사라진 사랑이다. 그때는 오직 상대방만을 염려하고,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마음의 문은 언제나 당신에게 열려 있습니다. 당신이 삶에서 무엇을 하든." 이 때의 우리의 마음은 진실하다. 우리는 단지 상대방이 행복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진정한 사랑은 흔치 않다.
자기 비난이 과거의 벽돌 벽을 바라보면서 잘못 놓인 두 장의 어긋난 벽돌만을 보는 것이라면, 두려움은 미래의 벽돌 벽을 바라보면서 잘못 놓이게 될 벽돌만을 보는 것이다. 두려움이 눈을 가리면, 완벽하게 쌓아올려질 나머지 벽돌들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벽 전체를 바라보는 일이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는 수많은 가능성이 있다. 불행한 가능성에 집중할 때, 그것은 두려움이라 불린다. 반면에 다른 가능성들이 훨씬 많음을 기억할 때, 그것은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라 불린다.
두려움은 미래의 잘못될 일들을 예측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불확실한가를 마음속에 간직하기만 해도, 결코 무엇이 잘못될 것인가 예측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두려움은 끝이 난다. 두려움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자각함과 동시에 녹아 없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지혜를 사용하지 않으면, 두려움이 우리를 녹여 없앨 수 있다.
두려움은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이다. 고통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이 바로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벗어던지면 단지 아프다는 감각만이 남는다.
심한 고통에 시달릴 때, "고통이여, 네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하든 내 마음의 문은 너에게 언제나 열려 있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한다. 고통이 원하는 만큼 충분히 머물도록 허락한다. 설령 평생 머물러 있을지라도! 그리고 그거이 더 나빠지더라도 거부하지 않는다. 고통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고통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버렸다. 그것이 바로 내려놓는 것이다. 고통이 머물러 있든 떠나든, 그에게는 아무 차이가 없다. 오직 이때만이 고통은 사라진다.
야생의 코끼리를 자유롭게 풀어 놓으면 마음 내키는 대로 짓밟고 돌아다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속 코끼리를 정복하지 않으면 삶은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생의 문제를 만들어내는 주인공은 다름아닌 이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속 코끼리이다. 깨어 있음의 밧줄로 코끼리를 붙들어 맬 때 문제는 사라진다. 깨어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하면 코끼리는 통제하는 이도 없이 집착과 분노, 욕망과 쾌락 사이를 뛰어다닐 것이다.
화를 내는 것은 영리한 반응이 아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행복하며, 행복한 사람은 화를 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화를 내는 것은 비이성적인 일이다.
화를 내는 대부분의 경우는 기대가 무너진 데서 촉발된다. 우리는 때로 어떤 일에 너무 많이 집착하기 때문에 원하는 결과가 찾아오지 않으면 화를 낸다. 모든 원하는 결과는 미래에 대한 기대이며 예측이다. 지금쯤 우리는 미래가 불확실하며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 다시 말해 자신이 원하는 결과에 너무 의존하는 것은 많은 문제를 불러온다.
분노를 먹고 사는 악마 화를 내면 상황은 더 나빠진다. 고통 역시 '분노를 먹고 사는 악마' 이다. 분노는 관계를 파괴하고 우리를 주위 사람들로부터 갈라놓는다. 외톨이가 되기 원한다면 자주 화를 내라.
갈 곳이 아무데도 없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달아나는 대신 문제와 마주한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우리가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려고 하기 때문에 그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 전보다 훨씬 더 가까이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야만 한다. 달아날 곳은 없다. 더 이상 중요한 갈등들을 외면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마음속 그 분노에 찬 코끼리를 강제로 제압하려 하지 말고, 그 대신 자비의 마음을 사용하라. "사랑하는 나의 미친 마음이여, 네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하든 내 마음의 문은 너에게 활짝 열려 있다. 안으로 들어오라. 네가 나를 파괴하고 파멸에 이르게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너에게 어떠한 나쁜 마음도 갖고 있지 않다. 나의 마음이여,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당신이 미친 마음과 싸우는 대신, 그 마음을 평화롭게 대하라. 그 자비의 힘은 너무도 크기 때문에 놀라울 정도로 짧은 시간에 마음은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온순하게 그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때 당신은 부드럽게 그 마음을 토닥이며 말한다. "그래, 내 마음이여. 그래, 내가 다 안다."
시장을 지나갈 때 코끼리는 쉴 새 없이 코를 흔들어 진열된 물건을 쓰러뜨리거나 아무거나 집어서 입으로 가져간다. 노련한 조련사는 이때 코끼리의 코에 대나무 막대기 하나를 쥐어 준다. 막대기를 받아 쥔 코끼리는 그것을 꽉 잡고 가느라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다. 마음 역시 이런저런 생각으로 움직이지만 참다운 자신을 놓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어떤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칭찬해 주고 긍정적으로 키워 주지 않으면 좋은 것이라도 해도 오래지 않아 시들어 버리고 소멸해 버린다. 하지만 약간의 칭찬만으로도 큰 격려가 된다. 인간 모두는 칭찬 듣기를 원한다. 단지 칭찬을 듣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를 뿐이다. 칭찬은 돈을 절약하게 하고, 우리의 관계를 풍요롭게 하며, 행복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그것을 주위에 더 많이 전파시킬 필요가 있다. 칭찬을 해주기가 가장 어려운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은 자만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나는 어려서부터 배웠다.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는 마음이 큰 사람이다.
절망은 우리 모두가 통과해야만 하는 감옥이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상황을 견뎌내게 도와준다. 그것은 또한 절망의 가장 큰 원인인, 행복한 시기를 너무도 자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버리게 해준다.
당신이 해변에서 친구와 함께 멋진 오후를 보냈다고 상상해 보자.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당신은 한 트럭 분랴의 소똥이 당신 집 현관문 바로 앞에 쏟아 부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한 트럭 분량의 소똥에 대해 알아야 할 세 가지 것이 있다.
첫째, 당신은 그 소똥을 주문하지 않았다.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둘째, 당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누가 소똥을 그곳에 잔뜩 가져다 놓았는지 아무도 목격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신은 그 것을 치우라고 누구에게도 요구할 수도 없다.
셋째, 그 소똥은 불결하고 불쾌하며, 고약한 냄새가 당신의 집안 전체를 채운다. 그것은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다.
이 비유에서, 당신 집 앞의 한 트럭 분량의 소똥은 삶에서 우리에게 쏟아 부어지는 불쾌한 경험들을 상징한다. 한 트럭 분량의 소똥과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비극적인 일들에 대해 알야야 할 세 가지 것이 있다.
첫째, 우리는 그것을 주문하지 않았다. 우리는 말한다. "왜 하필 나인가?"
둘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아무도,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조차도 그것을 가져갈 수 없다. 설령 그들이 그렇게 하려고 시도할지 몰라도.
셋째, 그것은 대단히 두려운 일이며, 우리의 행복을 파괴한다. 그리고 그것의 고통이 우리의 삶 전체를 채운다. 그것은 거의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다.
한 트럭 분량의 소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반응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 번째 방식은 소똥을 늘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소똥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부정적인 마음, 다시 말해 분노와 좌절 등에 빠지는 것의 은유다. 그것은 불행한 환경에 처했을 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자연스럽고 이해할 만한 반응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결과로 많은 친구들을 잃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 심한 좌절에 빠져 있을 때 친구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자연스럽고 이해할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똥 더미는 줄어들지 않으며, 오히려 발효가 될수록 더 나쁜 냄새가 난다.
다행히도 두 번째 방식이 있다. 우리 앞에 한 트럭 분량의 소똥이 쏟아 부어질 때, 우리는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작업을 시작한다. 외바퀴손수레, 쇠스랑, 갈퀴 등이 동원된다. 소똥을 손수레에 퍼 담고, 그것을 집 뒤로 끌고 가 정원에 파묻는다. 이것은 지치고 힘든 일이지만, 우리는 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때로는 아무리 힘들여 일해도 하루에 반 수레밖에 소똥을 옮기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불평하면서 절망속으로 걸어들어가기보다는 문제에 대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날마다 조금씩 우리는 소똥을 퍼 나른다. 소똥 더미는 날마다 줄어든다. 때로는 여러 해가 걸린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아침이 오고야 만다. 우리 집 앞의 소똥이 모두 사라진 거을 우리 자신이 보게 되는 아침이. 나아가 우리 집의 다른 장소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아름다운 꽃들이 풍성한 색채로 정원을 온통 뒤덮으면서 만발한다. 꽃들의 향기가 길 아래쪽까지 날아간다. 따라서 이웃들과 지나가는 행인들조차도 기쁨 속에 미소 짓는다. 그런가 하면 정원 구석에 있는 과실수들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가지가 거의 땅에 닿을 정도가 되었다. 그 열매들은 달디달다. 그런 맛을 가진 열매들은 어디서도 살 수 없다. 수확한 열매가 너무 많기 때무에 우리는 그것을 이웃과 나눌 수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 기적의 맛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소똥을 퍼 나르는 것'은 그 비극들을 삶을 위한 거름으로 환영해 맞아들이는 것의 비유다. 그것은 우리가 혼자 해야만 하는 일이다. 여기서는 아무도 우리를 도울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우리 가슴의 정원으로 날마다 퍼 나름으로써 고통의 더미는 점점 줄어든다. 그것은 여러 해가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침은 오고야 만다. 우리가 더 이상 우리의 삶 속에서 고통을 발견할 수 없는 아침이. 그리고 우리 가슴속에서 하나의 기적이 일어난다. 친절의 꽃들이 만발한다. 그리고 그 향기가 우리의 길 아래쪽으로, 이웃에게로, 친구와 심지어 우연히 지나가는 사람에게로 날아간다. 그런가 하면 삶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의 열매가 가득 매달린, 구석에 서 있는 지혜의 나무가 우리를 향해 구부러진다. 우리는 그 맛 좋은 열매들을 전혀 아무런 계획 없이도, 지나가는 행인과도 무료로 나눈다.
우리가 비극적인 고통을 겪고 그것이 가져다준 교훈을 배웠을 때,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의 정원을 가꾸었을 때, 그때 우리는 깊은 비극 속에 있는 다른 사람을 우리의 팔로 껴안을 수 있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할 수 있다. "그래요, 나도 압니다." 그들은 우리가 진심으로 이해한다는것을 깨닫는다. 자비가 시작된다. 우리는 그들에게 외바퀴손수레와 쇠스랑과 갈퀴를, 그리고 끝없는 격려를 보여준다. 만일 우리가 아직 우리 자신의 정원을 가꾸지 않았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비교적 평단한 삶을 살아왔으며, 퍼 나를 소똥이 많지 않았던 그 수행승들은 위대한 스승이 될 수 없었다. 위대한 스승이 된 사람들은 실로 크나큰 시련을 겪으면서 묵묵히 그것들을 퍼 날랐으며, 풍요로운 내면의 정원을 가꾼 이들이었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수행승들은 지혜와 내적인 고요와 자비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더 많은 소똥을 가졌던 이들은 세상과 나눌 것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이것이다. 만일 당신이 세상에 봉사하기를 원한다면, 만일 자비의 길을 따르고자 원한다면, 다음번에 당신 삶에 비극이 일어날 때, 당신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우와! 내 정원에 뿌릴 거름이 더 많이 생겼군!"
좋은 친구나 상담자는 바닥이 없는 쓰레기통과 같다. 그리고 너무 가득 차서 또 다른 사람의 문제를 들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결코 없다.
세상은 매순간 변화하고 있다. 삶은 하나의 흐름이다. 그는 차를 마시며 자신의 힘을 축적했고, 포위망을 뚫듯이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적당한 시기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시기는 언제나 찾아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 너무도 당연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이것이 당신의 삶을 위험에서 구원해 줄지도 모른다. 물살이 당신보다 더 강할 때, 그때는 물살과 함께 흘러갈 때이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때, 그때가 바로 온 에너지를 쏟아 부을 때이다.
삶에는 항상 예기치 않았던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따라서 꿀을 맛볼 순간들을 놓치지 말라. 가장 절박한 순간이라 할지라도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문제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해결책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삶에서 해결책이 없는, 따라서 문제라고 할 수도 없는 일들을 걱정하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가? 해결책이 있는 문제라면 당연히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에서 중요한 결정들을 어떻게 내리는가? 대다수는 다른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힘든 결정을 내려 주기를 기대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일이 잘못될 때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 무엇인가 잘못되어 갈 때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자기만족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엉덩이가 가려운 사람이 머리를 긁고 있다. 긁어도 긁어도 가려움이 사라지지 않네."자신의 삶의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은 당신의 엉덩이가 가려운데 계속해서 머리를 긁어대는 것과 같다.
톨스토이 단편선집에 실린, 모든 지혜로운 기준을 갖게 될 세가지 질문 1)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지금. 2)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군인가?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사람 3)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보살핌과 배려 소통이라는 것은,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은,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든 그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여길 때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도 그것을 느낀다. 그 사람도 그것을 알고, 그것에 반응한다. 삶에서 당신은 대부분의 시간을 당신 자신과 마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당신 자신에게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당신이 자각하는 최초의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당신 자신이다!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는가? "좋은 아침이야. 멋진 하루를 보내기 바라!" 그리고 잠들기 직전 당신이 자각하는 마지막 사람은 누구인가? 또다시 당신 자신이다! 나는 날마다 나 자시에게 잘 자라고 말한다. 하루 중 많은 개인적인 시간에 나는 나 자신에게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효과를 발휘한다.
부모들의 문제는,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종종 그들의 예측은 빗나간다. 때로는 예측이 맞는 부모도 있다. 거의 천 년 전에 아들의 탄생에 부쳐 다음의 시를 지은 중국의 소동파처럼. 아이가 태어나면 부모는 그 아이가 현명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네. 현명함으로 일생을 그르친 나는 이 아이가 어리석고 무지하기를 바라네. 그러면 장차 정부 관리가 되어 평온한 삶을 누리게 되리니.
우리의 마음 역시 신문 지면을 채우고 있는 것들과 다르지 않은 온갖 잡다한 것들에 점령당해 있다. 관계들 사이의 전쟁, 가정과 직장에서의 정치적인 행동, 큰 불화를 일으키는 개인적인 스캔들, 육체적인 쾌락을 위한 섹스라는 이름의 스포츠 등이 그것이다. 만일 우리가 때때로 그 '마음속 신문'을 내려놓는 법을 모른다면, 만일 그것에 늘 사로잡혀 있고 그것 외에는 다른 것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최상의 자연이 주는 때 묻지 않은 기쁨과 평화를 결코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지혜는 배움이 아니라, 결코 가르칠 수 없는 것을 분명하게 보는 것이다. 마음은 눈이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 제공되는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다. 또한 마음은 눈이 결코 볼 수 없는 소리까지도 알며, 실제로 존재하거나 꿈으로만 존재하는 것까지도 만질 수 있다. 마음은 나아가 오감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도 알 수 있다. 인간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마음 안에 들어가기 때문에 마음은 세상에서 가장 큰 것임에 틀림없다. 마음은 모든 것을 담는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으며,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 동양의 격언
어떤 장소든 당신이 그곳에 있기를 원치 않는다면, 아무리 안락하더라도 당신에게는 그곳이 감옥이다. 이것이 '감옥'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다. 만일 당신의 직업이 당신이 원치 않는 것이라면, 그때 당신은 감옥에 있는 것이다. 자신이 원치 않는 관계 속에 있다면, 당신은 감옥에 있는 것이다. 병들고 고통스런 육체 속에 있는데 그것을 원치 않는 다면, 그것 역시 당신에게는 감옥이다. 자유는 당신이 지금 있는 자리에 만족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이지, 욕망의 자유가 아니다.
우리 모두 삶의 어느 순간 우리들 각자의 내면에 있는 영적인 피라미드를 올라갈 수 있는 시간과 평화를 우리 자신에게 허용할 필요가 있다. 아주 잠깐 동안이라도 삶이라고 하는 이 복잡하게 뒤엉킨 정글 위로 올라가 보아야만 하다. 그때 우리는 사물들 속의 자신의 위치를 보게 되고, 우리 삶의 여행을 멀리까지 내다보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든 방향에서 우리 존재를 에워싸고 있는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무한 세계를 응시하게 될지도 모른다.
왜 우리는 만족스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힘들게 일해서 부자가 되어야만 한다고 믿는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욕망의 자유이고, 또 하나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이다. 현대 서구 문화는 첫 번째 자유, 곧 욕망의 자유만을 인정한다. 그러한 자유를 국가 헌법이나 인간 권리 헌장 맨 앞에 모셔두고 숭배한다. 서구 민주주의의 근본 신조는 법이 허용하는 한 최대로 국민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자유를 보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라들에 사는 국민들이 그다지 자유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두 번째 자유, 곧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는 몇몇 종교적인 공동체 안에서만 찬미를 받는다. 그들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오는 만족과 평화를 궁극의 목표로 삼는다. 내가 머물고 있는 절처럼 금욕적인 공동체에 사는 사람들이 훨씬 더 자유롭게 느껴지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우리들 각자는 삶의 표현이다. 삶은 친절한 스승이면서 동시에 가혹한 스승이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이 스승을 찾기 위해 어떤 특별한 장소에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삶을 경험한다는 것은 수많은 타인들을 거쳐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것이다. 자신을 잊는 것은 곧 주위 모든 존재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나무, 별, 고양이, 사람, 꿈과 소망을 가진 모든 존재, 웃음과 눈물을 가진 모든 존재와 하나가 되는 길이다.
마음을 내려놓고 삶과 죽음에 대해 명상하는 것은 다른 어떤 일보다 중요하다. 명상은 우리가 가진 재산, 우리의 인간관계, 아이들, 자동차, 소유물보다 더 중요하다. 재물을 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들은 당신이 죽을 때 모두 사라진다.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은 결국 좌절을 가져온다. 아무리 많은 기쁨을 가진다 해도, 그것들은 노년의 안개 속에 사라진다. 나이 듦에 따라 알아야 할 것 중 하나는, 삶의 쾌락이 일찍 올수록 마지막에 남는 것은 고통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무 많은 생각을 한다. 만일 그들이 조금이라도 생각을 고요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들의 삶은 훨씬 더 쉽고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이다.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일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다.
가난할 때 우리는 잘사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하지만 부자들 중 많은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진실한 우정과 온갖 의무로부터의 자유를 부러워한다. 부자가 되는 것은 단지 '가난한 자의 고통'을 '부유한 자의 고통'과 바꾸는 것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수입이 끊어지는 것은 '부자의 고통'을 '가난한 자의 고통'과 교환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다. 불쌍한 나, 운 좋은 그들! 다른 무엇이 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상에 불과할 뿐이다. 다른 무엇이 되는 것은 단지 한 가지 형태의 고통을 또 다른 형태의 고통과 맞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결혼을 했든 독신이든, 부자든 가난하든, 신참이든 고참이든 지금의 당신에 만족할 때, 그때 당신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운좋은 나, 불쌍한 그들!
슬픔은 당신으로부터 사라진 것만을 보는 것이다. 반면에 삶의 축제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느끼는 것이다.
인생에서 큰 성공을 거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네 명의 아내를 거느리고 살았다. 마지막 눈을 감을 시간이 다가오자, 그는 곁으로 가장 젊고 최근에 얻은 네 번째 아내를 불렀다. 그는 그녀의 소문난 몸매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여보, 난 아무래도 오늘이나 내일 죽을 것 같소, 저 세상에서 당신이 없으면 난 무척 외로울 것 같아. 나와 함께 가지 않겠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그 빼어난 미모의 젊은 아내가 말했다. "난 여기에 남아야 해요. 당신의 장례식 때 당신을 위해 멋진 고별사를 하겠지만, 그 이상은 안돼요." 그러면서 그녀는 방을 나가 버렸다. 그녀의 차가운 거절은 그의 가슴에 단검처럼 꽂혔다. 그는 그 젊은 아내에게 실로 많은 애정을 기울였었다. 중요한 행사 때마다 그녀를 데리고 나타나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그녀는 그의 늙은 나이에 위엄을 더해 주었다. 그가 그토록 그녀를 사랑했는데,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큰 충격이었다. 그래도 그에게는 아직 세 명의 아내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중년의 나이였을 때 결혼한 세 번째 아내를 불렀다. 그는 이 세 번째 아내를 손에 넣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였었다. 그는 많은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그녀를 깊이 사랑했다. 그녀는 매우 매력적인 여성이었으며 숱한 남자들이 그녀를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에게만 충실했다. 그녀는 그에게 믿음과 안정감을 주었다. 그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나서 말했다. "사랑하는 이여, 나는 하루나 이틀 후면 죽을 것 같소. 죽어서 저세상에 갔을 때 당신이 없으면 무척 외로울 것이오. 나와 함께 가주겠소?" "절대로 안 돼요!" 그 매혹적인 젊은 여인은 사무적인 태도로 잘라 말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당신을 위해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주겠어요. 하지만 장례식 뒤에는 당신의 아들들을 따라가겠어요." 세 번째 아내의 배신은 그를 뼛속까지 뒤흔들었다. 그는 그녀를 내보내고 두 번째 아내를 불렀다. 그는 두 번째 아내와 함께 성장했다. 그녀는 그다지 매력적인 여성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그의 곁에 어떤 문제가 있을 때마다 매우 귀중한 조언들을 해주었다. 그녀는 그의 가장 신뢰할 만한 친구였다. 그는 확신에 찬 눈으로 두 번째 아내를 쳐다보며 말했다. "사랑하는 아내여, 하루나 이틀만 지나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거요. 저세상에서 당신이 없으면 난 외로울 것이오. 나와 함께 가 주겠소?" 그녀는 미안해하며 말했다. "죄송해요. 난 당신과 함께 갈 수 없어요. 당신의 무덤이 있는 곳까지는 따라가겠지만, 그 이상은 갈 수 없어요." 남자는 망연자실해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첫 번째 아내를 불렀다. 그녀는 그가 영원의 세월 동안 알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서는 그녀를 무시한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 유횩적인 세 번째 아내나 미모가 빼어난 네 번째 아내를 맞이하고부터는. 하지만 그에게 진실로 중요한 사람은 첫 번째 아내였다. 그녀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일했다. 볼품없는 옷을 입고 몸까지 여윈 첫 번째 아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는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오늘이나 내일이면 내 목숨이 다할 거요. 저세상에 갔을 때 당신이 없으면 난 외로울 거요. 나와 함께 가주겠소?"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히 당신과 함께 갈 거예요. 나는 생이 바뀌어도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을 거예요." 이 첫 번째 아내는 '카르마(업)'이다. 두 번째 아내는 '가족'이고, 세 번째 아내는 '재산'이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아내는 '명성'이다. 이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어 보기 바란다. 이제 당신은 네 명의 아내를 알게 되었다. 그 아내들 중 단신이 가장 관심을 기울여 돌봐야 할 아내가 누구인가? 당신이 죽을 때 그들 중 누가 당신을 따라 가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걸 원치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만으로 고민할 거리가 충분하지 않으면 텔레비전 드라마라도 보면서 상상 속 인물들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다. 많은 이들이 고민과 고통을 자극으로 받아들인다. 고통을 즐기기까지 한다. 그들은 행복해지기를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문제에 너무 집착해 있기 때문이다.
1박2일 택배 주문이라 횟감으로 어떨지 고민했으나 전어무침용으로는 괜찮은듯 보여 텃밭 야채넣고 무침과 전어구이, 그리고 오랜만에 태임씨 막걸리를 곁들이니 잘어울리는 마리아주!
그리고 8월 제철 전복. 페이스북 인어교주해적단의 전복광고를 보고 근호씨, 태임씨 백신 2차 접종마치고 보양식으로 괜찮겠다 싶어 바로 주문하는데 사이즈별 가격이 천차만별. 구이로도 먹으려면 그래도 너무 작으면 손질도 어렵다는 이여사님 의견을 반영해 킬로에 11-12마리로 당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