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신입생 시절 MT대신 답사여행을 떠나는 친구가 알려줬던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 유산 답사기 1권 '남도답사 일번지', 20여년이 흐르고 국내편에 이어 일본편, 중국편 등 우리 문화와 연관이 있는 주변 국가들까지 확장판이 나왔다.
어딘가 여행을 떠날 때, 유홍준 교수의 나의문화유산 답사기에 포함된 지역이라면 가기전에 읽고, 가서 읽고, 갔다와서 읽어보길 권한다.
[본문발췌]
'인생도처유상수(人生到處有上手)'. 나는 옛 시인이 '인간도처유청산'이라고 한 것을 살짝 바꾸어 생각지도 못했던 상수를 만나거나 신기한 것만 보면 '인생도처재상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날 지곡서당에서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다가 신입생이 재학생을 불계로 이기는 것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인생도처재상수'라고 말했더니 돌아가신 청명 임창순 선생님께서 빙긋이 웃으시면서 "자네는 한문공부를 좀더 해야겠어"라며 '재(在)'는 be동사이고 '유(有)'는 have 동사이니 제대로 말하려면 '인생도처유상수'라고 하라고 하셨다.
'누각을 일으켜 새로 세우는 것은 나라를 경륜함과 비슷함이 있으니 기운 것은 바르게 하고 위태로운 것은 편안하게 하고 ... 흙은 쌓되 단단히하고 땅을 깊이 파서 습기를 없애는 것은 그 큰 기업을 튼튼히하는 것입니다. 들보와 마룻대와 기둥과 주춧돌을 웅장하게함은 무것운 것을 지탱하는 것이 약해서는 안되는 까닭이요, 대공과 지도리와 문설주가 모두 제각기 갖춤이 있는 것은 작은 제목은 큰 소임을 맡을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추녀 끝을 시원하게 트이게 함은 사방으로 보고 들어 총명하자는 것이요, 밑을 내려다보면 반드시 두려우니 이는 경외를 갖자는 것이요, 멀리 보아 빠뜨리지 않으니 그것은 포용함을 숭상하는 것입니다. 제비들이 와서 서로를 하례함은 인민들이 기뻐함이요, 파리가 붙지 못함은 간사하고 참소하는 무리가 물러감이요, 그림이 사치스럽지 않음은 제도문물이 중도를 얻음입니다. 이때를 맞추어 여기에서 노는 것은 문무의 긴장에 이완이 알맞게 따른 것이니 오르고 내릴 때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정치를 행한다면 이 누각의 유익함은 진실로 적지 않을 것입니다.' - 하륜, 경회루 기문.
배를 건조하고 싶으면 사람들에게 나무를 모아오고 연장을 준비하라고 하는 대신 그들에게 끝없는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켜라. - 쌩떽쥐뻬리
모든 나라의 왕궁 앞에는 그 나라를 상징하는 광장이 있다. 광장은 근대 시민사회의 상징적 공간이며 왕궁 앞 광장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적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왕조의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 그것은 고궁 앞 광장이거나 유서깊은 거리다.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과장,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광장과 샹젤리제거리, 영국 런던의 버킹엄궁과 트라팔가광장,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이 있는 보리수 아랫길에 다녀오지 않고 중국, 프랑스, 영국, 독일에 갔다 왔다고 말할 수 없다. 광장은 도시의 심장이고, 거리는 동맥이며, 골목길은 실핏줄이다. 이것이 살아숨쉬는 도시공간의 구조다.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 - 김수근 선생의 건축수상집
선암사는 1년 365일 꽃이 없는 날이 없다. 춘삼월 생강나무, 산수유의 노란 꽃이 새봄을 알리기 시작하면 매화 살구 개나리 진달래 복숭아 자두 배 사과 영산홍 자산홍 철쭉이 시차를 두고 연이어 피어난다. 그것도 여느 곳에서는 볼수 없는 늠름한 고목에서 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감히 예쁘다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때가 되면 선암사는 열흘마다 몸단장을 달리한 것처럼 우리를 새롭게 맞이한다. 봄의 빛깔이란 어제와 오늘은 비슷해도 열흘을 두고 보면 확인히 다르다.
옛사람들은 화무십일홍이라고 했지만, 선암사는 열흘마다 다른 꽃을 선보이며 꽃이 지지 않는 절이 되었다. 신록의 계절에는 온 산이 파스텔톤의 연둣빛으로 물드는 것이 꽃보다 아름다운데, 백당나무, 불두화는 주먹만한 하얀 꽃을 불쑥 내민다. 이때 계곡 한쪽에서는 산딸나무 층층나무의 새하얀 꽃이 청순한 자태를 조용히 드러낸다. 절마당에서는 태산목이 연꽃봉오리 같은 탐스러운 하얀 꽃을 오늘은 이 가지, 내일은 저 가지에서 한달 내내 피웠다 떨어뜨린다. 이처럼 신록의 계절에는 나무꽃이 하얗게 피어난다.
그러다 여름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오동나무는 보랏빛 꽃대를 높이 세우고, 자귀나무 빨간 꽃은 뼘을 재듯 가지마다 옆에서 뻗어나온다. 여름이 깊어지면 배롱나무꽃이 피기 시작해 장장 석달 열흘을 위부터 아래까지 온몸을 붉게 물들인다. 그때가 되면 선암사 한쪽 구석에는 모감주나무의 노란 꽃, 치자나무의 하얀 꽃, 석류나무의 빨간 꽃이 부끄럼을 빛내며 우리에게 눈길을 보낸다. 봄이 나무꽃의 계절이라면 여름은 풀꽃의 세상이다. 선암사 뒤안길 돌담 밑에는 봉숭아 채송화 달리아가 돌보는 이 없이도 해마다 그 자리에서 그 모습으로도 잘도 피고 진다. 그러자 절집의 꽃으로는 역시 가녀린 꽃대에 분홍빛으로 청순하게 피어나는 상사화가 제격이고, 여름이 짙어가면 삼인당 섬동산 빨간 꽃술의 꽃무릇으로 환상적으로 뒤덮인다.
가을은 은행잎이 떨어져 절마당을 노란 카펫으로 장식하고 청단풍이 새빨갛게 물들어갈 때가 절정이다. 가을이 깊어가면 밤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가 온 산을 마치 캔버스에 바탕색 칠하듯 차분한 갈색을 뒤덮으며 들국화 구절초 쑥부쟁이 코스모스 감국이 여름꽃의 바통을 이어받아 선암사 화단을 장식하며서 호젓하고 스산한 정취를 자아낸다. 가을을 심하게 타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 계절 선암사에 오면 누구나 여린 감상에 물들게 된다. 사람들은 곧잘 겨울은 삭막하다고 말한다. 겨울나무는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 있다며 꽃 피고 잎 돋던 그때와 비교하며 깊은 정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선암사의 겨울은 그렇지 않다. 소나무 전나무 같은 늘푸른바늘잎나무야 우리 산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선암사는 한반도의 남쪽 끝자락 남해바다 가까이 있어 늘푸른넓은잎나무의 난대성 식물이 잘 자란다. 동백나무 후박나무 녹나무 태산목 팔손나무 붉가시나무 종가시나무 호랑가시나무가 여전히 절마당 곳곳에서 초록을 빛내고 있다. 남들이 요란을 떨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화려한 단풍으로 자태를 뽐낼 때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묵묵히 자기를 키워온 이들 늘푸른 넓은잎 나무가 윤기나고 두터운 사철 푸른 잎을 자랑하며 나무 전체가 꽃이라는듯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아직도 남아 있는 산수유나무 마가목 먼나무 호랑가시나무의 빨갛고 탐스러운 열매가 빛바랜 계절의 꽃어럼 행세하고 있을 때 벌써 한 송이 두 송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빠알간 동백꽃이 겨울은 결코 무채색의 계절만이 아님을 말해준다. 이때 풀꽃이 사라진 쓸쓸한 화단 곳곳에서는 키작은 남천의 빨간 잎, 빨간 열매가 빛의 조건에 따라 짙고 옅음을 달리하며 가녀린 맵시를 다소곳이 내보인다. 남쪽이어서 눈이 드물 것 같지만 선암사에는 눈도 많이 내린다. 눈 덮인 선암사 진입로 산자락을 뒤덮은 산죽밭의 모습은 환상의 겨울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초록과 흰색의 향연이다.
어느 나라 건축인들 자연과 건축이 교감하지 않으리오만 우리 전통건축에서 자연과 인공이 어울리는 방식은 아주 특별하다. 같은 문화권이지만 중국과 일본의 저택들은 모두 울타리 안에서만 건축이 이루어진다. 그런 가운데 일본은 섬세하고 치밀한 인공의 손길이 강조되고, 중국은 높은 담장 속에 장대한 공간을 연출하는 데 힘쓴다. 비록 중국 전통건축에도 차경이라는 개념이 있어 자연풍광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처럼 자연과 인공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전통건축물은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자연이고 또 하나의 풍경이다. 중국의 건축물은 장대하지만 마치 벽처럼 느껴지고, 일본의 전통건축물은 정교하지만 나약해 보여 건축물이 아닌 가구 같다는 인상을 준다. 이에 비해 한국의 건축은 주변 경관을 깍고 다져서 인위적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자연 위에 그냥 얹혀 있는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전통건축은 미학적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한다. - 프랑스 건축하협회장 로랑 쌀로몽
전국 돌담길. 고성 학동마을, 제주 하가리마을, 담양 삼지천마을, 강진 병영성마을, 산청 남사마을, 영암 죽정마을, 여수 추도마을, 대구 옻골마을, 예천 금당실, 부여 반교마을
나물은 기본적으로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음나무순 두릅나무순 같은 나무의 새순이다. 음나무순은 두릅나무보다 맛이 더 싱그러운데 이름은 개두릅이다. 이외에도 오갈피나무 가죽나무 고추순나무 빛새나무 노린재나무 산초나무 왕초피나무 삿갓나무 참빗살나무(화살나무) 우산대나무 다래넝쿨의 새순은 다 나물이 된다. 또 하나는 다년초, 즉 풀의 새잎이다. 쑥을 비롯해 달래 냉이 씀바귀는 나물의 고전이고, '취'는 나물의 대종으로 취자가 붙은 풀은 다 나물로 먹는다. 곰취 참취 미역취 단풍취 바위취(범의 귀) 전대취 각시취 분취 수리취. 이외에도 많다. 고사리 고비 개발자국 백지 장녹(자리공)순 미남지싹 얼레지 비비추 엉겅퀴 민들레 쇠비름 콩고투리 청침 부지깽이나물 꿩나물 복주머니나물 벌통나물 기름나물 비름나물 멸구나물 산마늘 는쟁이나물(명아주) 으아리(위령선). 당귀 잔대 창출 머위 둥굴레 돌나물, 참나물 곤드레 고들빼기 돌나물....
그렇더라도 나는 이 가을에 몇 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 술술 읽히는 책 말고 읽다가 자꾸만 덮어지는 그런 책을 골라 읽을 것이다. 좋은 책이란 물론 거침없이 읽히는 책이다. 그러나 진짜 양서良書는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어야 한다. 한두 구절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주기 때문이다. 그 구절들을 통해서 나 자신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서란 거울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한 권의 책이 때로는 번쩍 내 눈을 뜨게 하고. 안이해지려는 내 일상을 깨우쳐준다. - 법정 스님 <무소유 중에서>
천가지 욕망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냐, 한 가지 욕망을 이겨내는 것이 중요하냐. - 영화 <삼사라> 중에서.
천가지 채울 수 있는 욕망보다 이겨내기 어려운 한 가지 욕망을 가슴에 품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 일일까?.....
지쳐버린 많은 살람들은 그동안 자기 자신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일을 잠시 멈추고 자신들의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지 않은 것이다. 자신에게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모든 일을 잠시 내려놓고, 그동안 무시했던 그대의 영혼이 다시 그대를 만나게 하라. 그것은 그대의 잊혀진 신비와 다시 가까워지는 멋진 일이다. - 켈트인의 속담 중
진정한 여행은 어느 정도 삶을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 삶에 작은 변화라도 없었다면 당신은 진정한 여행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의 삶은 누군가에겐 풍경이 된다"
진정한 걷기 애호가는 구경거리를 찾아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기분을 찾아서 여행한다. 우리들의 발에는 뿌리가 없다. 발은 움직이라고 생긴 것이다. - 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예찬>
"자, 내 운명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세",
"운명아, 너 가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라",
"여행아, 너 가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라" - 오이디푸스
"우리 중에 떠돌아 다니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양치기밖에 없어."
"그렇다면 전 양치기가 되겠어요."
산티아고의 당돌함이 멋지다 생각할 즈음 그의 아버지는 금화 세 개를 건네주며 이렇게 말한다.
"이것으로 양들을 사거라. 그리고 세상으로 나가 맘껏 돌아다녀. 우리의 성이 가장 가치 있고, 우리 마을 여자들이 가장 아름답다는 걸 배울 때까지 말이다." - <연금술사> 중에서
대지는 우리에게 온갖 책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왜냐하면 대지는 우리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장애물과 스스로 겨눌 때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 <인간의 대지> 중에서
산티아고에게도 길을 떠나던 날부터 읽으려 했던 책이 한 권 있었다. 그러나 대상 행렬을 바라보거나 바람 소리를 듣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그는 자신의 낙타를 더 잘 알고 싶었고, 낙타와 친해지기 시작하자 책을 던져버렸다. 책은 이젠 그에게 그저 무게만 나가는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 <연금술사> 중에서
사막은 사람에게 행동하라 가르친다. 그 행동이란 의도된 철학적, 존재론적 행위가 아니다. 생존을 위한 안간힘일 뿐이다. 사막 같은 극한의 땅위에 서면 누구나 일상을 뛰어넘는 사색과 결단을 하게 되고 마침내 행동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사막은 책 따윈 버리고 대신 땅을 읽으라 한다.
"단단하고 높은 벽이 있어 그곳에 하나의 달걀이 부딪쳐 깨질 때, 아무리 그 벽이 옳다고 해도 아무리 달걀이 잘못했다고 해도 나는 달걀 편에 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 개개인은 하나의 달걀과 같으며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깨지기 쉬운 껍질에 쌓여 있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싸우는 것은 높은 벽이며 그 벽은 곧 제도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예루살렘상' 수상 연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 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 나짐 히크메트. <진정한 여행>
가장 멋진 여행은 아직 떠나지 않은 여행이며, 가장 훌륭한 책은 아직 쓰이지 않은 책이다.
이상 사회, 유토피아는 경제 지표나 통계 등 숫자로 가늠되는 나라가 아닐 것이다. 사람들 얼굴에 담긴 표정, 그들이 보이는 씀씀이나 여유에서 드러날 것이다.
여행은 꿈을 이루는 것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따지고 보면 꿈을 하나 둘 잃어가는 것에 더 가깝다. 가슴 속에 고이 간직했던 땅들이 마침내 눈과 코, 발바닥 앞에 벗겨질 때 그 만큼의 감격과 함께 꼭 그 만큼의 상실감이 따라온다. 꿈꾸던 곳을 디딘 순간, 꿈이 하나둘 가슴팍 어딘가에서 허무하게 빠져나간다. 처음부터 꿈 따위는 갖고 가지 않는 것이 현명한 여행자일지도 모른다.
이 땅의 주인인 인디오들은 여전히 자신의 땅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고, 식민지를 수탈했던 유럽의 후손들은 여전히 땅의 주인인 양 여행을 한다. 슬픈 역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소명이 영원히 세계 곳곳을 방랑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항상 호기심을 갖고, 눈에 띄는 모든 것을 들여다 보고, 세상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그리고 항상 어떤 곳에도 뿌리내리지 않고, 적어도 사물의 근저에 무엇이 있는지 깨달을 만큼 오래 머무르지 않는.... 우리는 표면적인 것만을 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 <체 게바라이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중에서
여행을 떠날 때는 따로 책을 들고 갈 필요가 없었다. 세상이 곧 책이었다. 기차 안이 소설책이고, 버스 지붕과 들판과 외딴 마을은 시집이었다. 그책을 나는 읽었다. 책장을 넘기면 언제나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 류시화 <지구별 여행자> 중에서
"그들은 모든 꽃을 꺾어버릴 수는 있지만 결코 봄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 파블로 네루다
결국, 인간은 얼마나 사는 걸까?
천 년? 단 하루?
일주일? 수 세기?
인간은 얼마나 오랫동안 죽는 걸까?
'영원히'라는 말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 파블로 네루다의 시, <영혼의 집> 중에서
당신이 그렇게, 걷고 또 걸으면, 언젠가 사람들이 길이라고 부르겠지. - 이철수 판화 <길>
(2권) 길을 안다는 것, 길을 간다는 것
아직 읽지 않은 책, 아직 가지 않은 여행을 향한 마음이 간절할 때, 어쩌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러산의 대불은 정말 컸고, 청두 문수원의 스님들은 한가로웠으며 주자이거우의 물빛은 세상의 빛깔이 아니었다.
확인하러 가는 것도, 감탄하고 오는 것도 모두 여행이다. 실망하러 가는 것만큼이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어쩌면 감동하는 능력, 작고 사소한 것에도 감탄하는 능력인지 모른다. 언제부터 우리가 쿨한 것, 감정을 억제하거나 표현하지 않는 것, 쉽게 만족하지 않는 것을 세련되고 고상한 것으로 여기는 세상에 살았던가. 그래서 우리는 더 행복하고 세련되었는가. 감동이 드문 사람의 삶은 얼마나 무미건조한 것인가. 반대로 쉽게 감동할 줄 아는 자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혁명은 운동으로는 안 일어나,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속으로 일으키는 것이라고! 집단은 어차피 집단이라고. 부르주아도 프롤레타리아도 집단이 되면 모두 똑같아. 권력을 탐하고 그것을 못 지켜서 안달이지! 개인 단위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만이 참된 행복과 자유를 손에 넣는 거얏!" - <남쪽으로 튀어>에서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 <타인의 고통에서>
"왜 살아야 하는 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 니체의 말,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를 죽이지 못한 시련은 나를 한층 강하게 만들 뿐'이라던 니체의 말은 용기와 객기 사이에 갈 곳을 마련하는 여행자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트래블'에 '트러블'은 때로 필요악이다'라던 후지와라 신야의 말도 그러하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 나간다." - <여행의 기술>에서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 <여행의 기술>, <팡세>에서 인용....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나라란 대체 어디일가? 이런저런 잣대를 들이대면 대관절 위험하지 않은 나라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을까? 위험하지 않은 나라란 어디에도 없다. 처음부터 위험한 나라란 존재하지 않았듯이.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의 산물이 처하게 되는 이러한 상황은 예술작품의 존속에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어쨌든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의 가치를 하락시킨다. ... 우리는 여기서 빠져나가는 것을 '아우라(Aura, 독특한 분위기)'라는 개념 속에 요약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다. -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중에서
TV나 사진, 책 등에서 무수히 넘쳐나는 여행의 이미지와 정보들을 통해 우리 시대 여행은 설렘과 기대로 넘쳐나는 '아우라'를 상실한 지 오래다. 비용과 시간만 넉넉하다면 아주 쉽게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여행일뿐더러....
삶을 살아가는 지혜, 진리는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제거하고 단순화시키며, 치우침없이 묵묵히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본문발췌]
몽상가는, "인생은 한바탕 꿈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현실주의자는, "옮은 말이다. 그렇다면 이 꿈을 되도록 아름답게 살아보자"고 대답한다.
결국 인생의 지혜란, 불필요한 것의 제거와 여러가지 철학문제를 몇 개의 것 - 가정의 즐거움(남편과 아내와 자식과의 관계), 살아가는 즐거움, 자연의 즐거움, 인류문화에 접촉하는 즐거움 - 으로 감소시키는 것과 다른 모든 적절치 않은 과학적 훈련이나 무익한 지식 추구 따위를 몰아내 버리는 것이다.
"어릴 때는 싸움을 경계하고, 청년 때에는 색을 경계하고, 노년에 이르러서는 재물을 경계하라." - 공자
하늘 즉 신 그 자체는 중용적인 존재이니, 인간은 자기가 최선이라고 믿는 바에 따라 중용적 노선을 지키면서 살아가면 무서울 거라곤 아무것도 없고, 이에 최대의 선물로 오는 것이 양심의 평화이며, 맑은 양심의 소유자는 망령까지도 무서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 합리적인 것과 불합리한 것을 둘 다 주관하는 중용적인 신이 있음으로 해서 세상만사는 다 제대로 되어가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을 널려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그린 인물이 모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그는 지상 만물의 섭리에 대해서 아는 체하는 일이 별로 없다. 세익스피어는 대자연 그 자체와 같았다. 이 말이야말로 우리들이 세상의 문인이나 사상가에게 바칠 수 있는 최대의 찬사이다. 그는 그저 살았고, 인생을 보았고, 그리고 죽어간 것이다.
초식동물적 인간은 자기가 할 일을 생각하면서 일생을 보내지만, 육식동물적 인간은 남의 생활에 간섭함으로써 자기의 생계를 세운다. 세상 사람의 절반은 자기 일을 하는 데 시간을 바치고 나머지 절반은 남에게 자기 일을 시키기 위해서 또는 남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살고 있다.
유리피데스는 노예를 정의하기를, 사상 또는 의견의 자유를 상실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단순성이라는 것은 사상이 깊다는 외적 증거이며 동시에 그 상징이다. 학문이나 저작에서 이와 같은 단순성에 도달한다는 것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사상을 명석하게 나타낸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더구나 사상이 명석해질 때에만 단순성은 가능한 것이다. ...전문에서 단순으로 이르는 과정, 전문가에서 상식가로 가는 과정에 내포되어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말해 지식 소화의 과정으로, 단연 신체의 신진대사 작용에 비할 만한 것이다. 아무리 학식이 많은 학자라 할지라도 그 지식을 스스로 소화하여 자기의 인생관과 관련시키기 전에는 그 전문적 지식을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부딪치는 문제는 앞으로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평균 5,60년간의 인생을 어떻게 보내야 하느냐 하는 문제다. 이에 대한 대답이 인생 최대의 행복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인생을 만들어 가야만 하겠다는 것이라면 그것은 주말을 어떻게 지내야 할 것인가 하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 우주의 섭리 속에서 인생의 신비한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등의 형이상학적인 명제보다 훨씬 더 실제적인 문제다. ...제 2의 문제에 관한 논점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냐'하는 것이지 '무엇이어야 하는가'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실제의 문제이지 형이상학적 문제는 아니다.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되고 보면 누구나 다 자기 생각이나 자기가 생각하는 가치 판단을 끄집어 낼 수가 있다. 이 문제를 갖고 우리들이 늘 논쟁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며, 가치 판단이 사람에 따라서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인생에는 목적이나 의의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월트 휘트먼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다. 인생을 즐긴다는 것 외에 인생에 무슨 목적이 있겠는가?
인간 최고의 품격은 자연에 순응해서 생활함으로써 마침내 천지와 동등한 최고점에 도달하였을 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계의 생물은 모두가 빈둥빈둥 놀고 있는데 유독 인간만이 일을 하고 있다. 인간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일을 한다. 왜냐하면, 문명의 진보에 따라서 의무나 책임이나 공포나 구속이나 야심 따위에 사로잡혀서, 인생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생각컨대, 이런 것들은 자연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생겨난 것이다.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데에 돈은 필요없다. 전혀 필요없다. 한적한 생활의 참된 즐거움은 부유 계급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것은 부귀를 가장 냉소하는 사람들에게만 찾아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이것은 소박한 생활을 사랑하고, 돈 버는 일에 얼마나 싫증난 사람들의 마음의 함축에서 오는 것이어야만 한다. 생활을 즐기려고 결심한 사람에게는 즐길 수 있는 생활이 언제 어디서든지 발견된다. 만일 이 지상의 생활을 즐길 수 없다면 그것은 인생을 충분히 사랑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평범한 그날그날의 생계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년기에 책을 읽는 것은 벌어진 틈을 통해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고, 중년에 책을 읽는 것은 자기 집 뜰에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고, 노경에 이르러 책을 읽는 것은 창공 아래 정자에 올라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독서의 깊이는 체험의 깊이에 따라 변하기 때문이다.
독서술을 체득하고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만물이 변하여 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산수, 바둑, 술도 책이 될 수 있고, 달, 꽃도 또한 책이 될 수 있다. 현명한 여행자는 가는 곳마다 풍경이 있는 것을 안다. 책과 역사는 풍경이다. 술도 시도 풍경이다. 달도 꽃도 또한 풍경이다.
옛날 어느 문인은 말하였다. 10년을 독서에 바치고, 10년을 여행에 바치고, 10년을 그 보존과 정리에 바치고 싶다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보존에 10년을 바칠 것까지는 없고 2,3년으로 족하다고. 독서와 여행이 내 욕심을 만족시키려면 두 배나 다섯배라도 아직 부족하다. 욕심대로 하자면, 황구언이 말한 것처럼 인간 3백 세의 수명을 보존할수밖에 없다.
"시는 시인이 가난이나 불행에 빠진 뒤에야 비로소 좋아진다." (시는 슬픔을 통해서만 참으로 깊은 맛이 난다고 하는 생각이다.)고 옛 사람들은 말하였다. 불행한 사람에게는 할 이야기가 많고 따라서 자기를 유리하게 발표하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영달하고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에 대한 한탄도 없고 불운에 대한 불평도 없이 늘 바람과 구름과 달과 이슬의 시만을 짓고 있다고 하면 좋은 시가 나올 리 만무하다. 이런 사람들에 있어 시를 짓는 유일한 방법은 여행을 떠나 눈에 띄는 모든 것 - 산이나 들이나 풍속이나 사람 사는 꼴, 때로는 전쟁이나 기근에 시달리는 민중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낱낱이 자기 시의 소재로 삼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의 노래와 탄식을 위하여 남의 비애를 빌어온다면, 구태여 가난뱅이가 되고 불항하게 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좋은 시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도에 이르면 물에 들어가도 젖는 일이 없고 불에 들어가도 타는 일이 없으며, 허(虛)한 것처럼 실(實) 위를 걷고 실한 것처럼 허 위를 걷는다. 그 거하는 곳을 집으로 할 수 있고, 어느 곳에 거하더라도 그 홀로임을 잃지 않는다. 도를 깨달은 선비라고 하면 모두가 다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도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고 다만 도를 사랑하는 사람일뿐이다. 도에 이른 사람은 자신의 지배자가 되며, 우주는 그의 앞에서 흩어져 사라지고 만다. 이런 사람은 소란함과 더러움 속에 던져저도 진흙탕 속의 연꽃처럼 몸에 진흙이 묻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구태여 좇아야 할 도를 택할 필요가 없나. 그러나 나는 아직 그 경지에 미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나는 바람에 날리는 버드나무와도 같기 때문이다 - 바람이 잠잠하면 나도 잠잠하고, 바람이 움직이면 나도 움직인다. 나는 물속의 모래 - 물이 맑으면 나도 맑고, 물이 탁하면 나도 탁하다.
공자 가로되, "도는 잠시라도 떠나서는 안 된다. 떠나야 할 것은 도가 아니라 그 도를 지키는 사람이니라" ... "사람이 도를 닦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닦는 것이 아니다."
논리와 대조를 이루는 것에 상식이 있다. 상식이라기보다 정리(情理)라고 하는 편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정리를 존중하는 것은 인간문화에 있어 가장 건전한 최고 이상이며, 정리를 아는 사람은 최고의 문화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정리를 아는 국민은 평화스러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고, 정리를 알고 있는 부부는 행복스럽게 살 수 있다. 절대로 싸움을 하지 않는 완전한 부부란 상상할 수도 없다. 다만 알맞게 싸우고 또 알맞게 화해를 할 수 있는 정리를 깨닫고 있는 부부를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정리가 있는 인간세계에서만 우리는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
서양에 있어서는 한 가지 명제가 논리적으로 완전하면 대개 그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중국인에 있어서는 명제가 논리적으로 정확하다는 그것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것과 동시에 인간성에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에 있어 이 '인간성에 일치한다'는 것, 즉 진정(盡情, 인간적인 것)은 논리적인 것보다 중요한 문제다. 영어의 reasonableness에 해당하는 중국어는 정리인데, 이것은 정(人情, 인간성), 즉 인간성과 이(天理, 변함없는 도리)라는 두 가지 요소로 성립된 것이다. 정이 신축성 있는 인간적 요소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이는 우주불변의 법칙을 나타내는 것이다.
교양 있는 사람이라 함은 인간의 심정과 자연의 법칙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인간의 심정과 대자연의 운행에 조화된 생활을 영위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유학자는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인이란 주로 그 평명한 상식과 그 자연스러운 인간성, 즉 인간미 때문에 경모를 받고 있는 공자처럼 정리를 깨닫고 있는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인간미가 있는 사고 방법이란 정리를 깨닫는 사고 방법이라는 말이다. 논리적인 인간은 항상 자기를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적인 맛이 없다. 그러므로 잘못이다. 그러나 정리를 깨닫고 있는 인간은 어쩌면 자기가 잘못일지도 모르겠다고 의심하는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옳은 것이다.
새로운 기술과 상품, 사회 구조 및 관계의 변화는 언제나 계속 진행된다. Covid19는 단지 그 변화의 속도를 가속시켰을 뿐이다.
[본문발췌]
기술적 진화의 목적은 위험 회피와 안전 지향과도 연관이 있다. 기술이 위험으로부터 우릴 보호해주고, 이를 통해 우리의 자유를 더 확대시켜준다. 결국 언컨택트는 우리가 가진 활동성을 더 확장시켜주고, 우리의 자유를 더 보장하기 위한 진화 화두다. 비대면의 위상이 높아지는 계기는 기술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욕망의 문제다. 사회가 바뀌고 문화가 바뀌는 것도 결국 우리가 가진 욕망이 바뀌어 우리가 필요로 하는대로 변화하는 것이다. 언컨택트는 욕망의 진화인 셈이다.
20세기 동안 인류가 생태계를 지속적으로 파괴해왔고, 20세기 후반부터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어왔음에도 모두가 기후변화에 소극적으로 대처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는 21세기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가 전염병에 대한 불안과 불편을 겪을 일은 앞으로 더 잦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는 노령, 장애, 빈곤을 가진 사회적 약자에겐 더 취약한 상황이 된다. 위생을 신경 쓰고 면역력을 키우는 건 각자의 몫이지만, 대면과 접촉을 줄여서도 사회와 경제가 잘 돌아갈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건 정부와 기업의 몫이다.
분명한 것은, 언컨택트 사회를 지향하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기후변화 대응에 적극 나서야 하는 것도, 정부와 기업에 이런 변화를 원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도, 일상에서 탄소배출 절감을 위해 행동하는 것도 우리 모두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당연하던 모드 것이 당연해지지 않기 전에, 당연했던 것 중에서 문제 될 것들을 과감히 내려놓는 것을 우린 받아들여야 한다. 컨택트 사회만 고집하다간 위기 상황 앞에서 일상이 멈춰버린다. 언컨택트 사회를 받아들이면서 우린 계속 일상을 이어가야 한다.
스타벅스 아메리카의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9월 기준 12억 6900만 달러(약 1조 5000억 원)가 충전하고서 아직 사용하지 않은 현금이다. 전 세계 매장 중 미국 매장이 60%가량 되니까, 전 세계적으로 20억 달러(약 2조 4000억 원) 저도가 예치금으로 확보된 것으로 추정 가능하다. 스타벅스 통장 예금인 셈인데, 이자도 없고, 고객은 60%를 써야 나머지 40%를 인출할 수 있다. 스타벅스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구조다. 스타버스는 전 세계 64개국에 진출했다. 글로벌 금융사가 될 수도 있다. 심지어 전 세계 스타벅스 매장에서 별도 환전 없이 자국에서 쓰던 스타벅스 앱의 예치금을 쓸 수 있도록, 스타벅스는 백트Bakkt라는 암호화폐 거래소 파트너로 참가했다. 2018년 10월에는 아르헨티나 은행 방코 갈리시아와 제휴해 실제 오프라인 은행 지점도 오픈했다. 스타벅스가 금융업에 진출하는 것도 가능한 시나리오이고, 스타벅스가 스타벅스 앱 이용자를 활용해 다양한 비즈니스로 확장하는 것도 가능한 시나리오다.
사실 아마존의 진짜 목적은 직접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 아마존은 무인 매장에서 자동으로 계산하는 기술을 '저스트 워크 아웃 테크놀로지 바이 아마존Just Walk Out Technology by Amazon'으로 명명해서 외부로도 팔고 있다. 이 기술을 대형 월마트나 타깃 같은 유통업체를 비롯, 소매 결제가 이뤄지는 다양한 영역에 팔고자 한다. 2019년 9월 CNBC는, 아마존이 아마존 고 결제 시스템을 공항 내에서 샌드위치나 식음료를 파는 'CIBO 익스프레스'의 운영회사인 미국의 OTG와 극장 체인을 가진 영국의 시네마월드 그룹에 제안했다는 보도를 한 적이 있다. 이때 CNBC는 아마존이 결제 시스템 제공으로 상품 판매액에서 일정 비율의 수수료를 받는 방식을 비롯, 초기 구축 비용과 월 단위 요금을 징수하는 방식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2020년 3월 9일, 로이터통신은 이미 아마존이 여러 기업과 무인 결제 캐셔리스Cashierless 기술 판매 계약을 맺었다는 보도를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0년 3월 16일, 아마존이 캐셔리스 스토어Cashierless stores 솔루션 확대 일환으로 관련 소프트웨어를 오픈소스로 제공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런 정황들로 보면, 확실히 아마존은 유통시장에서 무인 매장 분야의 주도권을 가져가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건 유통의 미래가 언컨택트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존의 솔루션은 아마존의 클라우드 서비스인 아마존웹서비스AWS로 돌아간다. 결국 아마존의 저스트 워크 아웃 기술 확산으로 유통업계의 지배력과 클라우드 서비스의 지배력을 동시에 높일 수 있는 셈이다. 아마존의 전략이 성공할지 안 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유통의 방향이 바뀔 것은 장담할 수 있다.
가장 대중화, 보편화된 것이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이다. 이는 가짜만으로 이뤄진 공간이다. 그 다음이 진짜 공간과 가짜 공간이 결합해 진짜 공간을 확장시키는 증강현실AR, Auugmented Reality이고, 그 다음이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융합한 혼합현실MR, Mixed or Merged Reality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혼합현실에 네트워크를 결합해 원격의 서로 다른 사용자들이 현실 공간감을 함께 느끼며 친밀하게 협업하는 공존현실CR, Coexistent Reality이다. 공존현실이 완전히 구현되는 상황이 되면, 우린 가상과 현실이 경계가 지워진 확장된 공간 속에서 시공간을 초월해 전 세계 다양한 사람들과 일하고, 어울리고,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혼자 꾸면 꿈이지만 모두가 꾸면 현실이 된다. 가상현실에서 증강현실, 혼합현실로 진화했다면, 이젠 공존현실이다. 현실과 가상이 결합된 공간에서 여러 사람과 교류하며 협업도 하고 어울리기도 한다. 혼자서만 가짜를 진짜로 여기는 게 아니라, 여럿이 함께 가짜와 진짜가 결합된 공간에서 시각과 청각, 촉각, 후각까지도 느낀다. 이쯤 되면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함께 느끼는 모든 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 자체로 모든 건 실제하는 진짜가 되는 셈이다. 진짜냐 가짜냐의 의미가 사라지는데, 대면이냐 비대면이냐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모든 기술은 언컨택트로 통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공간이 제약을 넘어서서 더 원활하고 효율적인 컨택트를 위해 우린 기술적으로 구현하는 언컨택트를 받아들이려는 것이다.
아마존 스카우트를 개발한 스타트업 디스패치는 2014년 자율주행 배송로봇 시제품을 내놓았는데, 2017년에 이미 아마존에 인수되었다. 아마존은 자율주행 배송로봇에 대한 투자를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해왔던 셈이다. 분명 아마존은 스카우트가 진화되어 자사의 배송에 전격 투입되고 나면, 그 뒤론 스카우트 로봇을 전 세계 다른 유통사에도 팔려고 할 것이다.
CES 2020에서 LG전자는 캐나다 인공지능 솔루션업체인 엘레멘트 AI(Element AI)社와 함께 개발한 ‘인공지능 발전 단계(Levels of AI Experience)’를 소개했다. 1단계는 효율화(Efficiency)로, 인공지능이 지정된 명령이나 조건에 따라 제품을 동작시킨다. 2단계는 개인화(Personalization)로, 사용자의 행동을 분석해 패턴을 찾고 사용자를 구분한다. 3단계는 추론(Reasoning)으로, 여러 접점의 데이터를 분석해 행동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한다. 4단계는 탐구(Exploration)로, 인공지능 스스로가 가설을 세우고 검증해 더 나은 솔루션을 제안한다.
디스토피아는 전체주의적 정부에 의해 억압받고 통제되는 사회를 말한다. 존 스튜어트 밀이 1868년 영국 의회에서 영국 정부의 아일랜드 억압 정책을 비판하면서 이 말을 처음 썼다고 알려져 있다. 소설, 영화, 만화 등에서 미래를 그려낼 때 보편적으로 설정하는 사회가 디스토피아이기도 하다. 디스토피아의 대표적 소설이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 조지 오웰의 <1984>(1948)이고, 수만흔 SF영화에서 볼 수 있는 디스토피아 배경도 이 두 소설이 영향을 미친 것이라 볼 수 있다. ... 전 세계에서 식민 지배를 하는 제국주의 영국이, 식민지ㅔ서의 정책이 디스토피아 사회의 모습이었다. 지금 시대는 중국을 디스토피아 사회에 가깝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싱가포르도 마찬가지다. 권력이 견고하고 독재에 가까울수록 디스토피아가 현실이 된다. 한국 사회도 군부 독재 시절에 겪어본 일이다. 과거에 물리력,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공권력에 의한 통제였다면, 지금은 IT 기술로 인한 통제가 대두된다. 사람의 대면이 줄어도 되는 사회는 데이터와 기술에 의한 관리가 원활하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를 악용하면 통제가 된다. 초연결 사회, 언컨태그 사회, 4차 사업혁명 사회, 인공지능 사회, 뭐라고 불러도 과거에 비해 디스토피아의 우려가 생기는 건 마찬가지다. 결국 언컨택트 사회로의 전환 과정에 있는 우리 사회에서 디스토피아에 대한 우려를 해소할 방법이 중요한 숙제댜. 견제와 투명성이 언컨택트 사회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우린 컨택트 사회에 태어났다. 평생 사람들과 대면하고 소통하며 살아왔다. 컨택트 사회에 완전히 적응한 기성세대일수록 언컨택트 사회에 새롭게 적응할 일이 더 많다. 이 과정에서 언컨택트 디바이드, 디지털 디바이드, 인공지능 디바이드 등만 드러나는 게 아니라, 관계에 대한 단절과 소외 현상도 드러난다. 가뜩이나 외로움이 질병이 되는 외로운 사회로 가고 있는데, 언컨택트 사회가 고립과 외로움을 더 심화시킬 수도 있다. 언컨택트 사회에 태어날 사람들과의 소통 문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과의 대면을 통해서 쌓고 배운 소통이 아니라, 기계와의 소통에 익숙하게 자란 사람들이 사람과의 소통에선 어떤 문제를 드러낼지도 앞으로의 사회적 리스크다. 사람과의 관계 문화가 달라지면 공동체이자 사회가 유지되는 데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기술로는 채우지 못할 문제들이 있는 것이다.
언컨택트 사회는 예고된 미래였지만, 코로나19로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전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다. 준비도 안 된 상황에서 언컨택트 환경을 도입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상황이 언컨택트가 가진 문제를 급격히 노출시키는 계기도 되고 있다. 인간 소외와 새로운 갈등, 새로운 차별과 새로운 위험성, 결국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우리 사회는 언컨택트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대응에 나서야 한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었는데 그 시기가 당겨지고 속도가 빨라졌다. 이미 시작된 언컨택트 사회, 우린 그 속에서 계속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야 한다. 이제 시작이다.
블로그 등에 올라온 여행기, 여행 안내서를 통해 새로운 여행지에 대해 이해하듯, 책을 통해 새로운 책을 읽게 되는 경험은 즐겁다.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에서 그랬고, 이 책 <여행의 문장들>을 통해서도 좋은 책들을 만날 수 있었다. 여행과 독서를 통해 만나는 설레임!
[본문발췌]
독서술을 체득하고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만물이 변하여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산수山水, 바둑, 술도 책이 될 수 있고 달, 꽃도 또한 책이 될 수 있다. 현명한 여행자는 가는 곳마다 풍경이 있는 것을 안다. 책과 역사는 풍경이다. 술도 시도 풍경이다. 달도 꽃도 또한 풍경이다. - 린위탕, <생활의 발견>
세상의 길이 어떻게 만나는가를 더듬어 알고 발견하는 일이 여행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행자는 그래서 땅을 읽는 독서가입니다. 어떤 책이 전혀 다른 책과 한 봉우리에서 만나고, 언어가 다른 어떤 저자의 생각이 다른 저자와 통하는 길목에 서는 일도 황홀합니다. 한 권의 훌륭한 책은 열 갈래 다른 독서의 시작이라 했던 말처럼, 책과 책 사이에도 길이 있고 산맥이 있으며 유유히 흐르는 바다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책을 읽는 사람은 진지한 여행자이기도 합니다.
이보게, 고빈다, 내가 얻은 생각들 중의 하나는 바로,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 없는 법이야.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누군가 구도를 할 경우에는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은 오로지 항상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이지요.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얘야, 사랑을 네 유일한 벗으로 삼거라. 이 우주를 지탱하는 것은 사랑이니 말이다. 네가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사랑이 다르게 구현된 것이니, 불은 사랑의 열기, 흙은 사랑의 토대, 바람은 사랑의 덧없음, 밤은 사랑이 꿈꾸는 상태, 낮은 사랑이 깨어 있는 상태이니라. - 쿠쉬완트 싱, <델리>
'여행'은 무언의 바이블이었다. '자연'은 도덕이었다. '침묵'은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침묵에서 나온 '말'이 나를 사로잡았다. 좋게도 나쁘게도, 모든 것은 좋았다. 나는 모든 것을 관찰했다. 그리고 내 몸에 그것을 옮겨 적어보았다. - 후지와라 신야, <인도방랑>
인도는 너무 많이 찍으면 안 됩니다. 인도란 나라는 어디를 찍어도 사진이 되니까요. 360도로 빙그르르 돌면서 서른여섯 번 셔터를 누르면 바로 포토스토리 한 권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인도에 간 사람들의 사진은 모두 똑같아요. 너무 많이 찍는다는 건 전부 찍어선 안 되는 거지요. 인도는 '무엇을 찍지 않을 것인가' 하는 마이너스 작업에 의해서만 그 사람의 시점이 드러납니다. - 후지와라 신야, <인도방랑>
침묵은 물체를 보면서 거기서 일어나는 감정이입의 상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글솜씨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다.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 침묵은 인간의 얼굴 속에 있는 하나의 기관과도 같다. 얼굴 속에는 눈과 입과 이마만 있지 않고 침묵도 있다. 침묵은 얼굴 속 어디에나 있다. -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도처에 침묵이 있다. 다만 우리가 듣지 못할 뿐이다. '모든 것이 스스로 요란한 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확인받으려는'(최승자) 소음의 시대에 침묵을 벗하는 일은 행복하다.
<숲>,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 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자음 'ㅅ'의 날카로움과 'ㅍ'의 서늘함이 목젖의 안쪽을 통과해 나오는 'ㅜ' 모음의 깊이와 부딪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바람이다. 'ㅅ'과 'ㅍ'은 바람의 잠재태이다. 이것이 모음에 실리면 숲 속에서는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때 'ㅅ'의 날카로움은 부드러워지고 'ㅍ'의 서늘함은 'ㅜ' 모음 쪽으로 끌리면서 깊은 울림이 울린다. ... '숲'은 글자 모양도 숲처럼 생ㄱ서, 글자만 들여다보아도 숲 속에 온 것 같다. 숲은 산이나 강이나 바다보다도 훨씬 더 사람 쪽으로 가깝다. 숲은 마을의 일부라야 마땅하고, 뒷담 너머가 숲이라야 마땅하다. - 김훈, <자전거 여행>
<술>, 술. 이 말이 아름답게 들리는 것인지 이 말이 가리키는 물질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인지 섞갈릴 때가 있다. 아무튼 '술'이라는 말만큼 술처럼 들리는 말이 내가 아는 외국어에는 없다. '술'의 마지막 소리인 설측음 /ㄹ/은 술의 물리적 성질을, 다시 말해 액체로서의 유동성을, 그 흐름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들린다. 한편 그 첫 소리인 치마찰음 /ㅅ/은 술이 예컨대 증류수 같은 무미 무취 무색의 액체가 아니라 빛깔과 향기와 맛을 지닌 매력적인 액체라는 것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그 두 자음을 이어주는 원순 후설모음 /ㅜ/는, 내게, 술은 내뱉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것이라는 점을, 또 마시되 예컨대 모음 /ㅏ/가 연상시켰을 수도 있듯 폭음하는 것이 아니라 절제 있게 느릿느릿 마시는 것이라는 점을 함축하는 것처럼 보인다. - 고종석, <말들의 풍경>
조금 느리지만, 슬로 미디어인 책을 통해서도 살아가는 지혜나 힘은 충분히 어을 수 있지 않을까. 앉은 자리에서 손가락과 눈으로 하는 여행보다 두 다리로 직접 만나고 가슴으로 느끼는 경험이야말로 여전히 가장 의미 있는 배움과 깨달음이 아닐까. 내게 여행은 숲에 가서 술을 마시는 일이다. 그 동네에 가서 그 동네 공기와 물을 마시며 그 동네서 난 음식과 술을 마시는 것. 그 동네가 빚어낸 책을 읽는 것. 내가 하려는 여행의 모습은 변함없이 그러하다. 숲에 가 술을 마시고 싶다. 그 글자들을 그렇게 명명한 옛 사람들의 위대한 마음을 떠올리며.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 파블로 네루다, <질문의 책>
그난 사랑을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이다. 섬세하고 풍부한 감성을 타고난 그는 꽃향기라든가 떠오르는 태양, 말이나 새의 비상, 음악 같은 것을 너무나 깊이 체험하고 사랑할 줄 알았다. 그런 존재인 골드문트가 어째서 정신의 세계를 추구하고 금욕의 길을 가야 하는 수도사가 되겠다고 집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나르치스는 이 문제 관해 곰곰이 따져보았다. -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이름이 어쨌다는 거예요. 우리가 장미라 부르는 꽃을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부르더라도 그 향기는 역시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러니 로미오는 로미오라고 안 불러도 그 이름이 갖는 고상함은 그대로 남는 거예요. - 윌리엄 셰익스피어, <로미와 줄리엣>
괴테에 의해 독일어가 비로소 언어로 만들어졌다면, 셰익스피어는 영어를 세계 최고의 언어로 만들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2만 8,829개의 단어가 사용되었다. 셰익스피어는 작품에서 그전까지는 한 번도 영어에 등장하지 않던 새 단어를 1,700여 개나 소개했다. 햄릿 한 작품에만도 600여 개의 단어를 새로 선보였다. 그가 도임한 단어 중에는 오늘날 매일 사용하는 'critical(비판적인), extract(추출하다), excellent(훌륭한), assassination(암살), lonely(외로운), accommodation(숙소), amazement(경악), bloody(유혈의), hurry(서둘러), eyeball(눈알), road(길)' 등이 있다. - 빌 브라이슨, <셰익스피어 순례>
용감한 시골 귀족, 이곳에 잠들다. 탁월한 그대의 용기 죽음의 신도 그대 목숨 죽음으로써 빼앗지 못했다고 세상 사람들 전하도다. ... 광인으로 세상을 살다가 본 정신으로 세상 떠났으니. - 미겔 데 세르반테스 시아베드라, <돈키호테>
유명한 묘비명, '우물쭈말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버나드 쇼),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오' (헤밍웨이), '벗이여, 바라건대 여기 묻힌 것을 파헤치지 마라. 내 뼈를 움직이는 자에게 저주가 있으리니' (셰익스피어)
러시아의 작가 투르게네프가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서구 문학사가 탄생시킨 대표적인 두 인간형으로 흔히 셰익스피어의 대표 캐릭터인 '햄릿형 인간'과 세르반테스의 대표 캐릭터인 '돈키호테형 인간'을 꼽는다. 전자는 생각과 고민이 많아 행동으로 곧바로 나서기를 주저하는 인간이지만, 후자의 인간은 생각이고 자시고 없이 일단 저지르고 보는 행동형 인간의 표상이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이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곧 절망의 거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론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 찰스 디킨스, <두 도시 이야기>
비록 절대 특권을 누리던 왕일지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단두대에 목이 싹둑! 잘릴 수 있다는 공통의 경험을 통해 유럽 혹은 서구는 이후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민주주의 정신을 꽃 피워나갔다 여전히 대통령과 정치인, 자본가를 봉건시대의 왕이나 우리와는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추앙하는 우리네 민주주의는 어떠한가? 낡은 인식의 대대적인 혁명을 불러일으켰다는 데서 프랑스 혁명이 얼마나 대단한 사건인지 되새길 만하다. <두 도시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단두대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는 주인공 카턴의 유언은 아직도 완벽한 자유, 평등, 박애를 이뤄내지 못한 절망의 세상을 살아가는 후대 독자에게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긴다. "나는 알고 있다. 이 깊은 구렁텅이에서 솟아난 아름다운 도시와 현명한 사람들이, 시간이 걸릴지언정 진정한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승리와 패배를 겪음으로써, 현재의 악행과 그것을 잉태한 예전의 악행이 스스로 속죄하고 사라지리라는 것을."
행복한 가정은 모두 다 서로 비슷한 것이고, 불행한 가정은 어느 경우나 그 불행의 상태가 다른 법이다.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안나 카레리나>
몇 십만이나 되는 인간들이 지상의 한 작은 지역에 모여 서로 밀치락달치락하며 그 땅을 보기 흉하게 만들려고,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땅바닥을 돌멩이로 덮고, 그 틈 사이로 자라는 모든 잡초의 싹을 뽑아내고, 그 대기를 석탄과 가스의 연무로 채우고, 나무들을 잘라내고, 또모든 짐승과 모든 새들을 내쫓는 등, 제 아무리 노력을 다하였다고 해도, 그러나 봄은 역시 봄이었다. - 톨스토이, <부활>
만일 신들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내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참고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양의 근대를 열고 창조했다고도 할 수 있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거의) 최초의 철학자로 니체가 거론된다. 질서와 합리의 아폴론적인 세계가 아닌, 무질서와 쾌락의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옹호한 그의 첫 저작 <비극의 탄생>부터가 그랬다.
토리노의 한 호텔에서 나오는 니체, 그는 말과 그 말을 채찍으로 때리는 마부를 보았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마부가 보는 앞에서 말의 목을 껴안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그 일은 1889년에 있었고, 니체도 이미 인간들로부터 멀어졌다. 달리 말해 그의 정신 질환이 발병한 것이 정확하게 그 순간이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바로 그 점이 그의 행동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우리는 모든 가치를 전도시킬 수 없는가? 악은 선이 아닐까? 신은 악마의 발명품이며 세공품이 아닐까? 어쩌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잘못이 아닐까? 그리고 만일 우리들이 기만당하고 있다면,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또한 기만자가 아닐까? -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다른 사람들은 작품을 발표하거나 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오히려 3년 동안이나 여행을 하며 머리로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했다. 배운 것을 비워버리는 그러한 작업은 느리고도 어려웠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강요당했던 모든 배움보다 나에게는 더 유익하였으며, 진실로 교육의 시작이었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여행은 배움의 공간이지만 비움의 시간이기도 한 것.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텅 비우는 것 역시 우리가 진정 배워야 할 소양이 아닐까. 나는 그런 '텅 빈 여행'을 사랑한다. 정해놓은 목적지 없이 버스터미널 시간표의 낯선 지명 앞에 서는 그런 시간을 사랑한다. ... 일부러 세상을 떠돌아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쓸쓸함이 거기(꼬창) 가득했다. 바다가 태양을 품으면 찬란함으로 가득하고, 낭만을 품으면 사랑으로 가득하고, 분노를 품으면 파괴로 가득하겠지만, 쓸쓸함을 품으면 얼마나 거대한 슬픔과 고독을 빚어내는지 알 것 같았다.
나타니엘이여! 우리는 언제 모든 책들을 다 불태워버리게 될 것인가! 바닷가의 모래가 부드럽다는 것을 책에서 읽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맨발로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감각으로 먼저 느껴보지 못한 일체의 지식이 내겐 무용할 뿐이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나는 이렇듯 과감히 책을 버릴 것을, 그리고는 책 대신에 자연과 삶, 거리와 사람들 속에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을 충고하는 책들을 사랑한다. 서평가 이현우가 "책은 전부다. 그런데 이 전부인 책들은 책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한다"라며 얘기한 '책의 패러독스'가 혹시이런 게 아닐까 싶다.
내 생각에는 길가에 피어 있는 꽃 한 송이 기어 다니는 작은 벌레 한 마리가 도서관을 가득 채운 모든 책들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 -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당신 책을 한 무더기 쌓아놓고 불이나 놓아버리쇼. 그러고 나면 누가 압니까. 당신이 바보를 면할지.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산티아고에게도 길을 떠나던 날부터 읽으려 했던 책이 한 권 있었다. 그러나 대상 행렬을 바라보거나 바람 소리를 듣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그는 자신의 낙타를 더 잘 알고 싶었고, 낙타와 친해지기 시작하자 책을 던져버렸다. ... 책은 이젠 그에게 그저 무게만 나가는 쓸모없는 물건이었다. -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현대 물리학으로 인한 이러한 전환은 지난 수십 년 사이 많은 물리학자들과 철학자들에 의해서 폭넓게 논의되어왔지만, 이런 변화들이 동양의 신비주의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관념과 매우 유사한 방향의 세계관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데 대해서 좀체 깨닫지 못하였던 것 같다. 현대 물리학의 제 개념들은 극동의 종교 철학에 표명된 여러 아이디어들과 놀라운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원자 이론의 가르침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 '우리는' 부처나 노자와 같은 사상가들이 일찍이 부딪쳤던 인식론적 문제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 닐스 보어의 말,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자연계는 무한히 다양하고 복잡한 세계로서 거기에는 직선이나 완전한 정각형은 들어 있지 않으며, 사건이 정연한 순서대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 모두가 한데 어울려서 일어난다. 현대 물리학이 말해주듯이 막막한 우주 공간까지도 휘어져 있는 것이다. -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양자론은 우리로 하여금 우주를 물리적 대상들의 집합으로서가 아니라 통일된 전체의 여러 가지 부분들 사이에 있는 복잡한 관계망으로 보게 한다. 그런데 이는 동양의 신비가들이 세계를 체험했던 방법으로서, 그들 중의 몇몇은 그 체험을 원자 물리학자들이 쓴 것과 거의 같은 말로 표현하였다. - 프리초프 카프라,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생명이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기적이기에 이에 대항해 싸움을 벌일 때조차도 경외감을 잃어서는 안 된다. 자연을 통제하기 위해 살충제와 같은 무기에 의존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 능력 부족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면 야만적인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함이다. 과학적 자만심이 자리를 잡을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 레이첼 칼슨, <침묵의 봄>
세상은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 레비 스트로스, <슬픈 열대>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일까?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는 것일까? 그저 좋은 시절에서 조금 덜 좋은 시절로 흐르는 것은 아닐까? 행복은 무엇일까? 몸이 편안하고 걱정 없는 것이 행복일까? 삶이란 무엇일까? 던져진 존재로서 그저 살아지는 것일까?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무엇일까? 일상에서 답을 구할 수 없어 여행을 떠나지만 여행을 떠난다고 답을 얻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여행은 무의미한 일상의 연장일 뿐일까?
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봐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억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의 통일성과 이성과 감정 지어지는 우리의 행동까지도 기억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을.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 루이스 부뉴엘의 말,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 이언 매큐언, <속죄>
지금, 세상에는 진실을 은폐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더 큰 문제는 그들이 더는 '속죄'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뉴스를 접하면 언론을 호도하고 본질을 흐려 진실을 가리려는 파렴치한 시도는 사회 상류층으로부터 난무하고 있다. 교회나 법당에 찾아가 값싼 기도로 자신의 거짓과 악행이 사함 받을 수 있다 믿으면서 많은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더욱 탐욕스럽게 살아간다. 그들이야말로 죄를 심판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확실하게 인정하고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심판의 내세가 있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극악무도한 죄를 지을 수 있으며, 그에 대해 속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속죄'가 사라진 이 절망의 시대에 소설을 읽는 맛은 씁쓸하기만 하였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 - 이언 매큐언, <속죄>
"이제 뭘 하죠?" "찾아야지." "뭘요?" "뭘 찾을지는 생각하지마." "왜요?" "뭔가를 찾겠다고 생각하면 다른 중요한 걸 놓치기 쉬우니까. 마음을 비워. 발견하고 나면, 자기가 뭘 찾고 있었는지 알게 될 거야." - 요 네스뵈, <스노우 맨>
오로라는 그런 것이었다. 애써 쫓는다고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방심한 상태일 땡 우리 앞에 나타나는 그런. .... 노르웨이 트롬쇠
해리는 자신이 맡은 사건이 결론에 도달하거나, 해결되거나, 종결되었을 때 기쁨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건을 수사중인 한 그에게는 목표가 있지만, 일단 그 목표에 도달하고 나면 이곳이 여정의 끝이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혹은 그가 상상했던 끝이 아니라는 생각, 혹은 끝이 바뀌었거나, 그가 변했거나, 뭐가 뭔지 알 수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사실 그는 공허했고, 성공은 약속했던 맛이 아니었으며, 범인을 잡으면 늘 '그래서 뭐 어쩔 건데?'라는 의문이 뒤따랐다. - 요 네스뵈, <스노우 맨>
"눈은 참 깨끗하지, 오빠?" "응...." "그렇지만 향기가 없어." "이렇게 많이 쌓여 있는 눈에 향기가 있다면 큰일이야, 요코." 도오루가 웃었다. 요코도 덩달아 웃었다. - 미우라 아야코, <빙점>
겨울은 달리 보면 '따뜻한' 계절이다. '따뜻한'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계절은 오로지 겨울밖에 없다. '시원한'이 여름의 형용사이듯 말이다. 하지만 겨울이 따뜻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절실하다. 온기가 없는 겨울, 따뜻하게 내민 손과 마음을 나누지 않는 사람들의 계절은 혹한의 겨울보다 더 춥고 매서울 것이다.
시인 혹은 소설가가 된다는 것은 이미 자연을 쫓는 사람이라는 것. 자연의 미세한 떨림과 여린 빛에도 아파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이 또한 여행자라는 것. 헤세의 책에서 여행자와 시인은 행복하게 만나고 있다.
"당신은 시인이군요. ... 당신이 소설을 쓴다고 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살랑거리고, 산이 햇빛에 빛난다고 해서 달느 사람들에게 그것이 뭐겠어요. 그러나 당신에게는 그 가운데 생명이 있고, 그것과 당신은 같이 살아고 있으니까요. - 헤르만 헤세, <페터 카멘친트>
반짝이는 호수나 쓸쓸한 적송나무나 햇빛을 받는 바위보다도 더욱 마음이 끌린 것은 구름이었다. 넓은 세상에서 나보다 구름을 더 잘 알고 나보다 더 구름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혹은 또 구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구름은 흘러가며 눈에 위안을 준다. 구름은 축복이요, 신의 선물이요, 노여움이요, 죽음의 힘이다. 구름은 갓난아이처럼 정답고 부드럽고 평화스럽다. 구름은 착한 천사처럼 예쁘고 부유하고 은혜로우며, 죽음의 천사처럼 어둡고, 피할 수 없고 사정을 모른다. - 헤르만 헤세, <페터 카멘친트>
많은 시인과 여행자들이 모두 저 변함없이 흐르는 구름을 꿈꾸지 않았던가? 만일 구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여행자들이 그토록 많이 생겨났을까? 바람 같은 것이 있지만, 역시 여행자의 스승은 저기저 지향도 없이 형체도 없이 떠다니는 구름, 구름이 아니었을까?
시인이 된다는 것은 /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 행동의 끝까지 / 희망의 끝까지 / 열정의 끝까지 / 절망의 끝까지 // 그 다음 처음으로 셈을 해보는 것, / 그 전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 / 왜냐하면 삶이라는 셈이 그대에게 /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 낮게 계산될 수 있기 때문이지 // 그렇게 어린애처럼 작은 구구단 곱셈 속에서 / 영원히 머뭇거리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지 // 시인이 된다는 것은 / 항상 끝까지 가보는 것을 의미하지. - 밀란 쿤데라, <시인이 된다는 것>
고뇌에 찬 영혼이 자신의 추억과 고통을 말하기에는 어느 겨울 저녁, 집 주위로 바람이 몰아치고 있을 때, 밝은 불 하나만 있으면 족한 것이다. ... 불은 '낙원'에서 빛난다. 불은 '지옥'에서도 타오른다. 불은 온화함이기도 하고 고문이기도 하다. 불은 부엌이기도 하고 세상의 종말이기도 하다. 불은 불가에 얌전히 앉아 있는 어린아이를 즐겁게 한다. 하지만 너무 불꽃 가까이에서 놀려고 들면 그 어떤 불복종도 처벌한다. 불은 안락이자 존중이다. 불은 수호신이자 무서운 공포의 신이요, 선한 신이자 악한 신이다. - 가스통 바슐라르, <불의 정신분석>
가령 / 이것이 시다, / 라고 쓴 대부분의 것은 시가 아니다 // 설령 / 이것이 시가 되지 않더라도, / 라고 쓰여진 것은 대부분 시다 // 가령(佳嶺)은 도처에 있다. / 가령 화사하고 화려한 것. 가령 사랑이란 단어. / 가령 그리움이란 단어. 봄날 꽃놀이 관광버스가 / 가 닿는 곳. 그곳이 가령이다. // 설령(雪嶺)은 보이지 않는 자리에 스며 있다. / 어둡고 춥고 배고픈, 눈과 귀와 혀의 뿌리. / 설령 어시장 좌판이라도. 설령 공중화장실이라도. / 설령 무덤이라도. 설령 보이지 않더라도. / 그곳에 있다. // 등반자여 혹은 동반자여 / 가령은 도처에 있고 설령은 도무지 없다. / 도대체 어디를 오를 것인가 - 박제영, <가령과 설령>
나는 20여 년의 시작 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음 시를 못 쓰게 된다. 다음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을 모조리 파산시켜야 한다. - 김수영, <김수영 산문집>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쟘,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 윤동주, <별 헤는 밤> (1941.11.5)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1941.4. 문장 26호)
어떻게 설명 드려야 할까요? 어르신이 시를 읊으니까 단어들이 여기저기 사방으로 뒤어다니는 것 같았어요." "바다처럼? 그게 바로 리듬이라는 거야" "너무 많이 움직이다 보니 멀미가 날 정도였어요. 어르신 말씀을 타고 흔들거리는 배처럼 흘러가는 것 같았어요." "마리오, 자네가 지금 뭘 했는지 아나?" "뭘 했는데요?" "메타포."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내가 지나온 모든 길은 / 곧 당신에게로 향한 길이었다 / 내가 거쳐 온 수많은 여행은 / 당신을 찾기 위한 여행이었다 / 내가 길을 잃고 헤맬 때조차도 / 나는 당신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 그리고 마침내 당신을 발견했을 때 / 나는 알게 되었다 / 당신 역시 /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는 것을 - 잘랄 알 딘 알 루미
우리 안에 있는 비밀스러운 회전이 / 우주를 돌게 한다 // 머리는 발에 대하여, 발은 머리에 / 대하여, 서로 모른다 // 상관없다. 그들은 / 계속 돌고 있다 - 잘랄 알 딘 알 루미, <회전>
늙은이들은 죽을 것이고, 젊은이들은 모를 것이다. - 이스라엘의 한 정치인...
'제노사이드'를 주제로 하는 증언 문학의 성립에는 몇 단계의 어려움이 따른다. 첫번째로 일차적인 증언자 대다수가 문자 그대로 학살당해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두번째, 생존자 대부부은 차라리 입을 닫고 기억을 억압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세번째, 설령 증언이 이루어지더라도 그 메시지가 그대로 독자에게 전달되지 않고 왜곡되어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네번째로 아우슈비츠처럼, 사실을 표상하는 것이 애당초 가능한 것인지, 그것을 표상하고자 하는 행위는 불가피하게 실제 일어난 사실을 왜소화하거나 진부화 혹은 상품화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문제가 있다. 이 같은 의문은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아우슈비치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선언 이후, 거듭 표명되었다. - 서경식, <시의 힘>
저지 캠벨, 빌 모이어스, <신화의 힘>
그(조셉 캠벨)는 세계의 각각 다른 문화권에서 신들이 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까닭을, 이 수많은 문화의 가지에서 서로 비슷한 이야기들(창세, 처녀 수태, 신자성육, 죽음과 부활, 재림, 그리고 최후의 심판 이야기)이 생겨나는 까닭을 알고자 한다. 그는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는 힌두 경전에 나오는 통찰을 좋아한다.
신화 자체가 노래인 것이지요. 육신의 에너지로부터 부추김을 받는 상상력의 노래, 이것이 신화입니다. 한 선사가 무리 앞에서 설법을 하기 위해 서 있습니다. 이 선사가 마악 입을 열려는 찰나 새가 한 마리 끼어들어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자 선사가 말했지요. "설법은 끝났다"고요.
신화는 사회가 꾸는 집단적인 꿈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는 공적인 꿈이요, 꿈은 사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떤 개인이 꾸는 사적인 신화인 꿈이 그 사회의 꿈인 신화와 일치한다면 그 사람은 그 사회와 무난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앞에서 기다리는 캄캄한 숲 속에서 한바탕 모험을 해야 합니다.
가장 찍고 싶은 것이 가장 찍을 수 없는 것이다. - 베르나르 포콩, <사랑의 방>
나는 사물이 찍히면 어떻게 보일지 알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 게리 위노그랜드의 말, 수잔 손탁, <사진에 관하여>
요컨대 사진은 겁을 주고, 격분하게 하며 상처 줄 때가 아니라,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전복적이다. ... 카프카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어떤 것들을 사진 찍는 것은 그것들을 정신에서 몰아내기 위해서이다. 나의 이야기들은 눈을 감는 하나의 방식이다." 사진은 침묵해야 한다. (매우 시끄러운 사진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 롤랑 바르트, <밝은 방>
'그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 말은 그에겐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즉 그대는 다시는 고향으로, 가족의 품으로, 어린 시절로, 낭만적 사랑으로, 영광과 명예에 대한 청년 시절의 꿈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다시는 방랑 생활, 다른 나라로의 도피, 그리고 '예술과 미', '사랑'을 완성시키려는 이상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 한때는 영원한 것으로 보였지만 언제나 변화하는 사물의 낡은 형태와 조직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가 없으며, 다시는 시간과 기억의 도피처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 토마스 울프,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가리>
나에겐 내가 현재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가면 언제나 편안할 것처럼 생각된다. ... 마침내 내 넋은 폭발한다. 그리고 현명하게 나에게 외치는 것이다. "어느 곳이라도 좋다! 어느 곳이라도! 그것이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 -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어디로라도! 어디로라도! 이 세상 바깥이기만 하다면!"이라 읊었던 보들레르의 시에서 비로소 근대적인 '여행의 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여행에 관한 철학 서적인 <여행의 기술>에서 저자 알랭 드 보통은 보들레르를 평생에 걸쳐 항구, 부도, 역, 기차, 호텔방과 대양을 가로지르는 배를 사랑한 시인으로 그리고 있다. 목적지보다는 떠남 자체를 동경한 보들레르의 생각을 통해 여행이 '생각의 산파'임을, 내적인 사유를 끄집어내고 자신과 대화를 이끌어내는 공간임을 얘기한다.
몇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꿈을 꾸다보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즉 우리에게 중요한 감정이나 관념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곳이 반드시 집은 아니다. 가구들은 자기들이 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리도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수수께끼 같은 친구여, 말해 보아라, 너는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 아버지? 어머니? 누이나 형제? // 나에게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이도, 형제도 없소. // 친구들은? // 당신은 오늘날까지 내가 그 의미조차 모르는 말을 하고 있구려. // 조국은? // 그게 어느 위도 아래 위치하는지도 모르오. // 미인은? // 불멸의 여신이라면 기꺼이 사랑해겠소만. // 돈은 어떤가? // 당신이 신을 싫어하듯, 나는 그것을 싫어하오. // 그렇군! 그렇다면, 너는 도대체 무엇을 사랑하느냐, / 불가사의의 이방인이여? // 나는 구름을 사랑하오..... 흘러가는 구름을.... / 저기.... 저기..... 저 찬란한 구름을! - 보들레르, <이방인>
돌연변이가 발전과 진화로 이어진다. 시스템을 벗어난 생각과 행동이 새로운 시스템을 창조한다.
[본문발췌]
그들은 시스템의 기준대로 분류되고, 이미 방향이 정해진 트랙 위에 놓여 지정된 경로를 따라 앞으로 이동해 지시를 받는다.
정교하게 구성된 수많은 과정을 통과하며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정보를 주입받는다. 이 모든 과정은 적절한 결과를 내기 위해 철저하게 기획된 것이다.
모든 일은 상자에서 일어난다. 네모난 상자 안에서. 공간뿐 아니라 시간과 경험도 상자 안에 넣어진다. 이것들은 각각 개별 단위로 분류되어 깨끗하게 포장되고, 효율적인 의사전달을 위해 말하는 자는 듣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 새겨진 수많은 틀은 내재화된다. 외부에서 주입된 내용이 내면에 그대로 흡수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은 정기적으로 시스템이 시행하는 검사를 받는다. 갖가지 다양한 도구를 동원해 인간을 계량화하고 데이터로 전환해 더 많은 상자를 만들어낸다.
스스로 보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동떨어진 힘에 의해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는다.
모두가 좁디좁은 틈에 끼워 맞춰져 누구에게나 대체 가능한 인간으로 규격화된다.
단일한 차원에 줄 세워진 '생각'과 '행동'. 정확하게 같은 발걸음으로 열을 맞춰 줄지어 걷다가 똑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역동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잠재적 에너지는 감소되고 그 활기를 완전히 잃었다. 대신 단조로움만 덩그러니 남았다.
마르쿠제가 말했듯, "이 세계가 정한 조건 속에 위축되어 살아온" 그들은 의지를 결여한 실체없는 그림자로만 존재한다.
플랫랜드인들 같이 우리도 관점의 한계라는 틀 속에 꼼짝없이 갇혀 있다.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채. 뿌리 깊은 패턴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구가 정사각형에게 했던 것처럼 정신적인 충격을 주어야 한다.
쿠바 출신의 이탈리아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성이 위협받는 것 같을 때마다 늘 신화 속 페르세우스처럼 다른 공간으로 날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이성적 세계나 꿈속으로 도망치자는 말이 아니라 접근 방식을 달리 하자는 뜻이다. 과거와 다른 시각, 다른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새로운 방법으로 인식과 검증에 나서는 것이다. 새로운 접근 방식은 앞으로 우리가 떠날 여행의 목표와 완전히 부합한다. 다시 말해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발견하고, 수많은 가능성의 문을 열고, 생생하게 깨어 있기 위한 '신선한 방법'을 찾는 것이다.
우리 두 눈 사이에 공간이 있다는 것은 각각의 눈에 시각이 존재한다는 뜻이고 따라서 하나의 '올바른' 시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 번에 한 쪽식, 눈을 가리고 번갈아 보면 이 사실은 더 분명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변화, 즉 시차 덕분에 우리는 대상과의 거리를 인지할 수 있다. 두 관점의 통합이 곧 입체적 시각을 창조한다. 두발로 걷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보는 행위 역시 서로 다른 두 원천 사이에서 발생하는 지속적인 대화라 할 수 있다.
'입체화unflattening'란 다양한 관점을 동원해 새로운 방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행위다.
인류가 만들어온 다양한 렌즈 덕분에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확장되었다. 그러나 이 렌즈는 시야의 폭을 협소하게 만들고, 우리는 렌즈를 통해 나타난 관점을 실재reality라고 착각한다. 단일한 관점에 의지하면 전체적인 그림을 파악할 수 없다. 고정된 관점, 즉 천편일률적인 사고는 함정이 될 수 있다. 찾고자 하는 것만 보는 함정. 다른 세계를 보기 위해서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기존의 통념이 뒤집히고 유일하게 '옳은' 관점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각기 다른 시점을 유지한채 대화에 참여한다. 각각 나란히 존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로 교차하고, 맞물리고, 교류하고, 결합하고 정보를 교환한다. 두 눈이 결합해 입체적 시각을 완성하는 것처럼 서로의 궤도를 도는 다양한 관점은 연결되고 상호작용하고 중첩되다가 새로운 관점의 등장을 촉발한다. 수많은 생각이 날실과 씨실을 이루어 춤을 추듯 얽히고 설키면 공통 기반이 형성된다. 이질적인 것들이 풍성히 얽혀 있는 직물 그 위에서 문제와 대면하고 차이를 인정하며, 복잡한 것은 복잡한 대로 남겨 둔다. 현존하는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경계는 서로 연결된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경직되고 닫힌 사고방식은 상호 연결된 포괄적 관계망에서 재구상된다. 각각의 관점이 그대로 유지되면서도, 더 이상 고립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관점과 소통하며 지속적으로 서로서로 정보를 교환한다. 이처럼 새롭게 통합된 지평에서 더욱 포괄적인 이해의 가능성이 펼쳐진다.
제임스 카스는 "제한적인 것은 우리의 시야이지, 우리가 보는 대상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끊임없이 시야 너머의 존재를 추구하는 것, 바로 호기심이다.
다차원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은 다시 말해 그 주변을 다양한 각도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 우리는 다른 각도에서 사물을 관찰할 수 있고, 바로 놓을 수도, 뒤집어놓을 수도 있다. 관점을 바꾸면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이해의 폭을 넓힌다.
이미지는 '존재 자체'를, 텍스트는 '어떤 견해'를 표현한다. 사유를 표현하는 주요 수단으로 텍스트에만 의존하게 되면 언어의 선형적 구조 바깥에 있는 것들은 무시된다. 그리고 그 위로 '비이성적'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위쪽'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플랫랜드인처럼. 시각적인 것은 문자가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한다. 우리는 무엇을 놓쳐왔을까? 대상에 '대한' 사유뿐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보려고 할 때 무엇이 시각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가?
만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을 재구성하기 때문에 보다 높은 차원의 시각을 제공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시각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만든 족쇄를 풀고 답답한 틀을, 상식의 틀을 벗어날 수 있다.
사물들의 깊이는, 아른하임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들(현상)"과 "존재해야 할 것들(본질)"을 비교함으로써 우리에게 넌지시 전해진다.
레이코프와 존슨, 라파엘 누네스에 따르면 인간이 인식하는 근본 개념은 탈육체화된 순수한 이성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우리가 존재하고 보는 것에 뿌리를 둔다. 즉, 일상적 지각 활동 및 신체 활동을 통해 우리는 이미지와 유사한 역동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우리는 경험을 체계화하고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이미지의 구조는 우리의 지각적 의식 기저에서 작동하여 생각과 행동을 형성한다. 구체적 경험은 이미지 구조의 주춧돌 역할을 하고, 이로부터 우리는 사고 능력을 신장시키며 보다 추상적인 개념을 만들어진다. 우리는 기존 지식을 토대로 새로운 개념을 이해한다.
우리는 본래 아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이해한다. 다시 말해 유사하지 않는 것들끼리 엮으며 새로운 지식을 구축한다. 이를 두고 바버라 스태퍼드는 "그럴듯한 인어를 만드는 상상력의 노동"이라 비유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이 본래 시각적인 과정이라 주장했는데 관계 안에서 사물을 보는 행위는 분리된 대상을 연결해 그리는 작업이다. 여기에는 단 하나의, 객관적인 관점이란 없다. 우리는 다양한 시각을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지각을 한다. 고정된 시각은 관계 속 역동적인 관찰을 방해한다. 지각은 불필요한 과정이 아니다. 장식이나 잡생각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지각은 사유와 불가분의 관계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 서로 없어서는 안 될 동반자다. 사유와 관찰을 재통합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는 사유와 그 정의에 관한 개념을 확장한다. 루트번스타인에 따르면 예술에 조예가 깊은 과학자들이 새로운 발견에 있어 분명 유리하다. 그들은 탁월한 예술 감각으로 사물과 현상에 다른 측면에서 관찰하고 놀이를 즐기며 관련성을 파악한다. 이로써 그들은 문제를 폭넓게 바라볼 수 있다. 뛰어난 사상가를 탄생시키려면 뛰어난 관찰자를 먼저 육성해야 한다.
다양한 관점으로 무장하면 다차원적 시야을 확보할 수 있다. 플랫랜드의 구처럼 기존 장벽들이 와르르 무너지고 창의적인 가능성이 흘러넘친다.
상상력 덕분에 우리는 제한된 기존의 관점을 넘어 존재하지 않는 시각이나 접근 불가능한 차원을 발견할 수 있다.
서로의 차이를 뛰어넘어 타인의 이해 방식을 경험하려면 기꺼이 상상력을 통한 도약이 있어야 한다.
에티엔 펠러프랫과 마이클 콜이 설명했듯 상상력은 시각 정보의 빈틈을 메우고 파편화된 장면들을 연결해 안정적인 단일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 이미지 덕분에 우리는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다. 이미지는 곧 상상하는 행위이며 우리는 늘 그 행위에 참여한다.
경계를 나누는 장애물이자 동시에 가교 역할을 하는 문의 이중성을 생각해보자. 문은 출입인을 차단하는 동시에 그가 경계 안으로 들어오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위에서 보면 문은 평면이면서 그렇지 않기도 하다. 경첩이 있기 때문에 열릴 가능성이 있고 그를 통해 준거들을 통과시키거나 내친다. 이야기 또한 일종의 문과 같아서 그 문이 열리면 우리는 그것을 탈것 삼아 이동한다. <아라비안나이트(천일야화)> 속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가 보여주듯 이야기는 우리를 붙잡아 자유로운 공간으로 데려간다.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해 타인의 관점으로 보고 타인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고 타인의 경험을 내 이야기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분명히 하자면, 여기서 이야기란 단지 신비로운 설화뿐만 아니라, 인간의 경험에 틀을 만들어 그 틀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부분의 활동을 뜻한다.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견고한 형식을 부여하는 구조물을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천체와 지구의 움직임을 관측하기 위해 인간이 고안한 도구가 거꾸로 루이스 멈퍼드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을 일치시키는 메커니즘"으로 변모했다.
'우리는 제대로 이해했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개념을 돌에 새기면, 우리는 반성없이 그것을 그대로 따를 위험이 있다. 자신의 모습을 한 번도 망각한 적 없는 영웅 페르세우스와 달리, 인간은 질문을 멈추는 순간 메두사와 눈을 마주치기라도 한 듯 온몸이 얼어붙고, 죽은 것과 같은 상태, 방전 상태가 된다.
오랜 시간 한 가지 일을 반복하다 보면 우리는 그 일에 능숙해진다. 그것이 하나의 습관으로 굳어지면 같은 동작을 매번 학습할 필요가 없어진다. 처음 익힐 때는 고생스럽지만 금세 제2의 본성, 즉 습관이 된다. 그러나 존 듀이가 경고했듯 이 과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른바 '가소성'이 오히려 우리를 습관의 노예로 만드는 주범이 되면서, 우리는 점차 유연성을 잃어 간다.
늘 같은 경로를 오가는 통근길은 한 사람의 세계를 축소시킨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나의 아내가 매번 다른 길로 출퇴근한다고 해보자. 이는 그녀의 인식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된다. 새로운 길에서 그녀는 시시각각 색다른 풍경을 경험하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 갈 것이다. 국제상황주의 예술운동이 제안한 '데리브(derive, 표류)' 개념과 흡사하게 걷기는 목표 지향의 여정이 아니라 자유롭게 즐기듯 표류하는 여행으로 간주된다. 즉 통근길이 오로지 목적지만을 향해가는 여정이 아닌 놀이하듯 이동하는 여행이 된다. 일상적인 것 너머의 낯선 차원으로 몸을 던지려면 우리의 시야는 열려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상상력으로 가득한 춤사위는 활발하고 생생하게 유지해야 한다. 우스꽝스러운 걸음을 걸어보는 매우 단순한 시도만으로 우리는 그렇지 않다면 보지 못했을 다른 차원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된다.
서로 다른 별개의 개념들을 머릿속으로 한데 엮어 개념 틀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해 지평을 넓혀 나간다.
꼭두각시의 일상은 시계태엽처럼 정확히 흐른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식사를 한다. 꼭두각시는 그렇게 자신의 역할을 충직하고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일상은 변함없이 순조롭게 흐르는 듯했으나 예기치 않은 사건이 일어나고, 그는 대본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뭔가가 꼭두각시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며, 엄청난 허기를 몰고 왔다. 별것 아닌 아주 사소했던 것이 점차 그 경계를 허물며 몸집을 키운다. 그리고 꼭두각시의 모든 의식 영역에 침투한다. 아무 말도 하진 않지만 호기심을 끄는 이 방문객(애벌레)은 꼭두각시가 익숙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크게 뒤흔들어 놓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생명이 말을 걸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깨닫는다. 너는 누구니? 이 말을 끝으로 그 생명은 몸을 반으로 접어 거꾸로 매달렸다(번데기로..). 그러자 꼭두각시가 보는 세상 또한 뒤집혔고 마음에 잔상으로 남은 질문만 계속해서 메아리쳤다. 지금껏 자신을 옭아맸던 줄의 존재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철학은 놀라움과 함께 시작된다" - 알프레드 화이트헤드
사자死者와 같은 무리가 연이어 행진한다. 숨 막히는 대기를 가르는 한 줄기 불꽃, 타성을 향한 이 벼락은 매끄럽고 획일적인 '외관'들의 그럴듯한 허울을 부수고 우리가 평면적 존재가 아님을 폭로한다.
이러한 자각은 자신과 주변 환경을 성찰하는 능력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실재하는 동시에 사라질 수 있고 분리된 동시에 서로 연결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동시에 여러 다양한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기계적이면서도 개념적인 렌즈를 통해 시야를 확장해왔다. 덕분에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었고 보다 높은 차원에 접근할 수 있었으며 (<플랫랜드>의 구는 인정하지 않을지언정) 그 덕분에 우리 내부를 관찰할 수 있게 되었고 비로소 우리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경험 및 상호작용. 우리를 씨줄과 날줄로 엮고 있는 사회적 직조물.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목적으로 모든 사회적 유대를 끊을 수는 있다.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런 상태로는 그저 부유하게 되고, 우리 존재의 본질을 이루는 것들로부터 분리될 뿐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 브뤼노 라투르에 따르면 진정한 해방은 '유대로부터의 탈피'가 아닌 '진정한 결속'이다. 연결망의 끈은 계속 이어진다. 보다 많은 연대의 끈을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결속을 제약이 아닌 동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항해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유럽의 탐험가들은 데카르트가 사용했던 분리 방법을 선택했다. 길을 안내할 항해 도구에 의지해 울렁이는 3차원 세상을 평평한 격자판에 축소해 그려 넣은 것이다. 태평양 제도 원주민들이 만든 막대 지도는 위의 지도와 외관상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상 이 막대 지도는 위치 정보가 아닌 해류와 조류의 흐름을 묘사한다. 이 지도에는 바다와 하늘에 관한 상당한 수준의 지식이 담겨 있다. 이런 지식은 대개 집단적 서사로 대를 이어 전해 내려온 것이다. 그들의 복잡한 자연환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별과 새들 풍랑의 패턴 기단과 조류 바다 깊은 곳에서 반짝이는 해정 생명체들, 이 모든 것이 생생하게 신호를 보낸다. 그들은 이렇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궤도, 벡터를 통해 길을 찾는다.
이제 다시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자. 존 듀이는 이 본질을 외부로부터 채워질 수밖에 없는 공허한 무엇이 아닌 "분명히 지니고 있는 힘"으로 정의했다. 즉 '발전될 잠재력'이다. 그런 힘은 안으로 끌어당기는 동시에 밖으로 뻗어나가므로 시작과 끝 지저을 확인하기 어렵다. 우리는 이처럼 고정된 존재도, 종료된 존재도 아니다. 우리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힘의 상호작용으로, 즉 벡터들의 수많은 조합으로 탄생하며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 변할 수 있고 변하기 쉬운 특성을 지닌다.
자녀는 당신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생명의 열망으로 태어난 아들이며 딸입니다. ... 당신은 활이요, 당신의 자녀는 이미 당신을 떠난, 살아 있는 화살입니다. - 칼릴 지브란
우리는 평면적이고 협소한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변화무쌍한, 다양하 관점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다차원 지각 능력과 역동적 능력이 모두 필요하다. 물론 표준화도 쓸모가 있다. 그러나 타인의 기대에 따르는 태도는 좋지 않다.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으면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렵듯이. 서로의 차이와 고유한 우리 존재의 구성 방식을 무시하면 우리는 민첩성을 잃게 된다.
각기 모양이 다른 우리 두 발처럼 우리 모두가 자신만의 길을 스스로 개척할 때 어떤 가능성이 눈앞에 펼쳐지는지 살펴보자. 신는 이에 따라 신발 사이즈가 달라지듯이.
본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해한다는 것은 '저것'과의 관계에서 '이것'을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관점들을 취하고 서로 엮는다 해도 그 사이의 공간은 붕괴되지 않는다.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의 관점의 종결도 아니며 관점을 종결시키는 과정도 아니다. 각각의 관점이 관계 안에 새롭게 참여함으로써 또 다른 관점이 탄생한다. 관점 간의 거리는 항상 남아 있다. 미지의 공간, 상상력이 흘러나올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불완전함은 새로 발견할 것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표다.
우리는 축적된 경험을 나침반 삼아 방향을 찾지만 때로는 이 경험의 무게가 여정을 짓누르기도 한다. 우리 눈의 시선의 끊임없는 움직을 통해 관점을 새롭게 하듯 사유를 촉발하고 전복하는 수단 역시 역동적인 관계 안에서 발견된다. 우리는 '언플래트닝unflattening'을 통해 세상을 향해 눈을 뜬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게 된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교육 공장의 상자 안 학생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시체의 안구 같은 말간 흰 벽이 응시하는 가운데 송장처럼 색을 잃고 우주의 맥락에서 분리된다. 우리는 본래 세상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지만, 그런 유쾌한 행위는 이른바 훈육이라는 미명 하에 속박당하고 묵살당한다. 훈육은 기민하고 쉴 새없으며 대자연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얻기를 갈망하는 아이들의 감수성을 죽인다. 우리는 박물관에 전시된 시체 표본과 같이 무기력하게 책상에 앉아 있고, 꽃잎에 떨어진 우박처럼 누군가의 일방적 가르침이 떨어진다.
한 팀 안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는 데는 다양성과 차이가 중요하다. - 스콧 페이지
타인이 재단한 삶의 기준과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벗어나면 '이방인'으로 취급당하고, 부적격자로 낙인 찍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 할 필요 없다. 내 삶은 내 것이다.
[본문발췌]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謹弔).' 그것만으로써는 아무런 뜻이 없다. 아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런 소리를 사장에게도 한 일이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그런 말을 해 본댔자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차피 사람이란 조금은 잘못이 있게 마련이니까.
내가 뒤로 돌아서기만 하면 일은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햇볕에 진동하는 해변 전체가 내 뒤에서 죄어들고 있었다. 나는 샘으로 향해 몇 걸음 나섰다. 아랍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래도 아직 내게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얼굴 위에 드리운 그늘 탓이었던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기다렸다.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듯했고 땀방울들이 눈썹 위에 고이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것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특히 그날과 똑같이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대가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지끈 거렸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 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걸음, 다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은 채 단도를 뽑아서 태양 빛에 비추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하자, 길쭉한 칼날이 되어 번쩍하면서 나의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눈썹에 맺혔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 미지근하고 두꺼운 막이 되어 눈두덩을 덮었다.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려서 나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앞으로 뻗어 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타는 듯한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쏟아붓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해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사람은 무엇에나 결국은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감옥에 있으면 시간관념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나도 분명히 일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러한 것이 나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었다. 한나절이 얼마나 길면서도 동시에 짧을 수가 있는 것인지 나는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지내려면 물론 길게 느껴지지만 날들이 어찌나 길게 늘어지는지 하루가 다른 하루로 넘쳐 나서 경계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하루하루는 그리하여 이름을 잃어 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어제 혹은 내일 같은 말만이 나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피고석에 앉아서일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는 것은 언제나 흥미 있는 일이다. 검사와 변호사 사이에 변론이 오가는 동안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아마 내 범죄에 대해서보다도 나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과연 양쪽의 변론은 큰 차이가 있었던가? 변호사는 두 팔을 쳐들어 올리고 유죄를 인정하되 변명을 붙였다. 검사는 양손을 앞으로 뻗치며 유죄를 고발하되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로서는 어딘가 좀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다. 조심을 하기는 하면서도 때로는 나도 한마디 참전을 하고 싶었다. 그러면 변호사는, "가만있어요. 그래야 일이 잘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나를 빼놓은채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참여도 시키지 않고 모든 것이 진행되었다. 나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때때로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니 도대체 누가 피고입니까? 피고라는 것은 중요한 겁니다. 내게도 할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생각해 보면, 할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얻는 데서 맛보는 흥미는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검사의 변론이 나에게는 곧 따분하게 느껴졌다. 나의 관심을 끌거나 흥미를 일으킨 것은 다만 단편적인 말들, 몸짓들, 혹은 전체와는 동떨어진 한 토막의 장광설, 그러한 것들뿐이었다.
재판장이 잔기침을 하고 나서 아주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덧붙여 할 말은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야기하고 싶었으므로 일어서서 그저 생각나는 대로, 아랍인을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재판장은 그건 하나의 의사표시라고 대답하고, 지금까지 자기는 나의 변호 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변호사의 말을 듣기 전에 내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동기를 분명하게 말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빨리 좀 뒤죽박죽이 된 말로,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말인 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장내에서 웃음이 터졌다.
내 변호사의 변론은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엔가 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죽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고 그가 말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그는 그런 투로 계속하면서 나에 대해서 말할 적마다 '나는'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매우 놀랐다. 나는 간수에게로 몸을 굽혀 그 이유를 물었다. 간수는 잠자코 있으라고 말하고 조금 있더니, "변호사들은 모두 그런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것도 또한 나를 사건으로부터 제쳐 놓고 나를 무시해 버리는 것이고, 어떤 의미로는 그가 나 대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벌써 그 법정에서 아득히 멀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내 변호사도 내겐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그가 나가 버린 뒤에, 나는 평정을 되찾았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침상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눈을 뜨자 얼굴 위에 별이 보였으니 말이다. 들판의 소리드리 나에게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밤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가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잠든 그 여름의 그 희한한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들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작품해설> 중에서
예술가와 예술 작품. 진정한 예술 작품은 가장 말이 적은 작품이다. 한 예술가의 총체적 경험, 가의 생각+삶(어느 의미에서 그의 체계 - 이 낱말이 내포하는 조직적인 면은 빼고)과 그의 경험을 반영하는 작품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다. 예술 작품이 그 경험을 문학적 장식으로 포장하여 모조리 다 보여 준다면 그 관계는 좋지 못한 것이다. 예술 작품이 경험 속에서 다듬어 낸 어떤 부분, 내적인 광채가 제한되지 않은 채 요약되는 다이아몬드의 면 같은 것일 때 그 관계는 좋은 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과잉 장식과 수다스러운 문학이 있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그저 그 풍부함이 짐작만 될 뿐인 온갖 경험의 암시로 인하여 풍요로운 작품이 있게 되는 것이다. <작가수첩 I>, 147~148 쪽
묘사하는 작품과 설명하는 작품을 서로 조화시킨다. 묘사에 그 진정한 의미를 부여한다. 묘사는 그 자체만으로는 멋진 것이긴 하지만 아무것도 가져다 주는 것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한계가 의도적으로 설정된 것임을 느끼게 해 주면 된다. 이렇게 되면 한계는 사라지고 작품은 '울림'을 갖게 된다. <작가수첩> 195~196쪽
3월. 이 어두운 방에서 - 갑자기 낯설어진 한 도시의 소음을 들으며 - 이 돌연한 잠 깨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모든 것이 낯설다. 모든 것이, 내게 낯익은 존재 하나 없이, 이 상처를 아물게 해 줄 곳 하나 없이,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이 몸짓, 이 미소는 무엇과 어울리는 것인가?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다 - 다른 곳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세계는 내 마음이 기댈 곳을 찾지 못하는 알지 못할 풍경에 불과하다. 이방인, 그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다.
이방인, 내게 모듯 것이 낯설다는 것을 고백할 것.
모든 것이 분명해진 지금, 기다릴 것, 그리고 아무것도 빠뜨리지 말 것. 적어도 침묵과 창조를 동시에 완전하게 하는 방식으로 일할 것. 그 밖의 것은 모두, 그 밖의 것은 모두, 어떤 일이 생기건 상관없다. <작가수첩 I>, 232쪽
"끔찍한 고독. 사회생활에 대한 약으로서: 대도시. 이제 이것은 현실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사막이다. 여기서 육체는 더 이상 자랑이 아니다. 육체는 보기 흉한 살갗에 뒤덮여 숨겨져 있다. 오직 있는 것은 영혼뿐이다. ... 그러나 영혼은 또한 그의 유일한 위대함, 즉 침묵 속의 고독도 가지고 있다." <작가수첩 I>, 236쪽
"소설이란 어떤 철학을 여러 가지 이미지들로 구체화한 것에 불과하다. 좋은 소설에는 철학이 송두리째 이미지들로 변해 있다." - 카뮈의 샤르트르 <구토>에 관한 서명 중에서
"그렇다. 모든 것이 단순하다.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다. 우리들에게 헛된 수작은 하지 말라. 사형수에 대해 '그는 사회에 대한 빚을 갚게 될 것이다'라고 하지 말고 '이제 그의 목이 잘릴 것이다'라고 하라. 이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좀 차이가 있다. 그리고 세상에는 자신의 운명을 두 눈으로 직시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 <긍정과 부정 사이에서> 사형수에 대한 언급
이처럼 텍스트의 암시적 지표들 속에 숨어 있는 죽음은 <이방인>전체의 주제인 동시에 그 형식을 지탱하는 창조적 충동으로 작용한다. 한편으로 어머니의 죽음과 뫼르소의 사형은 소설의 양쪽 끝, 즉 소설이 시작되기 전과 소설이 마감된 뒤에 어느 지점으로부터 '숨결' 혹은 '바람'의 모습으로 불어와서 소설의 한복판, 살인이라는 '구심점'에서 서로 만난다. 또한 그와 반대로 법정은 오직 소설의 시작에 위치한 어머니의 죽음 쪽으로만 관심을 보이며 뫼르소의 행동을 해석하고 뫼르소 자신은 오직 미래에 다가올 자신의 죽음 쪽으로만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일종의 '원심력' 운동을 나타낸다. 즉 재판부와 피고는 소설의 중심인 살인사건에서 소설의 시작과 끝 쪽으로만 향하는 힘의 방향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두가지 서로 상반된 힘의 운동은 서로 대칭, 균형을 이룬다. 따라서 소설의의미는 죽음이라는 주제에 기반을 둔 1부와 2부 사이의 평행 관계로부터 산출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모두 다 "사형수"다. 삶의 긑에서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확신이 인간을 사형수로 만들어 놓는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 운명에 처해져 있는 것이다. 사형수는 죽음과 정대면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가치를 깨닫는다. 죽음은 삶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어두운 배경이며 거울이다. 삶과 죽음은 표리 관계를 맺고 있다. 필연적인 죽음의 운명 때문에 삶은 의미가 없으므로 자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한정된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이 소설의 참다운 주제는 삶의 찬가, 행복의 찬가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것이 이 비극적인 소설의 진정한 결론이다.
<작가연보> 중에서
"기계 문명의 야만적 횡포가 극에 달했다. 멀지 않은 미래에, 집단자살이냐 아니면 자연과학적 성과의 현명한 사용이냐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 <인류에게 쏟아지는 공포의 전망>, 1945년 히로시마 원폭 투하 직후
"세계의 어느 한 구석에서, 한 노동자가 탱크 앞에서 맨주먹으로 자기는 노예가 아니라고 외치며 대항할 때, 우리들이 이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 1953년 동베를린에서 노동자 봉기 후 뮈튀알리테 회관에서 가진 연설 중
'워라밸' (Work and Life Balance), 러셀은 1930년대에 '워라밸'을 이야기하고 있다.
[본문발췌]
복잡하기 그지없는 현대 사회에 필요한 것은 도그마엔 언제든 의문을 제기하는 마음 자세와 모든 다양한 관점들에 공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차분하게 숙고하는 일이다.
※ 도그마 : 독단적인 신념이나 학설
(게으름에 대한 찬양)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 사회에 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일이다.
그렇다면 일이란 무엇인가? 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지표면 혹은 지표면 가까이 놓인 물질을 다른 물질과 자리를 바꿔 놓는 일이다. 또 하나는 타인들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시키는 일이다. 첫번째 종류의 일은 즐겁지 못하고 보수도 박하다. 두 번째의 일은 즐겁고 보수도 높다. 또한 이 일은 무한히 확대될 수 있어서 지시를 내리는 사람들뿐 아니라 어떤 지시를 내려야 할지에 대해 조언해 주는 사람들도 있다. 흔히, 조직화된 두 개의 집단에서 정반대되는 두 가지 조언이 동시에 나오게 마련인데 이게 소위 정치역학이다. 이런 류의 일을 하는 데 요구되는 기능은 어떤 조언을 할 것인가라는 주제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말과 글로써 설득하는 기술, 즉 선전에 관한 지식이다.
모든 도덕적 자질 가운데서 선한 본성은 세상이 가장 필요로하는 자질이며 이는 힘들게 분투하며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전에서 나오는 것이다.
현대의 생산 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
현대의 지식은 평균적 건강 수준을 엄청나게 진보시켰지만 동시에, 대도시를 독가스로 전멸시키는 방법도 찾아 냈으니....
아이들에게만 놀이가 필요한 게 아니다. 어른에게도 현재의 즐거움 이외엔 아무 목적도 없는 행위에 빠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놀이가 제 구실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과 관계 없는 부분에서도 기쁨과 흥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현대의 도시인들은 점점 더 수동적이고 집단적인 여흥, 즉 다른 사람들의 능란한 활동을 피동적으로 구경하는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다. 물론 그런 여흥도 전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교육을 통해 일과 관계 없는 부분에서 폭넓은 지적 관심사들을 가지게 된 사람들의 여흥에 비하면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히 푸르른 것은 오직 생명의 나무' - 메피스토펠레스 <파우스트>
햄릿을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고의 극단적인 모델로 여기지만 오델로를 생각없는 행동을 경고하는 본보기로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베르그송 같은 교수들은 실리적 인간을 추구하는 일종의 속물적 사고에 기초해 철학의 가치를 깎아내리면서 한창 때의 인생은 돌격하는 기병대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볼 때 행동이란 낭만적이고 불균형한 자기 주장만 있는 터무니없이 열정적인 충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의 운명에 대한 심오한 이해에서 나올 때 최상의 행동이 된다.
행동보다 사고에서 기쁨을 찾아내는 습관은 어리석음을 막아주고 과도하게 힘을 추종하는 현상을 방지해 주는 보호막이며 불행할 때 평온을, 근심에 싸였을 때 마음의 평화를 유지시켜 주는 수단이다.
개인적인 것에만 한정된 생활은 언젠가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보다 큰 우주를 향하여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야 인생의 비극적인 단면을 이겨 나갈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특정한 정보가 아니라 전체의 시각에서 본 인생의 목적에 관한 지식이다. 여기에는 예술, 역사, 영웅적인 사람들의 인생 접하기, 우주 차원에서 볼 때 인간은 한심할 정도로 우연적이고 하루살이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지식은 인간 특유의 것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이해하고 아는 힘, 도량 있게 느끼는 힘, 올바르게 사고하는 힘을 키워준다. 비개인적인 감정과 결합된 폭넓은 인식으로부터 비로소 지혜가 솟아나오는 것이다.
개인적인 불행이든 공적인 불행이든, 의지와 지성이 상호 작용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극복될 수 있다. 의지에는 악을 피하고 비현실적인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포함된다. 지성에는 그 악을 이해하고, 치유가 가능하다면 치유책을 찾아내고, 만일 불가능하다면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벗어난 다른 영역, 다른 시대, 행성간의 공간에 놓인 심연들에는 무엇이 놓여 있나를 되돌아봄으로써 그 악을 참고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일이 포함된다.
(건축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어쨌거나 내가 주장해 온 것과 유사한 '협동 조합'의 건설은 크게 볼 때 대규모 사회주의 운동의 일환으로서만 가능하다. 이윤 동기만 가지고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윤 추구가 경제 활동을 규정하는 한, 어린이들의 건강 및 성격과 아내들의 신경은 계속 고통받게 될 것이다..... 근심과 가난과 마찬가지로 추악함도 우리가 사적 이윤이란 동기의 노예가 되어 있음으로 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인 것이다.
(현대판 마이더스)
만일 내가 곤궁할 때를 대비해 100파운드를 저축해 놓겠다고 말한다면 나는 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곤궁해지더라도 그 100파운드만은 쓰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 돈은 이미 내 재산으로서의 유효성을 상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