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영원을 기대하지만 찰나의 순간, 시는 응축된 표현 속에 수많은 감정과 진리를 경험하게 한다.
[본문발췌]
시의 힘은 세상과 사물에 대해 눈을 뜨게 한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뜨는 데 있다.
예술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지는 인간 활동이다. 한 사람이 어떤 기호를 통해 자신의 삶에서 느낀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거기에 감염된 사람들은 같은 감정을 체험한다. - 톨스토이
"눈은 생의 아름다움과 삶이 짧다는 느낌을 불러일으켰고, 모든 적의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서로 닮아 있으며, 우주와 시간은 무한하지만 세계는 좁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눈이 오면 사람들은 서로를 끌어안는다." - 오르한 파묵 <눈>
시인은 시간의 정원에서 사색하는 철학자이며 시는 '사라지는 것들에 바침'이다. 새로이 소생하는 것들의 경이로움, 계절과 함께 사라지는 것들의 애잔함, 끝없이 순환하는 시간, 단순하지만 미로처럼 보이는 그것들을 시인은 응시한다. 불가사의하게도 어떤 질문은 답을 찾을 수 없다. 인생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물으면 이슬과 같은 것이라고 답하라고 잇사는 말한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고 한평생,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의미와 감미를 모아야 한다. 그러면 마지막에 열 줄의 훌륭한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새들이 어떻게 나는지 느껴야 하며, 작은 꽃들이 아침에 피어날 때 어떤 몸짓을 하는지 알아야 한다. 시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감정이 아니고 경험이기 때문이다. 시는 알지 못하는 곳에 난길, 뜻밖의 만남이다." - 릴케 <말테의 수기>
인간은 '호모비아토르' 라고 하는데 '떠도는 사람'. '길 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아 스스로 떠나는 존재를 가리킨다. 호모 비아토르는 길 위에 있을 때 아름답다. 꿈과 열정을 잃고 현실과 타협하며 남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삶은 비루해진다. 집을 떠나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가진 사람만이 성장해서 돌아온다. 신영복은 '부딪치는 모든 것을 배우고 만나는 모든 것과 소통하며 끝없이 변화하는 것'이 길 가는 사람의 자세라고 했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짧은 봄날이 마치 무한히 지속되기라도 하듯, 싹은 서두르거나 허둥대는 일없이 천천히 부풀어 오른다.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 언제나 변함없는 고르디 고른 곡조의 그 울음소리는 지금의 시간을 영원으로 여기라는 충고이다." - 소로우, 자연은 순환하며 순환의 과정에 이별이란 없다.
인간의 궤적은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를 반복한다. 나무가 자라듯이 밖으로 성장하는 고통이 있고, 나이테처럼 안으로 응축되는 고통이 있다. 한 편이 예술 작품을 탄생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성장했다는 의미이다.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성장은 없다.
뛰어난 하이쿠는 영원한 것과 순간적인 것을 동시에 표현한다. 어떤 것은 영원처럼 보여 아름답지만 실제로는 순간을 머무는 것이기에 그 아름다움이 절실하다. 설령 영원한 것이라 하지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은 찰나를 살 뿐이다.
"시인은 인간의 본성을 깊이 알고, 예민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다. 그에게는 두드러진 특성이 있다.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치 어떤 것을 보듯 마음을 움직인다." - 윌리엄 워즈워스
R. H. 블라이스 "하이쿠는 짧은 시 속에 섬광처럼 지나가는 삶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을 담고 있다." 롤랑 바르트는 <기호의 제국>에서 "글쓰기는 깨달음이다."라고 전제한다. 그러면서 하이쿠를 가리켜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는 독특한 성격의 문학'이라고 정의한다.그 뒤에 첨언하면 하이쿠는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말하는 문학이다.'
긴 말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쉽다. 시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매개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 주려는 노력이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 시를 창조한 시인의 언어와 그 언어에 담긴 의미를 읽는 것만이 아니라, 독자 스스로 그 언어에 자신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라는 말이 가장 정확하게 해당하는 장르가 하이쿠이다.
칠레 시인 빈센테 우이도브로는 <시학>에서 쓴다. '시가 열쇠가 되기를 / 수많은 문을 열 수 있기를 /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은 무언가가 날아가는 것'
중국의 왕부지는 "작가는 한 가지 생각으로 쓰고, 독자는 각자의 감정에 따라 이해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말했다. "창조는 독자에게서 완성된다. 예술가는 자신이 시작한 일을 완성하는 배려를 타인에게 맡겨야만 하며, 자기 자신을 작품의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떠나는 내게 머무는 그대에게 가을이 두 개 - 시키
이 숯도 한때는 흰 눈이 얹힌 나무가지였겠지 - 다다토모
오두막의 봄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게 있다 - 소도
손바닥 안의 반딧불이 한 마리 그 차가운 빛 - 시키
외로움에 꽃을 피웠나 보다 산벚나무 - 부손
나의 별은 어디서 노숙하는가 은하수 - 잇사
날이 밝으면 반딧불이도 한낱 벌레일 뿐 - 아온
손바닥에서 슬프게도 불 꺼진 반딧불이여 - 교라
문을 나서면 나도 길 떠나는 사람 가을 저물녘 국화 키우는 그대는 국화의 노예여라 가엾은 민들레 꽃대가 부러져서 젖이 흐르네 재 속의 숯불 숨어 있는 내 집도 눈에 파묻혀 쇠못 같은 앙상한 팔다리에 가을 찬 바람 - 잇사
저녁 제비여 나에게는 내일도 갈 곳 없어라 새끼 참새야 저리 비켜 저리 비켜 말님 지나가신다 나무 아래 나비와 머무는 것도 전생의 인연 고향에는 부처 얼굴을 한 달팽이들 달팽이가 머리를 쳐드니 나를 닮았네 - 시키
나팔꽃 덩쿨에 두레박줄 빼앗겨 얻어 마신물 손으로 꺾는 이에게 향기를 주는 매화꽃 저 나비 무슨 꿈을 꾸길래 날개를 파닥이나 줍는 것마다 모두 다 움직인다 물 빠진 갯벌 잠자리 잡으러 오늘은 어디에서 헤매고 있니 굴러떨어지면 그저 그런 물일 뿐 잇꽃의 이슬 강물에서만 어둠이 흘러가는 반딧불이여 가을 밝은 달 아무리 가도 가도 딴 곳의 하늘 모자 멀어져 나비가 될 때까지 그리워하네 동틀 녘이면 어제의 반딧불이 둔 곳을 잊어 썰물에 발끝으로 서 있는 나비여라 백 개의 열매 덩굴 한 줄기의 마음으로부터 보름달 뜬 밤 돌 위에 나가 우는 귀뚜라미 붉은색 바른 입술도 잊어버린 샘물이어라 어찌 되었든 바람에 맡겨 두라 마른 억새꽃 물 시원하고 반딧불이 사라져 아무도 없네 나무 뒤에 숨어 찻잎 따는 이도 듣는가 두견새 울음 - 바쇼
조만간 죽을 기색 보이지 않는 매미 소리 이 가을에는 어찌 이리 늙는가 구름 속의 새 흰 이슬의 외로운 맛을 잊지 말라 한겨울 칩거 다시 기대려 하네 이 기둥 가는 봄이여 머뭇거리며 피는 철 늦은 벚꽃 - 부손
이 세상은 지옥 위에서 하는 꽃구경이어라 첫 반딧불이 왜 되돌아가니 나야 나 가지 마 가지 마 모두 거짓 초대야 첫 반딧불이 가을 바람 속 꺽고 싶어 하던 붉은 꽃 이슬의 세상은 이슬의 세상이지만 그렇지만 손을 마구 휘둘러도 나비는 닿을 듯 닿지 않네 - 세이손
감정에 충실해야 현재에서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나 주변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기준을 따라 자유롭고 당당해져야만 한다.
[본문발췌]
"우리들은 정신이 큰 변화를 받아서 때로는 한층 큰 완전성으로, 때로는 한층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정념(passiones)은 우리에게 기쁨(laetitia)과 슬픔(tristitia)의 감정을 설명해 준다." - 스피노자, <에티카>
비루함(ABJECTIO) :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노예의식, <무무> 이반 투르게네프, "비루함이란 슬픔 때문에 자기에 대해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이다"
자긍심(ACQUIESCENTIA IN SE IPSO) : 사랑이 만드는 아름다운 기적, <정체성> 밀란 쿤테라, "자긍심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 능력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자긍심을 회복할 수 있다. 내 자신이 충분히 소중하고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타인이 나를 사랑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겠는가.
사랑(AMOR) : 자신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힘, <동풍서풍> 펄 벅, "사랑이란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이다." 사랑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기쁨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기쁨의 감정은 "인간이 더욱 작은 완전성에서 더욱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결여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욱 충만해진다는 감정이 바로 기쁨이다. 기쁨이라는 감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사랑에는 외부 원인이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대담함(AUDACIA) : 나약한 사람을 용사로 만드는 비밀, <1984> 조지 오웰, "대담함이란 동료가 맞서기 두려워하는 위험을 무릎쓰고 어떤 일을 하도록 자극되는 욕망이다." 대담함을 욕망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스피노자의 비범함을 발견하게 된다. 욕망이란 기본적으로 기쁨의 증진을 도모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사랑만큼 살아갈 힘과 기쁨을 증폭시키는 경험이 또 있을까?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모색했던 것도 바로 사랑의 파괴력, 그러니까 압도적인 힘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대담함이라는 감정이었다. 오직 위기를 감내하려고 할 때에만 용기와 대담함은 빛을 발한다.
탐욕(AVARITIA) : 사랑마저 집어삼키는 괴물,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탐욕이란 부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이자 사랑이다." 돈에 대한 갈망은 집요한 것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회체제 아닌가. 이제 돈은 원하는 것을 구하기 위한 단순한 결제 수단이 아니라 절대적인 수단이 된 것이다. 절대적인 수단은 동시에 절대적인 목적이기도 하다. 돈에 대한 갈망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있을까? 그것은 나름대로 최적생계비를 생각하며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을 목적의 자리가 아니라 원래 자리, 그러니까 수단의자리로 만들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 돈은 여행을 가려고, 맛난 음식을 먹으려고, 혹은 멋진 옷을 사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돈은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부드럽게 해주는 윤활유다. 바로 이것이다. 돈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있다. 최적생계비를 계산하고, 그것을 삶에 관철하는 것이다. "됐어. 이 정도면 됐어. 이제 삶과 사랑을 향유해야지." 갈망에서 자유로워지는 첫걸음은 이렇게 내딛는 것이다.
박애(BENEVOLENTIA) : 공동체 의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 <레 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박애란 우리가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친절하려고 하는 욕망이다." 사랑의 원리는 무소유의 원리를 토대로 한다. 겨울 찬바람에 사랑하는 사람이 떨고 있다면 기꺼이 추위를 무릅쓰고 자신의 옷을 벗어 줄 것이다. 이럴 때 두 사람은 최소한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공동체의 범위는 자신이 가진 것을 어디까지 나누어주느냐에 의해 측정될 수 있다. '자발적인 가난', 이것이 바로 박애가 드러나는 행동 양식이다.
연민(COMMISERATIO) : 타인에게 사랑이라는 착각을 만들 수도 있는 치명적인 함정, <초조한 마음> 슈테판 츠바이크, "연민이란 자신과 비슷하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타인에게 일어난 해악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타인의 불행에서 생기는 슬픔.
물은 꿈처럼 헛된, 사라지게 될 운명만을 암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존재의 실체를 변화시키는, 근원적인 운명의 전형이다. -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에서
욕망(CUPIDITAS) : 모든 감정에 숨겨져 있는 동반자, <프랑스 중위의 여자> 존 파울즈, "욕망이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감정(affectione)에 따라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essentia) 자체이다. 욕망은 자신의 의식(conscientia)을 동반하는 추동(appetitus)이고, 충동은 인간의 본질이 자신의 유지에 이익이 되는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동경(DESIDERIUM) : 한때의 기쁨을 영속시키려는 서글픈 시도, <아우라> 카를로스 푸엔테스, "동경이란 어떤 사물을 소유하려는 욕망 또는 충동이다. 우리가 자신을 어떤 종류의 기쁨으로 자극하는 사물을 회상할 때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같은 기쁨을 가지고 그것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도록 노력한다. 그러나 이 노력은 그 사물이 있다는 것을 배제하는 사물의 이미지에 의하여 곧 방해받는다."
절망(DESPERATIO) :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는 치명적인 장벽,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절망이란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슬픔이다. 공포에서 절망이 생긴다." 희미하게 흔들리던 촛불처럼 존재하던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절망이 찾아온다. 미래에 대한 어설픈 기대, 혹은 불안한 희망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렇게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절망은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보다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에게 더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다.
호의(FAVOR) : 결코 사랑일 수 없는 사랑,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호의란 타인에게 친절을 베푼 어떤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영광(GLORIA) : 모든 이의 선망으로 타오르는 위엄,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영광은 우리가 타인이 칭찬할 거라고 상상하는 우리 자신의 어떤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 그렇지만 영광을 추구하는 이면에는 다른 사람에게 당할 멸시나 경멸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권력이나 자본이 항상 상벌의 논리로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것도 우리에게 영광을 추구하고 치욕을 멀리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 커다란 고독이 닥쳐오고 완벽한 정적에 휩싸이면, 몽상가의 마음에도 불꽃의 핵심에도 같은 평화가 존재한다. 그때 불꽃은 자신의 형태를 지키며 확고한 사상처럼 수직성의 운명을 향해 똑바로 내닫는다. - 가스통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에서
감사(GRATIA)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품고 친절을 베풀 수밖에 없는 서러움, <거미여인의 키스> 마누엘 푸익, "감사 또는 사은(gratitudo)은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우리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친절하고자 하는 욕망 또는 사랑의 노력이다."
겸손(HUMILITAS) : 진정한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에밀 졸라, "겸손이란 인간이 자기의 무능과 약함을 고찰하는 데서 생기는 슬픔이다."
분노(INDIGNATIO) : 수치심이 잔인한 행동일 될 때까지,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분노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친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이다."
질투(INVIDIA) : 사랑이 드리우는 짙은 그림자, <질투> 알랭 로브그리예, "질투란 타인의 행복을 슬퍼하고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미움이다."
두려움(METUS) : 과거가 불행한 자의 숙명, <유령> 헨리크 입센, "두려움이란 우리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 또는 과거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비연속적인 슬픔이다." 불행한 과거는 과거지사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와 미래의 삶에도 질식할 것 같은 무게를 가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꿈꾸는 동물이다. 그러니 과거가 행복한 사람은 미래를 장밋빛으로, 과거가 불행한 사람은 미래를 잿빛으로 꿈꾸게 된다. 과거의 아픈 기억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염려! 두려움을 극복하고 현재의 삶을 향유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벼움을 확보하는 것이다. 지금 가진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정(MISERICORDIA) : 비참함이 비참함에 바치는 애잔한 헌사, <티파니에서 아침을> 트루먼 커포티, "동정이란 타인의 행복을 기뻐하고 또 반대로 타인의 불행을 슬퍼하도록 인간을 자극하는 한에서의 사랑이다." 삶이 너무나 궁핍하고 남루하면 우리는 그 현실을 도피하기 우해 근사한 꿈을 꾼다. 니체의 말대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의 자화상이다. 누군가가 꾸고 있는 현실 도피의 꿈을 응시해 보면, 역설적으로 그가 도피하려고 하는 현실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직감할 수 있다.
공손(AVERSIO) : 무서운 타자에게 보내는 친절, <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공손함(humanitas)이나 온건함(modestia)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은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려는 욕망이다." 온건한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타인을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에 대한 공포가 드리우고 있는 짙은 그늘이 있다. 말 잘 듣는 아이는 그 공포감으로 인해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 첫째 부류는 모든 사람에게서 온화하다고 칭찬이 자자한 사람이다. 두 번째 부류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악당이라고 지탄받는 사람이다. 세 번째 부류는 칭찬도 받고 욕도 먹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에게 욕을 먹는 두 번째 부류의 인간은 그냥 쓰레기니까 조심하면 된다. 반면 진짜로 위험한 것은 첫 번째 부류의 인간들이다. 억압된 욕망을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폭발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공손하고 온화한 사람을 조심하라!
미움(ODIUM) : 내가 파괴되거나 네가 파괴도거나, <피아노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 "미움이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
역동적 상상력 속에서는 모든 것이 활기를 띠고 그 무엇도 멈추지 않는다. 운동이 존재를 창조하며 소용돌이치는 대기는 별들을 창조하고, 외침은 이미지를 낳고, 외침은 말을, 생각을 준다. - 가스통 바슐라르, <공기와 꿈> 에서
후회(POENITENTIA) :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나약함, <캐스터브리지의 읍장> 토머스 하디, "후회란 우리가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으로 했다고 믿는 어떤 행위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
겁(PUSILLANIMITAS) : 실패를 예감하는 위축된 자의식, <여명>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겁남은 동료가 감히 맞서는 위험을 두려워하여 자기의 욕망을 방해당하는 그런 사람에 대해 언급된다." 미래에 벌어질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일에 대한 공포, 이것이 바로 겁이라는 감정의 정체다. 그러니까 겁이 많은 사람은 미래의 불행에 미리 젖어 현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돌보지 않게 된다. 한마디로 겁이 많은 사람은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결국 겁이라는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현재 자신의 욕망에 몰입하고 그것을 관철시키려는 자세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희망(SPES) : 불확실해서 더 절절한 기다림, <위대한 유산> 찰스 디킨스, "희망은 우리들이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나 과거의 사물의 관념에서 생기는 불확실한 기쁨(inconstans laetitia)이다." 인간의 희망은 여전히 사람 그 자체를 향해야만 한다. 속물은 속물을 만나고, 진지한 사람은 진지한 사람을 만나는 법이다. 이것은 불확실성을 내포하는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경험이 쌓이면 누구나 확실히 알게 되는 삶의 진리가 아닌지.
오만(SUPERBIA) : 사랑을 좀먹는 파괴적인 암세포, <위험한 관계>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 "오만이란 자신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정당한 것 이상으로 느끼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의 동의어는 '알려고 한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모든 것을 알았다는 오만에 빠지는 순간, 그래서 더 이상 알 것이 없다는 오만이 생기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소심함(TIMOR) : 작은 불행을 선택하는 비극,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 사강, "소심함은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큰 악을 더 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이다."
쾌감(TITILLATIO) : 포기할 수 없는 허무한 찬란함, <도나 플로르와 그녀의 두 남편> 조르지 아마두,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되는 기쁨의 정서를 쾌감이나 유쾌함(hilaritas)이라고 한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시간이 존재한다. 하나는 지속이란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순간이란 시간이다. 지속은 우리에게 예측 가능한 시간을 주면서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안겨 준다. 반면 순간은 첫 만남처럼 과거 자신의 안정적인 모습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위험한 시간이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를 보자마자 인생이 앞으로 완전히 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그래서 결코 과거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고 느낄 때, 바로 그때가 '순간'인 셈이다. 완전한 기쁨은, 몸이나 마음 중 어느 하나를 희생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기쁨으로 충만할 때,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이 쾌감으로 전율할 때, 바로 그 시간이 우리가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이다.
슬픔(TRISTITIA) : 비극을 예감하는 둔탁한 무거움, <미국의 비극> 시어도어 드라이저, "슬픔은 인간이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부와 사랑, 둘 중에 어느 것이 기쁨을 주고 어느 것이 슬픔을 주는지가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두가지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자본주의 자체가 바로 슬픔의 기원이라는 통찰일 테니까 말이다. 타자와의 마주침이 없다면 감정도 존재할 수 없다. 타자를 만나서 삶이 충만해진다고 느낄 때의 감정이 기쁨이라면, 슬픔은 그와 반대로 타자를 만나서 삶의 충만함이 훼손된다고 느낄 때의 감정이다.
수치심(VERECUNDIA) : 마비된 삶을 깨우는 마지막 보루, <더블린 사람들> 제임스 조이스, "치욕(pudor)이란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행위에 수반되는 슬픔이다. 반면 수치심이란 치욕에 대한 공포나 소심함이고 추한 행위를 범하지 않도록 인간을 억제하는 것이다." 수치심은 앞으로 치욕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이나 소심함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수치심을 느낄 때에 비로소 우린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언행을 반성하게 된다. 그러니 마비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는 수치심을 찾아보기 힘들다.
<에필로그> '선과 악(Good and Evil)'을 넘어. 이것은 적어도 '좋음과 나쁨(good and bad)'을 넘어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프리드리히 니체
사랑의 감정은 바로 우리를 현재에 살도록 하고, 안전한 삶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미래에 살도록 만든다. 안전한 삶을 위해 현재의 열정적인 감정을 교살하는 삶,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절대 그럴 수 없다. 왜냐고? 지금은 미래로 보이는 때도 언젠가 우리에게 현재로 다가올 테니까. 그렇게 우리는 이미 현재가 된 미래에서도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순간'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래에 더 큰 가치를 두느라 현재를 부정하는 삶이 이르게 되는 종착역은 바로 죽음이다. 이것은 유한한 삶의 진실이다. 그러니 현재 누려야 할 행복과 기쁨을 미래로 미루지 말라!
감정은 우리 삶의 속도만큼 충분히 지속적이다. 그러니 감정의 색채를 믿고 따르라! 자신의 심장 소리와 함께 지속되는 그 감정의 목소리르 존중하라! 그것만이 당신이 현재에서 충만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물론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은 주변의 평가에서 자유롭고 당당해져야만 한다.
감정을 순간적으로 저주하면서 현재를 부정하는 사람들, 그래서 현재에 살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행동 준칙은 '선(Good)과 악(Evil)'이다. 반면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목소리에 충실한 사람들이 따르는 행동 준칙은 '좋은(good)과 나쁨(bad)'이다. 돌이켜 보면 경제적인 이유로 사랑하는 남자를 포기한 여성은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아니라 '선과 악'의 기준을 따른 것이다. 여러 가지로 무능력해 보이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 그것은 자본주의 공동체의 가치를 수용하고 있는 부모나 친구들에게는 악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그 여자의 감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간단히 말해 '선과 악'이 대다수 공동체 성원들이 내리는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면, '좋음과 나쁨'은 다른 누구의 판단이나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 내리는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 니체가 선과 악에 'Good'과 'Evil'이란 대문자를 사용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선과 악은 사회의 안전이나 통념을 위해 어떤 개인이라도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규범을 상징하니까. 반면 니체는 좋음과 나쁨에 'good'과 'bad'라는 소문자를 붙인다. 사람마다 좋음과 나쁨의 기준이 다르고 동시에 좋음과 나쁨의 내용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우선 선과 악이라는 규범을 버리고 좋음과 나쁨이라는 자기만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단지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대상이 삶을 향한 의지를 강화시켜 준다면, 다시 말해 내 삶에 경쾌함을 준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반대로 삶을 향한 의지를 약화시켜 내 삶을 우울하고 무겁게 만든다면, 그것은 '나쁜'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감정을 따르지 않는다면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진실을. 비극이 발생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뒤흔드는 다양한 감정들에 너무나 서툴렀다는 데 있다. 두 번째 이유로 발생하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 지금 자신을 휘감고 있는 감정이 슬픈 것인지 아니면 기쁜 것인지 정확히 식별할 수 있어야만 한다.
What this means is that in good times, investors obsess about the positives, ignore the negatives, and interpret things favorably. Then, when the pendulum swings, they do the opposite, with dramatic effects.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좋은 시기에 투자자들은 긍정적인 것에 집착하고, 부정적인 것은 무시하고, 사물을 호의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진자가 흔들리면 그들은 극적인 효과를 내며 그 반대로 행동합니다.
The non-inear nature of this process suggests something very different from rationality is at work. In particular, as in many other aspects of life, cognitive dissonance plays a big part in investors’ psyches. The human brain is wired to ignore or reject incoming data that is at odds with prior beliefs, and investors are particularly good at this. 이 과정의 비선형적 특성은 합리성과는 매우 다른 것이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특히, 삶의 다른 많은 측면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지적 불협화음은 투자자의 정신에서 큰 역할을 합니다. 인간의 뇌는 사전 신념과 맞지 않는 들어오는 데이터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도록 배선되어 있으며, 투자자는 특히 이 점에 능숙합니다.
the investment world might be less unstable if there were immutable rules – like the one governing gravity – that could be counted on to always produce the same results. But there are no such rules, since markets aren’t built on natural laws, but rather the shifting sands of investor psychology. 투자 세계는 항상 같은 결과를 낼 수 있는 불변의 규칙(중력을 지배하는 규칙과 같은)이 있다면 덜 불안정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장은 자연 법칙에 기반을 두지 않고 투자자 심리의 변덕스러운 모래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그런 규칙은 없습니다.
Volatile psychology, skewed perception, overreaction, cognitive dissonance, rapid-ire contagion, irrationality, wishful thinking, forgetfulness, and the lack of dependable principles. That’s quite a laundry list of ills. Together, they constitute the main cause of extreme market highs and lows and are responsible for the volatile swings between them. Ben Graham said that, in the long run, the market is a weighing machine that assesses the merit of each asset and assigns an appropriate price. But in the short term, it’s merely a voting machine, and the investor sentiment that moves it swings wildly, incorporating little rationality and assigning daily prices that often reflect little in terms of intelligence. 변덕스러운 심리, 왜곡된 인식, 과잉 반응, 인지적 불협화음, 연사성 전염, 비이성성, 희망적 사고, 건망증, 신뢰할 수 있는 원칙의 부족. 이는 꽤 많은 악의 목록입니다. 이것들은 함께 극단적인 시장 고점과 저점의 주요 원인이 되며, 그 사이의 변덕스러운 변동에 책임이 있습니다. 벤 그레이엄은 장기적으로 시장은 각 자산의 장점을 평가하고 적절한 가격을 할당하는 저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시장은 단순히 투표 기계일 뿐이며, 이를 움직이는 투자자 감정은 거의 합리성을 통합하지 않고 지능 측면에서 거의 반영되지 않는 일일 가격을 할당하여 격렬하게 변동합니다.
Fundamentals – the outlook for an economy, company or asset – don’t change much from day to day. As a result, daily price changes are mostly about (a) changes in market psychology and thus (b) changes in who wants to own something or un-own something. These two statements become increasingly valid the more daily prices fluctuate. Big fluctuations show that psychology is changing radically. 기본(경제, 회사 또는 자산에 대한 전망)은 매일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일일 가격 변화는 대부분 (a) 시장 심리의 변화와 (b) 누가 무언가를 소유하거나 무언가를 처분하고자 하는지의 변화에 관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진술은 일일 가격이 더 많이 변동할수록 점점 더 타당해집니다. 큰 변동은 심리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The market fluctuates at the whim of its most volatile participants: those who are willing (a) to buy at a big premium to the former price when the news is good and enthusiasm is riding high and (b) to sell at a big discount from the former price when the news is bad and pessimism is rampant. 시장은 가장 변동성이 큰 참여자들의 기분에 따라 움직입니다. 즉, 이들은 (a) 좋은 소식이 있고 열광적인 분위기가 고조될 때 이전 가격보다 큰 프리미엄으로 매수할 의향이 있고, (b) 나쁜 소식이 있고 비관적인 분위기가 만연할 때 이전 가격보다 큰 할인된 가격으로 매도할 의향이 있습니다.
it’s the primary job of the investor to take note when prices stray from intrinsic value and figure out how to act in response. Emotion? No. Analysis? Yes. 투자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가격이 내재적 가치에서 벗어날 때 이를 알아차리고 이에 대응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파악하는 것입니다. 감정? 아니요. 분석? 그렇습니다.
그 기억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게 '인문학'이란 그런 것이었습니다. … 여행지에서 타자와 만나 관계를 맺는 것은 그 자체로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행하는 것이니까요. 때문에 이 책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행서의 외피를 하고 있지만 결국 이것은 '인물'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마주했던 사회, 문화, 역사에 대한 재인식의 결과물입니다.
"자유, 그것은 항상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다." - 로자 룩셈부르크. 여행에서 느끼는 자유.
기억을 관장하는 영역과 미래를 상상하는 영역이 겹쳐 있다. 즉,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래도 상상하지 못한다는 뜻.
꿈이 무엇이든,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든, 내 삶을 내 의지대로 움직여본 경험이 단 한번이라도 있다면 분명 앞으로의 내 삶도 내가 의지하는 바대로 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그 짤막한 문장을 통해, 하루하루 내 앞에 닥쳐오는 부질을 겸허히 받아들여 언젠가 단단히 제련된 주철을 두 손 가득 잡을 수 있기를 희망하며, 그의 마지막 문장을 되뇌어본다. life is magic. 삶은 곧 마법이다.
'나눔'이란 무엇인가? 내게 나눔이란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에게 퍼주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지지 못한 자들, 힘없는 자들, 소외된 자들이 더 이상 타의에 의해 가지지 못하게 되거나 힘없게 되거나 소외되지 않도록 세상을 함께 바꾸어나가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에빙하우스의 '보유곡선'은 '망각곡선', '보유'와 '망각'의 골은 깊어 보인다. 하지만 그물을 볼 때 씨줄과 날줄을 보는 이도 있고, 그 사이의 공간을 보는 이도 있는 것처럼 그것은 같은 상황을 달리 받아들이고 해석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보유)은 누군가를 잊어가는 일(망각)인 셈이다. 그리움으로 치환된 기억.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망각'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평화는 비싸지만, 제아무리 값싼 전쟁도 가장 사치스러운 평화보다는 비싸다.
이념이 지향과 신념이 아닌 선호의 문제로 존재할 다가올 시간.
"평등해야 건강하다" - 리처드 윌킨슨 소득불평등은 유아사망률을 높이고, 살인율을 높이고, 구속 수감 인구를 늘리고, 학업성취도를 낮추고, 정신건강을 해친다. 여기에 사회구성원 간의 불신이 더해져 불평등을 강화한다. 소득불평등이 증가할수록 사회적 안녕의 각종 지표들이 아래로 향한다.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조금이라도 이고 가는 짐의 무게가 가벼워지지 않을까? 비록함께 걸어가는 것이 고단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렇게 고단하고 고통스러울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 채근당하고 자극을 받기에, 아픔과 상처 속에서도 웃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우리의 시간을 공유하며 당신과 나 사이의 벽이 허물어질 때, 양파껍질을 벗기듯 하나하나 평화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투자는 원칙을 갖고 좋은 기업을 저렴한 가격으로 사서 더 비싼 가격으로 파는 판단력과 위험을 관리하면서 감정을 조절하고, 시간을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며, 가끔은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과감함을 지녀야 한다.
이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이유는 감정이 이성에 앞서고, 지루함을 참지 못해 게임(도박) 하듯 매매를 하며, 짧은 시간에 대박을 쫓는 탐욕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본문발췌]
투자는 세 단계로 이뤄진다 . 통찰을 얻는 단계 , 투자의 대상을 선정하고 분석하는 단계, 마지막 베팅의 단계다.
첫째 단계는 책, SNS, 뉴스, 거시경제 지표 등에서 정치, 경제, 사회적 통찰을 얻는다. 통찰력을 갖기란 어려운 것이지만 가공되지 않은 정보 들에서 규칙을 발견하는 것이어서 보통은 통찰 만으로 돈을 벌기 어렵다.
둘째, 투자의 대상을 선정해서 분석하는 단계다. 예를 들어 여러 정보를 종합해서 한국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자. 이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KOSPI 지수를 롱할 수도 있고 국채를 숏할 수도 있고 원화를 달러에 대해 롱할 수도 있다. 그 중 하나를 정했다면 그 아이디어가 시장에 얼마나 반영돼 있는지를 또 분석 해야 한다. 방향성이 맞아도 시장이 이를 어디까지 반영하고 있느냐는 다른 문제이 기 때문이다
마지막 베팅의 단계는 통찰과 분석을 바탕으로 수익을 짜내는 것으로 포지션을 얼마나 잡을 것인지 언제 진입해서 언제 자를 것인가를 결정한다. 같은 종목들을 매매해도 수익률은 크게 차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투자의 성공은 무엇에 투자하느냐에 달려 있기도 하지만 어떻게 투자하느냐에 달려있기도 하다.
베팅은 다시 세 단계로 나뉜다. 첫 단계는 배팅의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다 . 감정을 다스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흥분해서 사면 안되고 무서워서 팔면 안 된다. 안전마진을 확보할 때까지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소득과 자산을 분리할 수 있는 마인드셋을 갖춰야 포지션을 의미 있 게 잡을 수 있다.
베팅의 준비 자세가 갖춰졌다면 다음은 배팅의 준비 단계로 사전 확률이 최소 50% 이상인 높은 투자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한 주식에 투자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각각 다른 사전확률을 갖는다. 개별 주식 투자의 사전 확률을 높이는 시그널로는 자사주 매입, 내부자들의 비계절적 주식 매수 주주 행동주의 등이 알려져 있다. 정보의 유통 속도가 빨라지고 있고 거버넌스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강해지고 있는 점 등으로 이들의 시그널로서의 영향력은 커질 것으로 예상한다
베팅의 실전 마지막 단계는 베팅의 실행이다. 정보를 가공하고 포지션을 조절하는 일이다. 정보를 입수하고 해석하는 것은 리서치 페이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정보가 어디까지 시장에 반영돼 있는지를 정확하게 계량할 수는 없기 때문에 정보를 입수해서 베팅을 실행하기까지 시간을 단축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적정 포지션 규모 에 대해서는 켈리 공식을 활용할 수 있다. 시장의 배당률 과 자신의 확신을 비교해서 포지션을 결정할 수 있다. 시장에 주어진 확률과 자신의 확신을 결합하는 작업은 부단한 연마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목표는 일정 기간 일정 수익률을 반복적으로 올리는 즉, 수익률의 기하평균을 높이는 데 맞춰져야 한다
[참고] 켈리 공식은 먼저 우위를 계산하는데, 나의 확신 정도와 배당률, 즉 시장의 확신 정도를 비교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배당률이 5 대 1 이라고 가정하면 1 을 걸었을 때 원금 1 과 배당 5 를 합한 총 6 을 돌려받는다. 그런데 받은 정보를 감안했을 때 이 베팅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3 분의 1 이라고 판단하게 됐다고 하자. 이 베팅은 1 을 걸었을 때 나에게 원금 포함 6 을 돌려줄 것이라고 내가 3 분의 1 만큼 확신하므로 기대 수익은 원금을 포함한 2 이다 . 여기에서 원금을 뺀 순수익은 1 이 고 우위는 원금대비 순수익금의 비율로 계산된다. 즉 우위는 1 이다. 적정 베팅 규모는 우위를 배당률로 나눈 값이다. 1 을 5 분의 1 로 나눈 20% 가 나의 적정 베팅 규모가 된다. 내 확신 정도와 시장의 확신 정도가 같다면 투자를 해서는 안된다. 100% 확신한다면 시장의 배당률과 관계없이 올인 해야 한다. 확신이 없다면 배당률만큼 숏을 쳐야 한다.
오랜만에 고창 내려가는길, 익산 황등시장에 들러 점심을 먹기로 하고 식당 문 여는 11시 전에 도착했는데 길가까지 늘어선 차들을 보고 뭔가 불길한 느낌.
식당 오픈전 길게 늘어선 줄, 이럴 줄은 몰랐다.
그래도 육회비빔밥과 선지순대국의 식사 시간이 짧아서 그런지 1시간 여만에 식당에 입성, 맛은 기다린 보람은 있었지만 멀리서 찾아올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근처에 볼일이 있고 기다릴 마음자세가 되어있다면 토렴한 촉촉 육회비빔밥과 선지와 피순대가 들어간 깔끔한 순대국밥을 맛볼 수 있다.
고창집은 요즘 자주 찾지 못하고 늦봄 부모님이 심어놓은 이런저런 작물들이 장마에 무사한가 걱정했는데 땅이 주는 여름 선물이 쏠쏠했다.
마트에서 사먹는 토마토와 참외, 수박, 옥수수에서 느낄 수 없는 단단함과 향, 맛의 깊이가 다르다.
발리에서 남은 일주일은 우붓에서 한적한 시간을 보낸다. 아침이면 논길 산책, 점심에는 미술관과 골목길 구경하며 커피 한잔, 그리고 피로를 풀어주는 발리마사지, 저녁은 다시 마실겸 저녁 먹고 숙소에 와서 발리 와인으로 마무리.
ubud roastry coffee는 바로 아래 골목으로 확장 이전을 해, 넉넉한 테라스 자리에서 선선한 가운데 킨따마니, Java Ijen, Ache Gayo 커피 향과 맛에 취할 수 있었고 골목마다 자그마한 식당들은 발리 전통음식과 세계 각국의 정성스런 음식으로 나를 채워준다.
매일 밤중, 아침, 저녁에는 비가 억수같이 내리다가도 정오 근처에는 잠깐씩 비가 그치니 낮에도 골목골목 돌아다니기 좋은 6월, 마지막날은 화창한 하늘과 구름이 비현실적이다.
싱가폴 여행을 마치고 이번 여행의 메인 발리로 가는길, 비행기 옆과 뒷자리 대가족의 소음으로 2시간 반 동안 괴로운 비행이었다.
5년만에 다시 찾은 발리 공항은 자동입국심사기가 생기고 공항의 시설도 더 좋아진 느낌이다. 우리는 도착비자를 미리 신청하지 않았기에 도착비자 구입 후 대면 입국심사를 받았는데 오후 비행편이 많지 않아서인지 금방 수속이 끝나고 ATM에서 현금 찾고, 그랩 픽업 포인트로 이동해 사누르 비치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사누르 비치 아침 일출은 좀 아쉬웠지만 비치 옆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여는 커피집의 롱블랙 커피와 크루와상은 정신 번쩍 들 만큼 맛있었다.
5년만에 다시 찾은 렘봉안 섬, 이번에도 다이빙샵은 다이브콘셉(diveconcept), 이메일로 예약 해 3일 동안 7회 fun diving을진행했고 가이드 Gusti와 거전&레온 형제, MK님과 4명이 한국인 팀으로 몰라몰라(sun fish)를 만나지 못한 아쉬움 빼고는 만타 포인트의 만타들은 언제나 우리를 반겨주었고, 누사페디나 북쪽 포인트에서 조류타기(drift)와 400회 입수 기념 거전님의 퍼포먼스까지 함께해서 더 즐거운 다이빙이었다.
다이빙 경험이 많은 거전 형제와 만타가 조류 흐름에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조류 다이빙 팁도 배우고, 만타 무리의 우아한 유형은 비행선이 날아가 듯 아름답다.
다이빙 후 즐기는 맥주 한잔, 그리고 해질녘 렘봉안 비치는 자유로운 영혼 강아지들과 언제나 화려한 석양으로 하루를 마무리 한다.
[Tip]
생각보다 많은 음식점에서 트레블로그 카드를 이용할 수 있었고 작은 Warung을 빼고는 대부분 부가세와 서비스요금이 메뉴 가격에 추가된다. 음식점 말고 기념품점이나 다이빙샵, 숙소 현지 비용 지불 시 카드 결제는 2~5% 수수료를 추가하기도 한다.
램봉안 다이브콘셉은 보통 하루에 3대의 보트로 나눠 2대는 만타포인트와 크리스탈베이, 1대는 누사페디나 북쪽의 SD, Mangrove 등 3개 포인트를 간다. 만타포인트로 가는 보트는 OW, AOW 수준에 맞춰 한 그룹당 4명 이하로 4~5그룹이 움직이고 누사페디나 북쪽 포인트는 1~2 그룹이 추가되는 듯 하다. 대여 장비를 이용하는 경우 다이빙 시작 전날 다이빙샵에 방문해 장비 세팅과 비용을 지불하고 아침 7시 반에 다이빙샵에 모여 수트와 웨이트, 개인 짐을 챙겨 보트로 이동한다. BCD와 핀은 미리 보트에 세팅이 되어 있다. 다이빙을 마치면 개인 BCD와 핀은 비치에 있는 짐수레로 각자 옮기고 수트와 웨이트는 다이빙샵 개인별 이름이 붙어 있는 박스에 세척 후 보관한다. 만타포인트와 크리스탈베이 수온이 25~27도 사이라 5mm 수트를 입기에 웨이트도 1~2kg 추가한다.
5년 전보다 발리 전체적으로도 그렇고 렘봉안 섬도 오토바이와 차량이 더 많아 진 것 같다. 작은 골목길 먼지와 소음이 상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