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적 여행이 어려운 시기. 독서, 그림, 음악, 사진을 통해 감각적, 시간적 여행을 떠나 보는 것도 좋다.

 

 

[본문발췌]

 

 

그림이란 뭘까? 그림은 명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동사이기도 한 말이다. 꿈을 꿈, 삶을 삶, 그림을 그림. 이런 말들에는 결과와 과정을 동등하게 중시하는 뜻이 읽힌다. 이런 의미에서, 그림이라고 하면 대게 종이에 남는 결과물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나에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림을 그리는 행동, 더 자세히 말해 그리는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변화이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사람은 다른 시간 속을 걷게 된다. 이 과정이 종이에 그럴싸한 무엇을 남기는 결과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누군가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어요."라고 말하면 나는 "아, 이 사람은 지금 다른 시간을 필요로 하는구나."라고 받아들인다.

 

 

이렇게 나를 되돌아 볼 수 있을 때는 바쁨을 자각할 수라도 있지만, 문제는 우리가 바쁜 상태에 너무 익숙해져 오히려 여유 시간이 주어지면 불안해한다는 점이다. 마치 여유를 즐길 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처럼. 분주함은 여행 최대의 적이자,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다.

 

 

상실을 겪었을 때 누군가와 함께 그 슬픔을 애도할 수 있으면 점진적으로 치유가 되지만, 함께 공유할 상대가 없으면 결국 트라우마가 돼 버린다.

 

 

모든 비극의 원인은 자만!

 

 

뇌의 정보 처리 과정은 '효과적인 정보 손실 프로세스' 이다. 정보의 대홍수 속에서 잘 잊어버리는 건 정말 중요한 능력이다. 그런데 정작 대화 상대를 앞에 두고, 쉴 새 없이 끼어드는 중요하지도 않은 메시지와 전화에 응답하랴, 잡을 필요도 없었던 다음 약속 때문에 끊임없이 시간을 확인하랴, 어디를 가든 주위를 끄는 모니터에서 드라마나 스포츠 경기를 틈틈이 체크하랴.... 결국 가장 중요한 걸 잃는다. 눈앞의 사람을.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212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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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도사님의 글쓰기 비법! 결국은 기본기에 대한 연습과 노력.

 

 

[본문발췌]

 

 

단어 채집 노트

예를 들어 내몸에 있는 것들부터 시작해서 단어를 채집해 본다

머리 - 대가리, 대갈통, 골, 뇌, ....

머리에 속한 관계어 - 모자, 왕관, .....

내 몸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남의 몸에도 있다. 그러므로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내 몸에 머무르지 말고, 내 방도 둘러보고, 온 동네를 둘러보고 온 나라를 둘러보아야 한다. 바다도 둘러보고 하늘도 둘러보고 사막도 둘러보고 벌판도 둘러보아야 한다.

모름지기 문장을 자유자재로 다스리고 싶다면 지극히 미세한 부분에서 지극히 거대한 부분까지를 샅샅이 훑어보고 단어를 채집하는 일에 열중하라. 쓰는 자의 고통이 읽는 자의 행복이 될 때까지..

 

 

효과적으로 글을 쓰려면 겉으로 판단되는 속성은 물론이고 보다 내면적인 속성을 찾아내는 일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그것은 사물에 대한 사유의 힘을 키우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다.

 

 

속성찾기. 사전을 활용해 단어의 속성 알아 맞히기와 오감에 따른 기본 속성을 바꾸어 본다.

  •     시각은 어떤 사물의 크기, 색깔, 모양
  •     청각은 어떤 소리의 강도, 속도, 질감
  •     미각은 어떤 사물의 단맛, 쓴맛, 매운맛, 신맛, 짠맛, 떫은맛
  •     후각은 냄새, 또 그 냄새의 자극성
  •     촉각은 감촉, 또한 그 감촉의 자극성

사물의 크기를 바꾸자(시각), 소리의 강도를 바꾸어 보는 것(청각). 시간성과 공간성 부여하기, 감정이입을 활용한다.

속성은 사전적으로 어떤 사물의 특징이나 주요 성질을 말한다. 한 단어는 여러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글은 쓰는 자의 인격을 그대로 반영한다. 사물의 속성을 파악하는 일은 사물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일이며 사물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일은 사물과의 사랑을 시도하는 일이다.

 

 

사안론(四眼論)

  •  육안은 얼굴에 붙어 있는 눈이고
  •  뇌안은 두뇌에 붙어 있는 눈이며
  •  심안은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는 눈이고
  •  영안은 영혼속에 간직되어 있는 눈이다.

사과에 비유해보면 

  •  육안(둥글다는 사실과 색깔), 
  •  뇌안(사과나무에 열린다는 사실과 비타민C를 많이 함유)
  •  심안(한 알의 사과 속에서 시를 끄집어 내거나 음악을 끄집어 내거나 그림을 끄집어 내고 그것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한다)
  •  영안(한 알의 사과 속에 만우주의 본성이 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영안을 가진 자는 온 세상에 하찮은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만물이 진실로 가치있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비로소 진실한 사랑을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깃발이 흔들리는가 바람이 흔들리는가.

 깃발이 흔들리는 것이다.

 아니다. 바람이 흔들리는 것이다.

 스님들이 깃발이 흔들리냐 바람이 흔들리냐는 명제를 두고 말다툼을 벌이고 있다. 그때 지나가던 선승 혜능이 말했다.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요 바람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바로 그대들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본성 접근하기

 속성 - 현상 - 육안, 뇌안

 본성 - 본질 - 심안, 영안

 우리는 대개 육안과 뇌안의 범주에서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심안과 영안의 범주에서 사물의 가치를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대가 만약 심안과 영안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천하만물들이 모두 보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술은 창조적 욕구로부터 출발한다. 어떤 경우에도 창조적 욕구 없이는 예술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창조적 욕구만으로도 예술에 이르기 힘들다. 창조적 욕구에 창조적 능력이 구비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남다른 시각부터 가져야 한다. 남들과 똑같은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남들과 똑같은 사고를 하게 되고 남들과 똑같은 사고를 하게 되면 남들과 똑같은 글을 쓰게 된다. 그대가 남들과 다른 글을 쓰고 싶다면 사물을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부터 가지도록 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면 그대가 알고 있는 사실 이상의 소득을 얻어 낼 수가 없다. 있는 것을 없애고 없는 것을 만들어 보는 습관부터 가져라. 물론 실제 사물에게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다. 가급적이면 의식으로 그렇게 하라는 말이다.

 

감각개발, 창작을 하건 감상을 하건 머리보다는 감각이 살아 있어야 한다.

 

 

감성사전식 반대말

 논리에 의존하는 국어사전식 반대말 : 목구멍<->똥구멍, 모래<->바위, 홑이불<->솜이불

 감성에 의존하면 : 목구멍<->골프공, 모래<->솜털, 홑이불<->대리석

 

 

비가 내리면 육신만 적시지 말고 영혼까지 적셔라

 글쓰기가 그대의 외형을 아름답게 만들어 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대의 내면은 아름답게 만들어 줄 수가 있다. 그대의 능력에 따라 독자들의 내면까지 아름답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 세상 만물은 모두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세상 만물의 이름 또한 모두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그대가 아직도 육안이나 뇌안의 범주에 머물러 있다면 어찌 세상 만물을 사랑하는 영혼을 가질 수가 있으랴.

한 음절의 단어가 사유를 거치면 어떤 울림을 가지는가?

 

 

 

인격과 문장은 합일성을 가지고 있다. 문장이 달라지면 인격도 달라진다. 인격이 달라지면 문장도 달라진다. 그대가 조금이라도 격조 높은 인생을 살고 싶다면 현재의 자신에서 탈피하라

 

 

글쓰기의 필수요건

  1. 진실 : 글로써 타인을 감동시키거나 설득시키고 싶다면 진실하라. 진실은 사실과 다르다.
    사실을 통해 그대가 얻은 감정이 진실이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궁극으로 하는 최상의 창작행위다.
  2. 소망 : 절실한 소망은 돈지갑을 뚫는다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3. 감성 : 지성은 뇌안의 범주에 속하고 인간을 아는 경지에 이르게 만들고 감성은 심안의 경지에 속하며 인간을 깨닫는 경지에 이르게 만단다. 감성은 오로지 마음에 의해서만 표출된다. 그러나 감성은 마음 바깥에 있는 것들에 의해서 척박해지기도 하고 무성해지기도 한다. 마음 바깥에 있는 것들과의 교감이 없으면 감성의 생성이나 감지나 표출은 불가능해진다. 그대가 죽은 문장으로 점철된 글을 쓰고 싶지 않다면 끊임없이 마음 바깥에 있는 것들과의 교감을 시도하라
  4. 애증 : 사랑할 수 없으면 증오라도 해라. 사랑이나 증오는 글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사랑도 눈물겹지만 증오도 눈물겹다. 예술에는 시간의 한계도 없고 공간의 한계도 없다.
    사랑을 근거로 글을 쓸 것인지 증오를 근거로 글을 쓸 것인지는 그대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그대가 진실로 감동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방관만은 금물이다. 방관은 그대의 모든 감성을 말라 죽게 만들고 그대의 모든 소망을 말라 죽게 만든다. 그것들이 말라 죽은 상태에서는 국어사전을 만들거나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제격이다.

 

 

글쓰기에서 경계해야 할 병폐들 : 가식, 욕심, 허영

  • 욕심이 잉태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불러들인다.
    글쓰기에도 욕심은 금물이다. 욕심이 들어가 있는 문장은 모두 죽어 있는 문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대가 진정한 화가가 되고 싶다면 아이 같은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라' - 고흐
    아이들은 가식도 없고 욕심도 없다. 잘 그린다는 기준도 없고 못 그린다는 기준도 없다. 단지 자기의 생각이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즐거움에 심취한다. 아이들의 그림을 보면 어떤 대가도 따라갈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다. 아이들의 그림에는 기술 이상의 진실이 담겨 있다. 그래서 보는 사람에게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대가들도 나이가 들면 아이들의 그림을 닮아간다.
  • 허영 뒤에는 정신적 빈곤이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정신적 빈곤을 겉치레로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허영 중에서도 글쓴느 사람들이 특히 매력을 느끼는 허영이 지적 허영이다. 여기에 빠지게 되면 창작을 하더라도 보고서나 논문을 연상시키는 문장들을 구사하게 된다. 소화되지 않은 학문, 소화되지 않은 철학은 글쓴이를 위선자로 만들기도 하고 읽는이를 청맹과니로 만들기도 한다.
  •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된 문장. 끊임없이 열거되는 전문용어. 철학적인 사고나 지적인 이론으로 점철된 문장. 지나치게 남발되는 외국어. 이런 허영들을 도구로 사용해서 자신이 돋보이기를 바라지 말라. 허영은 자신의 정신적 빈곤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가식이나 욕심과 마찬가지로 문장의 생명력과 설득력을 말살시킨다.
    서양의 철학의 대상은 수시로 달라졌다. 때로는 자연이 철학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종교가 철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이성이 철학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존재가 철학의 대상이 디기도 한다. 때로는 구조가 철학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혼돈이 철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수만년 동안 철학의 대상이 도(道) 하나였다.

 

 

왜 쓰는가

  •  행복해지기 위해서 쓰는 것이다.
  •  천재는 결코 위대한 존재가 아니다. 타고난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라.

무엇을 쓸 것인가

  •  쓰고 싶은 길을 써라
  •  글은 충동과 의욕에 의해서 쓰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충동과 의욕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의해서 고개를 쳐드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쓸 것인가

  • 진실하게 써라. 글쓰기에는 무엇보다도 진실이 중요하다. 아무리 뛰어난 재담가라도 자신이 감동받지 않은 소재로 타인을 감동시킬 수는 없다. 먼저 닫혀 있는 그대의 가삼부터 열어라. 진실은 머리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 속에 있는 것이다. 감동도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머리로 쓰지 말고 가슴으로 써라.

누가 읽어 줄 것인가

  • 제일 먼저 그대가 그대의 글을 읽게 된다.

글이 밥을 먹여 주는가

  • 물론 밥도 먹여 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글을 쓴다면' 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어떤 분야에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두 기량이 뛰아나다. 그리고 어떤 분야에서건 뛰어난 기량은 자신이 선택한 일에 남다른 애정을 쏟아 부어야만 얻어질 수 있는 산물이다.

 

 

그대의 의식을 밥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 채우지 말고 그대의 의식을 글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채우라.

사물에 대한 애정은 글쓰기의 기본에 해당한다. 그대가 진실로 남을 감동시킬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면 먼저 사물에 대한 거부감이나 현오감부터 몰아내 버려라. 그대 마음 바깥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물도 그대에 대한 거부감이나 혐오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대가 그것들에게 애정의 눈길을 주는 순간 그것들도 그대에게 애정의 눈길을 준다.

 

심안과 영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글을 쓰는 사람은 가급적이면 육안과 뇌안의 범주를 탈피해야 한다. 육안과 뇌안은 현상을 보는 눈이고 심안과 영안은 본성을 보는 눈이다. 육안과 뇌안에 의존해서 글을 쓰면 다변화하는 현상에 따라 글의 생명이 짧아질 수밖에 없다. 그대의 글이 오래도록 생명을 유지하기를 바란다면 심안과 영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는 어떤 사물(인간)이 하찮아(추악해) 보이는가?

그대는 그것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 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그대 자신을 먼저 혐오하거나 증오해야 한다. 그대가 눈으로 보고 사실로 여기는 것들이 반드시 사실이 아니라면 글을 쓰는 자로서의 사물과 인간에 대한 그대의 편견은 일종의 죄악이다

 

 

글쓰기의 실제

  1.  어떤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구상한다. 기승전결의 대략적인 뼈대와 거기에 따른 분량
  2.  일단 구어체로 스케치한다. 스케치는 친한 친구에게 말하듯이 구어체로 거침없이 써내려 가는 것이 효율적이다. 가급적이면 정치법에 의거해 단문을 사용하자.
  3.  문어체로 바꾼다
  4.  수식어나 수사법을 사용해서 문장을 다듬는다

 

 

세련된 문장 만들기 : 삭제하기, 절단하기, 수식하기

 적절한 수식어는 문장에 설득력과 생명력을 부여해 주지만 남발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수식어를 많이 쓸수록 유식해 보인다는 생각도 버리고 수식어를 많이 쓸수록 아름다운 문장이 되다는 생각도 버려라. 그런 생각들이 가식을 불러들인다.

 

 

수사법 : 비유법, 강조법, 변화법

 1) 비유법 : 직유법, 은유법, 활유법, 대유법

 2) 강조법 : 과장법, 반복법, 점층법

 3) 변화법 : 설의법, 돈호법, 대구법

  • 직유법 : 어떤 사물이나 개념의 유사성을 토대로 처럼, 같이, 듯이, 인양 등의 조사를 붙여서 표현. 먼저 대표속성으로 유사성을 찾아서 비유
  • 은유법 : 은유법은 표면적 유사성보다 내면적 동일성을 중시한다. 그래서 사유를 통해서 찾아낸 의미를 전달할 때 매우 유용하게 쓰인다. '무엇은 무엇이다' (내 마음은 황무지), '무엇은 무엇의 무엇이다' (해파리는 바다의 방랑자). 직유법은 속성에 근거를 두고 있고 은유법은 본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 활유법 : 무생물을 생물처럼 표현
  • 의인법 :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처럼 표현
  • 제유법 : 사물의 일부로 자체나 전체를 대신해서 표현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동물이다)
  • 대유법 : 사물의 속성으로 자체나 전체를 대신함 (너는 집안의 기둥이다)

 

 

문학은 예술이다.

 사람과 세상을 정서적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글이라면 문학이라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창조성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시는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감정응로부터의 탈출이고, 인격의 표현이 아니라 인격으로부터의 탈출이다' - 엘리엇

사람들은 흔히, 저는 시를 잘 모르는데요, 라고 말한다. 당연하다. 시는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느낄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일차적인 목적은 감동이다. 그러나 머리는 감동을 모른다. 따라서 예술을 머리로 이해하겠다는 소치는 수학을 가슴으로 풀겠다는 소치와 동일하다.

 

 

감정이입 : 자신이 다른 사물이 되어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시인은 모든 실체와도 합일이  가능하고 모든 의식과도 합일이 가능하다. 그것이 시인의 자격이다. 따라서 시인은 위대하면서도 숭고한 존재다. 오로지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은 결코 시인이 될 자격이 없다.

 

 

사랑은 대상에 대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발아한다. 그런데 대상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어떻게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으며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사랑을 할 수가 있겠는가.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랑이 필요하다. 이성간의 사랑도 필요하지만 만물과의 사랑도 필요하다. 그대가 진실로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그대가 먼저 만물에게 눈길을 주어라. 만물에게 눈길을 주는 일이 만물과의 사랑을 시작하는 일이다. 그대가 만물에게 눈길을 주는 순간 만물도 그대에게 눈길을 준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그대의 심안도 열릴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이유는 만물을 사랑할 수 있는 가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후회 없는 인생이란 많은 것들을 사랑하면서 살아온 인생이다. 우리는 수시로 우리들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들에게 눈길을 주면서 그것들에게 사랑을 느꼈는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가슴 안에 사랑이 간직되어 있지 않은 인간은 결코 예술을 느낄 수도 없으며 예술을 행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유시형 곤충(날개가 있는 곤충)과 무시형 곤충

그대가 만약 곤충으로 환생한다면 어느쪽을 선택하겠는가?

절대고독이 두렵고 등껍질이 찢어지는 아픔이 두렵다면 무시형 곤충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대는 오로지 먹고사는 즐거움 하나로 만족하면서 밑바닥을 기어다닐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나 날개를 가진 곤충들은 거의가 아주 소량의 먹이만으로 생명활동을 영위한다. 그것들은 먹이를 최상의 즐거움으로 삼는 단계를 벗어난 생명체들이다. 기어 다니는 생명체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들이다. 그것들에게는 하늘을 날아 다니는 즐거움이 있다.

'날개가 없는 곤충들은 대부분 집단적으로 먹이를 공격하거나 남이 잡아놓은 먹이를 훔치거나 상처 입은 먹이를 찾아 헤매거나 다른 동물의 몸에 기생하거나 함정을 만들어 놓고 먹이가 지나가기를 끈질기게 기다려야 한다. 날개를 가진 곤충들에 비하면 다소 치사해 보이는 생존법이다.'

적어도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몇 번씩이라도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나기를 소망하라. 그대 스스로 몽상의 고치 속에 고립되어 절대 고독을 감내하고 등껍질이 찢어지는 아픔을 감내하라. 그것이 글을 쓰는 자로서의 올바른 정신상태다.

 

 

소설은 허구다. 그러나 진실을 바탕으로 해서 창조된 허구다. 사실과 진실은 엄연히 다르다. 사실은 마음 밖에 존재하는 실제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진실은 마음 안에 존재하는 감정에 근거를 두고 있다.

 

 

글쓰기의 성패는 기술의 탁마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탁마로 결정되는 것이다.

 

 

장인정신 : 장인은 전문적인 기능과 도덕적인 품성을 중시한다. 자신이 만드는 물건에 자신의 혼을 불어넣어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최선을 다한다.

 

 

소설의 기본 요소 : 주제, 구성, 문체

  • 주제. 존재에 대한 궁극적 의문이나 현상에 대한 궁극적 의문들은 주제와 직결된다. ....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고 해답을 탐구하라. 그러는 동안에 저절도 그대의 의식이 깊어지고 그대의 의식이 깊어지면 소설의 주제도 선명해진다. 그러나 정답은 없다.
    그대가 만약 교육이라는 제도적 장치 속 에서 정답찾기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이라면 아직도 분별심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다닐 것이다. 분별심은 어떤 대상을 옳고 그름, 크고 작음, 길고 짦음, 많고 적음, 있고 없음 따위의 잣대로 가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분별심이라는 잣대로 대상을 가름한 정답들은 모두 부분과 순간을 보고 판단한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은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견성의 산물이다. 작가는 정답을 찾아서 독자들에게 글로 전달해 주는 존재가 아니라 깨달음을 통해서 얻어낸 정서를 독자들에게 글로 전달해 주는 존재다.
    시인 서정주가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고 노래한 것도 깨달음의 결과다. 그리고 소설과 헤르만 헤세가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라고 설파한 것도 깨달음의 결과다.
  • 구성의 기본 요소 : 인물, 사건, 배경
    • 음양오행에 근거한 창의적 인물구도
      상생 : 수->목->화->토->금->수
      상극 : 수<->화<->금<->목<->토<->수
      목의 성질을 가진 사람 : 나무는 끊임없이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는다. 이상주의자
      금의 성질을 가진 사람 : 쇠는 쉽사리 형체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고집이 세고 자기주관이 뚜렷한 사람
      수의 성질을 가진 사람 : 유연하면서도 다양한 변화를 가진다. 적응력이 좋다. 쉽게 뜨거워지고 쉽게 차가워진다.
      화의 성질을 가진 사람 : 정열적이다. 화를 잘 낸다. 냉철하지 못하다.
      토의 성질을 가진 사람 : 포용력을 가지고 있다. 헌신적이다 성격이 원만하다.
    • 사건 : 발단, 전개, 절정, 결말
      소설에는 우연이 없다. 소설에는 합리성과 필연성이 있을 뿐이다.
    • 배경 : 시간적 배경(시대, 계절, 날짜), 공간적 배경(장소, 물건, 위치)
  • 문체 : 길이에 따라 만연체/간결체, 느낌에 따라 우유체/강건체, 수식에 따라 화려체/건조체
    서술적 문체와 묘사적 문체. 묘사적 문체는 감각의 정밀성을 요구한다. 평소 사물을 건성으로 보아 넘기는 습관을 버려야만 묘사적 문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다. 유능한 주방장은 먹어서 즐거움을 느끼는 음식을 만들지 설명해서 즐거움을 느끼는 음식을 만들지는 않는다. 서술적 문체가 독자들에게 육개장이 맛있다고 말해 주는 수준이라면 묘사적 문체는 독자들에게 육개장을 먹여주는 수준에 해당한다.

 

 

자기만의 목소리를 가져라. 자기 세계를 구축하라!

  1. 인간을 탈피하라. 바람이 되거나, 먼지가 되거나, 풀꽃이 되거나, 물새가 되거나, .... 명색이 작가가 되기를 꿈꾸는 자로서, 시종일관 뻔뻔스럽게 인간으로만 살아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
  2. 현실을 탈피하라. 글을 쓰는 순간에는 불가능이 존재하지 않는다. 문학은 과학을 초월한다. 시공의 제약으로부터 무한히 자유로울 수 있다. 적대로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적어도 글을 쓰는 순간만은 그대가 바로 절대자다.
  3. 지식을 탈피하라. 그대가 지식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무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과 진배없다. 자신이 무엇에 대해 안다고 말하는 것은 곧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무한과 연계되고 있다. 그대가 무엇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지극히 작은 부분이거나 순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식이 쓸모없다거나 하찮다는 뜻이 아니다. 그대가 작가를 지망한다면 지식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가급적이면 지식을 발효시켜 깨달음에 접근토록 하라는 것이다. 그대가 대한민국에서 교육과정을 통해 학습한 내용들은 모두가 진리가 아니라 현상이다. 진리는 영원불변하는 것이며 우주 어디에 적용시켜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다. 그러나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여 시공에 따라 다른 현상으로 나타난다.

 

 

인체 중에서는 머리와 가슴 사이가 가장 거리가 멀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머리는 앎을 대신해서 쓰인 단어고 가슴은 깨달음을 대신해서 쓰인 단어이다.

 

 

글쓰기의 점검

  1.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 부족한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이 없는가를 세심하게 살펴보고 바꾸는 것이 낫다고 생각되면 당연히 바꾸어 주는 것이 작가적 양심이다.
  2. 산만하지 않은가? 과욕을 떨쳐 버리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상태에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집중력을 유지하면서 고쳐 나가라.
  3. 지루하지 않은가? 구태의연한 표현이나 상투적인 내용들은 독자들을 지루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자신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철학이나 지식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특히 지적 허영이 지나치면 현학적인 전문용어나 관념어들을 남발하기 십상이다. 어떤 철학이나 지식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상태라면 그것을 소재로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글을 못 쓰는 것은 결코 죄악이 아니다. 그러나 글을 못 쓰는 사람이 글을 잘 쓰는 척 행세하는 것은 지탄 받아야 할 죄악이다.
  4.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가? 용두사미를 피하라
  5. 지나치게 이론을 의식하지 않았는가? 
  6. 독자를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았는가? 작가는 독자를 무시해서도 안 되고 독자를 신봉해서도 안 된다. 오로지 장인정신과 작가정신만으로 독창적인 문학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그래서 진실한 작가는 독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고독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사색하라. 사색은 명상의 출발이다. 현대인들의 의식은 대부분 자신의 마음 바깥으로 향해 있다. 그래서 언제나 긴장과 잡념에 시달린다. 마음을 자연스럽게 안으로 몰입시켜 고요한 상태에 이르게 하고 어떤 대상과 자신을 합일시키는 경지로 들어가라.

 

 

나이는 결코 숫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나이는 아픔을 발효시키고 지혜를 숙성시킨다. 산도 나이를 먹어야 생명체들과 조화하는 성정을 가지게 된다. 그대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되기를 소망하지 말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평지가 되기를 소망하라. 한 글자 한 문장이 그대가 허무는 살과 뼈가 되기를 소망하라. 그대가 허무는 살과 뼈들 속에서 수 많은 생명과 영혼들이 무성하게 자라오르기를 소망하라.

 

 

우주의 중심에서 쓰여지는 글들은 조화로울 수밖에 없고 조화로울 수 밖에 없는 글들은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좋은 글을 쓰려면 예술의 본성도 아름다움에 있고 우주의 본성도 아름다움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향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똥 싼 종이에서는 똥내가 난다는 말이 있다.

자신이 어떤 것들을 가까이 하느냐에 따라 인품도 달라진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대가 어떤 인연을 만나든 상관하지 않고 향내가 나는 글을 쓸 수만 있다면 적어도 그대에게는 악연이 없다. 하지만 그러한 경지를 획득하지 않았다면 가급적이면 좋은 물을 찾아 다니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라.

 

 

글에도 기운이 있다. 증오가 담긴 글이 담긴 쌀밥이 먼저 부패한다. 전쟁, 욕에는 경음과 격음이 대부분

 

 

이외수의 문장 백신

  1.  (증세) 완성된 글을 읽어 보니 도처에 어색한 표현들이 눈에 뜨인다.
    (처방) 글에도 기혈의 순환이 있다. 기혈의 순환이 순조롭지 않으면 글도 중병에 걸려서 생명을 잃게 된다. 욕심과 가식과 허영은 기혈의 순환을 방해한다. 진실에 입각해서 글을 쓰는 습관을 기르지 않으면 완치되지 않는다.
  2. 아무리 보아도 문장이 어색하다. 한 문장 안에 두 가지 이상의 수식어를 쓰지 않았는가. 섣불리 수사법을 남발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수식어를 제하거나 수사법을 제거해 보라. 특히 수사법을 쓸 때는 적절한 단어에 속성을 부합시켰는가를 확인해 보라.
  3.  위의 방법을 다 써 보아도 여전히 문장이 어색하다. 과감하게 전문장을 삭제해 버려라.
  4.  문장이 어느 한 부분에서 중단된 채 진전되지 않는다. 거기서 지문을 중단하고 내용을 연결시키는 대사를 삽입해 보라. 또는 거기서 한 단락을 끝내고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라.
  5.  글만 쓰면 급격히 피로감이 엄습한다. 휴식과 명상을 취한 다음 재도전하라.
  6.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글이 무미건조하다. 열심히 사랑을 하고 열심히 연애편지를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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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환의 <정호승을 노래하다>라는 앨범을 자주 듣는다.
앨범에 수록곡 중 『수선화에게』와 『우리가 어느별에서』를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시는 노래가 되고, 마음에 울림이 되고, 눈물이 되어 흐른다.


[본문발췌]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그루 나무와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
나무 그늘에 앉아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
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나무 그늘에 앉아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



꽃 지는 저녁』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윤동주의 서시』

너의 어깨에 기대고 싶을 때
너의 어깨에 기대어 마음놓고 울어보고 싶을 때
너와 약속한 장소에 내가 먼저 도착해 창가에 앉았을 때
그 창가에 문득 햇살이 눈부실 때

윤동주의 서시를 읽는다
뒤늦게 너의 편지에 번져 있는 눈물을 보았을 때
눈물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어이 서울을 떠났을 때
새들이 톡톡 안개를 걷어내고 바다를 보여줄 때
장항에서 기차를 타고

가난한 윤동주의 서시를 읽는다
갈참나무 한 그루가 기차처럼 흔들린다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인가
사랑한다는 것은 산다는 것인가



정동진』

밤을 다하여 우리가 태백을 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밤을 다하여 우리가 새벽에 닿은 까닭은 무엇인가
수평선 너머로 우리가 타고 온 기차를 떠나보내고
우리는 각자 가슴을 맞대고 새벽 바다를 바라본다
해가 떠오른다
해는 바다 위로 막 떠오르는 순간에는 바라볼 수 있어도
성큼 떠오르고 나면 눈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그렇다
우리가 누가 누구의 해가 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서로의 햇살이 될 수 있을 뿐
우리는 다만 서로의 파도가 될 수 있을 뿐
누가 누구의 바다가 될 수 있겠는가
바다에 빠진 기차가 다시 일어나 해안선과 나란히 달린다
우리가 지금 다정하게 철길 옆 해변가로 팔짱을 끼고 걷는다해도
언제까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있겠는가
동해를 향해 서 있는 저 소나무를 보라
바다에 한쪽 어깨를 지친듯이 내어준 저 소나무의 마음을 보라
네가 한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기대었던 내 어깨처럼 편안하지 않은가
또다시 해변을 따라 길게 뻗어나간 저 철길을 보라
기차가 밤을 다하여 평생을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평행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 굳이 하나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평행을 이루어 우리의 기차를 달리게 해야 한다
기차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늘 혼자 남는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정동진은 울지 않는다
수평선 너머로 손수건을 흔드는 정동진의 붉은 새벽 바다
어여뻐라 너는 어느새 파도에 젖은 햇살이 되어 있구나
오늘은 착한 갈매기 한 마리가 너를 사랑하기를



고래를 위하여』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푸른 바다가 고래를 위하여
푸르다는 걸 아직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지

고래도 가끔 수평선 위로 치솟아올라
별을 바라본다
나도 가끔 내 마음속의 고래를 위하여
밤하늘 별들을 바라본다



리기다소나무』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은 한 그루 리기다 소나무 같았지요
푸른 리기다소나무 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던 바다의 눈부신 물결 같았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자마자
당신이 가장 아름다운 솔방울이 되길 원했지요
보다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솔가지가 되어
가장 부드러운 솔잎이 되길 원했지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나서 비로소
혼자서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알았지요
사랑한다는 것이 아름다운 것인 줄 알았지요



당신』

당신을 만나러
서울구치소로 가는 밤길에 함박눈이 환희 길을 밝힙니다
눈송이들은 눈길을 달려가는 어린 쥐들의 눈동자인 양 어여쁘고
당신이 기대어 잠들던 벽들은 길이 되어
추운 나무뿌리들의 가슴을 쓰다듬고 있습니다
언젠가 당신을 만나고 돌아오던 날
눈길에 십자고상 하나 던져버렸던 일이 부끄럽습니다
이제 곧 나무를 떠난 나뭇잎들은 돌아옵니다
적게 가질수록 더 많이 갖게 된 나뭇잎들은 썩어 다시 싹을 틔웁니다
당신은 상처입을 때까지 사랑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아직도 바람에 흔들리는 까닭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새벽별들이 가끔 나뭇가지에 걸려 빛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나무뿌리들의 고요한 기쁨 때문입니다



첫마음』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봐
해가 떠도 눈 한번 뜰 수가 없네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봐
해가 져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네



풍경 달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갈 줄 알아라



자국눈』

지상에 내리는 눈 중에서
가장 어여쁜 눈은 자국눈이다
첫사랑처럼
살짝 발자국이 찍히는 자국눈이다

어머니 첫사랑 남자를 만날 때마다
살짝살짝 자국눈이 내렸다지
그 남자가 가슴에 남긴 발자국이
평생 자국눈처럼 지워지지 않았다지



첫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 곳』

첫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 곳은
너와 처음 만났던 도서관 숲길이다
아니다

네가 처음으로 무거운 내 가방을 들어주었던
버스 종점이다
아니다

버스 종점 부근에 서 있던
플라타너스 가지 위의 까치집이다
아니다

네가 사는 다세대주택 뒷산
민들레가 무더기로 피어나던 강아지 무덤 위다
아니다

지리산 노고단에 피었다 진 원추리의 이피리다
아니다

외로운 선인장의 가시위다
아니다

봉천동 달동네에 사는 소년의 똥무더기 위다
아니다

초파일 날
네가 술을 먹고 토하던 조계사 뒷골목이다
아니다

전경들이 진압봉을 들고 서 있던 명동성당 입구다
아니다

나를 첫사랑이라고 말하던 너의 입술 위다
그렇다

누굴 사랑해본 것은 네가 처음이라고 말하던
나의 입술 위다
그렇다



입산』

너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너는 산으로 들어가버렸다
너를 향해 급히 달려갔다
너는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버렸다

나는 한찬 길가에 앉아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시들어가는 미들레 꽃잎을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길은 끝이 없었다
지상을 떠나는 새들의 눈물이 길을 적셨다
나는 그 눈물을 따라가다가
네가 들어간 산의 골짜기가 되었다

눈 녹은 물로
언젠가 네가 산을 내려올 때
낮은 곳으로 흘러갈
너의 깊은 골짜기가 되었다



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결혼에 대하여』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알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 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깍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깍아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 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반지의 의미』

만남에 대하여 기도하자는 것이다
만남에 대하여 감사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아름답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순결하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언제나 첫마음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사랑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에도 외로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꽃이 진다고 울지 말자는 것이다
스스로 꽃이 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가난하자는 것이다
처음과 같이 영원하자는 것이다



달팽이』

내 마음은 연약하나 껍질은 단단하다
내 껍질은 연약하나 마음은 단단하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듯이
달팽이도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

이제 막 기울기 시작한 달은 차돌같이 차다
나의 길은 어느새 풀잎에 젖어 있다
손에 주전자를 들고 아침 이슬을 밟으며
내가 가야 할 길 앞에서 누가 오고 있다

죄없는 소년이다
소년이 무심코 나를 밟고 간다
아마 아침 이슬인 줄 알았나 보다



나뭇잎을 닦다』

저 소나기 나무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가랑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봄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기뻐하는 것을 보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고이고이 잠드는 것을 보라
우리가 나뭇잎에 안은 먼지를 닦는 일은
우리 스스로 나뭇잎이 되는 일이다
우리 스스로 푸른 하늘이 되는 일이다
나뭇잎에 앉은 먼지 한번 닦아주지 못하고 사람이 죽는다면
사람은 그 얼마나 쓸쓸한 것이냐



사막』

들녘에 비가 내린다
빗물을 듬뿍 머금고
들녘엔 들꽃이 찬란하다
사막에 비가 내린다
빗물을 흠뻑 빨아들이고
사막은 여전히 사막으로 남아 있다
받아들일 줄은 알고
나눌 줄은 모르는 자가
언제나 더 메말라 있는
초여름
인간의 사막



마음의 똥』

내 어릴 때 소나무 서 있는 들판에서
아버지 같은 눈사람 하나 외롭게 서 있으면
눈사람 옆에 살그머니 쪼그리고 앉아
한 무더기 똥을 누고 돌아와 곤히 잠들곤 했는데
그날 밤에는 꿈속에서도 유난히 함박눈이 많이 내려
내가 눈 똥이 다 함박눈이 되어 눈부셨는데
이제는 아무 데도 똥 눌 들판이 없어
아버지처럼 외롭고 다정한 눈사람 하나 없어
내 마음의 똥 한 무더기 누지 못하고
외롭고 쓸쓸하다



새벽의 시』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다
나뭇잎이 나무의 눈물인 것을
새똥이 새들의 눈물인 것을
어머니가 인간의 눈물인 것을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다
나무들의 뿌리가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새들이 우리의 더러운 지붕 위에 날아와
똥을 눈다는 것이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알았다
거리의 노숙자들이 잠에서 깨어나
어머니를 생각하는 새벽의 새벽이 되어서야
눈물의 고마움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들』

아버지는 석 달치 사글세가 밀린 지하셋방이다
너희들은 햇볕이 잘 드는 전세집을 얻어 떠나라
아버지는 아침 출근길 보도 위에 누가 버린 낡은 신발 한 짝이다
너희들은 새구두를 사 신고 언제든지 길을 떠나라
아버지는 페인트칠할 때 쓰던 낡고 때묻은 목장갑이다
몇 번 빨다가 잃어버리면 아예 찾을 생각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는 포장마차 우동 그릇 옆에 놓인 빈 소주병이다
너희들은 빈 소주병처럼 술집을 나와 쓰러지는 일은 없도록 하라
아버지는 다시 겨울이 와서 꺼내 입은 외투 속에
언제 넣어두었는지 모르는 동전 몇 닢이다
너희들은 그 동전마저도 가져가 컵라면이라도 사먹어라
아버지는 벽에 걸려 있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진 고장난 벽시계다
너희들은 인생의 시계를 더이상 고장내지 말아라
아버지는 동시상영하는 삶류극장의 낡은 의자다
젊은 애인들이 나누어 씹다가 그 의자에 붙여놓은 추잉껌이다
너희들은 설가 서로에게 깨끗한 의자가 되어주어라
아버지는 도시 인근 야산의 고사목이다
봄이 오지 않으면 나를 베어 화톳불을 지펴서 몸을 녹여라
아버지는 길바닥에 버려진
붉은 단팥이 터져나온 붕어빵의 눈물이다
너희들은 눈물의 고마움에 대하여 고마워할 줄 알아라
아버지는 지하철을 떠도는 먼지다
이 열차의 종착역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짐을 챙겨 너희들의 집으로 가라
아버지는 이제 약속할 수 없는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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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처럼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도 있지만,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천지 차이다.


[본문발췌]


기억은 실물을 덮어버린다. 풀은 초록색이라는 기억, 사람의 팔은 양쪽이 같다는 지식이나, 눈은 둘이요 코는 하나라는 정보 등은 그림의 진실을 수용하지 못하게 한다. 교양에 복종하지 않는 천진함, 대상의 고유한 진실을 파악하는 어린아이의 눈이 그림을 그림으로 보게 한다. 그림을 보되 겉모양만 보는 사람은 달을 가리켰으되 달을 쳐다보지 않고 손가락을 보는 사람과 같다.


강요배의 풍경에서 가장 극적으로 요동치는 소자(素子)는 '바람'과 소금기가 코끝에 스치는 '습기'이다. 어둑한 날의 우울감이 밴 색조에다 그 심리적 무게를 지탱하는 밀도 높은 터치가 신산스런 효과를 자아내고 있으며, 거기에 눈에 뵈지 않는 바람과 눅눅한 습기까지 포착하는 작가의 눈길. 풍경은 그저 바라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간단없이 뒤척이게 한다.

마파람, 강요배, 캔버스에 유채
바람 타는 나무, 강요배. 2013
파도, 강요배. 1995년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한광석 : 오방정색, 오방간색


'세상에서 가장 짙푸른 쪽색은 리비아의 렙티스 마그나 앞 지중해 색이다' - 한광석의 쪽빛 무명

'예술이란 하루아침의 얄팍한 착상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재치가 예술일 수는 더욱 없는 것이다. 참으로 나자깨나 앉으나 서나, 그것만을 생각하고 그것만을 위해서 한눈 팔 수 없는 외로운 길을 심신을 불사르듯 살아가는 그 자세야말로 정말 귀한 예술의 터전이 된다.' - 혜곡 최순우


수묵화 : 희고, 검고, 마르고, 축축하고, 진하고 옅은
칠하지 않는 종이는 흰생, 먹을 더하면 검은색, 그리고 바짝 마른 색과 축축한 색, 마지막으로 진하고 옅은 색... 그래서 먹은 육채(六彩)라고 했다.


삼여도, 세가지 여유란 '밤'과 '겨울' 그리고 '흐리고 비오는 날'
책을 읽지 않는 게으름뱅이가 왜 독서하지 않느냐는 추궁에 '농사짓느라 시간이 없어서'라고 대답했다. 그럴 때 꾸짖는 말이 '학문하는 데는 삼여만 있으면 충분하다'



화중유시(畵中有詩), 송나라 때 화원을 뽑는 시험은 참으로 흥미롭다. 뭐뭐를 그려보라는 주문 없이 아예 시를 지어 출제하게 했다.

  • '꽃을 밟고 달려운 말발굽의 향기.', 흙바람을 따라 날아오르는 한 무리의 나비 그림이 입선. 꽃향기가 날리는 곳에 어찌 나비가 없을까보냐는 시적인 발상
  • '한적한 산골에 강 건너는 사람 하난 없고 외로운 나룻배 종일토록 떠 있네', 뱃머리에 다리 괴고 누워 피리 부는 노인을 그린 사람이 장원

단 한 순간에 초월의 경지로 나아가는(一超直入) 그림이 수묵화이다. 그것은 손끝의 재주가 아니라 정신의 깊이에서 탄생한다. 장인의 현란한 기교가 행세하는 세상, 정신의 고매함이 밴 수묵화가 그늘진 외지에서 배회하고 있다는 상상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대중문화의 이미지는 알게 모르게 화가의 밑천이 되고 있다. 그래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통찰은 대중문화의 우산 속에서 참말이다.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게 된다.


산새 소리가 뜻이 있어 아름다운가? -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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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와 배낭의 무게, 없으면 채우고 싶고 채우면 무거워 힘들어 하는 것.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대부분 최소의 무게로 자전거에 오른다. 가볍게, 속도에 맞춰 주변을 둘러보며 떠나는 자전거 여행!

 

이 책을 읽으며 95년 6월말 인천에서 춘천까지 자전거 여행이 떠오른다. 중간에 서울 잠실 인근에서 1박, 경춘가도를 따라 시원하게 달려 중도유원지에서 캠핑, 돌아오는 길 가평 근처에서 조그만 사고와 망가진 자전거, 우역곡절 끝에 경기도 이천인지 광주인지에서 다시 1박으로 대략 3박4일 일정, 지금같은 자전거길이 없어 일반국도를 차와 같이 달렸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러나 아직도 또렷한 한 가지는 돌아오는 길 여관방 TV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뉴스를 봤던 것이다. 바퀴가 휠 정도로 망가진 자전거를 고쳐서 다시 인천까지 간 결과만 기억할 뿐, 그 과정이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본문발췌]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바퀴를 굴리는 몸은 체인이 매개하는 구동축을 따라서 길 위로 퍼져나간다. 몸 앞의 길이 몸 안의 길로 흘러 들어왔다가 몸 뒤의 길로 빠져나갈 때, 바퀴를 굴려서 가는 사람은 몸이 곧 길임을 안다. 길은 저무는 산맥의 어둠 속으로 풀려서 사라지고, 기진한 몸을 길 위에 누일 때, 몸은 억압 없고 적의 없는 순결한 몸이다. 그 몸이 세상에 갓 태어난 어린 아기처럼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길 앞에서 곤히 잠든다.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기면서, 다가고 나서 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탄하다. 그래서 자전거는 내리막을 그리워하지도 않으면서도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

 

 

설요,

세상으로 돌아가는 노래

꽃피어 봄 마음 이리 설레니

아, 이 젊음을 어찌할거나

 

 

바다의 짠맛과 햇볕의 향기로 소금은 탄생한다.

 

 

시는 인공의 낙원이고 숲은 자연의 낙원이고 청학동은 관념의 낙원이지만, 한 모금의 차는 그 모든 낙원을 다 합친 낙원이다. 차는 살아 있는 목구멍을 넘어가는 실존의 국물인 동시에 살 속으로 스미는 상징이다. 그래서 찻잔 속의 자유는 오직 개인의 내면에만 살아 있는, 가난하고 외롭고 고요한 소승의 자유다. 찻잔 속에는 세상을 해석하거나 설명하거나 계통을 부여하려는 허세가 없다. 차는 책과 다르다. 찻잔 속에는 세상을 과장하거나 증폭시키려는 마음의 충동이 없다. 차는 술과도 다르다. 책은 술과 벗을 부르지만 차는 벗을 부르지 않는다. 혼자서 마시는 차가 가장 고귀하고 여럿이 마시는 차는 귀하지 않다. 함께 차를 마셔도 차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일상생활 속에서 공간의 의미를 성찰하는 논의는 늘 무성하다. 개항이래 이 나라에 건설된 주택과 빌딩과 마을과 도시들은 모두 자연과 인간을 배반했고, 전통적 가치의 고귀함을 굴착기로 퍼다 버렸으며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의 편이 아닌 공간에 강제수용되어 있다는 탄식이 그 무성한 논의의 요점인 듯하다. 비바람 피할 아파트 한 칸을 겨우 마려하고 나서, 한평생의 월급을 쪼개서 은행 빚과 이자를 갚아야 하는 사람이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속에 찬바람이 분다. 마소처럼, 톱니처럼 일해서 겨우 살아가는 앙상한 생애가 이토록 밋밋하고 볼품없는 공간 속에서 흘러간다. 그리고 거기에 갇힌 사람의 마음도 결국 빛깔과 습기를 잃어버려서 얇고 납작해지는 것이리라.

아파트에는 지붕이 없다. 남의 방바닥이 나의 천장이고 나의 방바닥이 남의 천장이다. 아무리 고층이라 하더라도 아파트는 기복을 포함한 입체가 아니다. 아파트는 평면의 누적일 뿐이다. 천장이고 방바닥이고 부엌 바닥이고 현관이고 간에 그저 동일한 평면을 연장한 민짜일 뿐이다. 얇고 납작하다. 그 민짜 평면은 공간에 대한 인간의 꿈이나 생활의 두께와 깊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생애의 수고를 다 바치지 않으면 이런 집에서조차 살 수가 없다. 공간의 의미를 모두 박탈당한 이 밋밋한 평면 위에 누워서 안동 하회 마을이나 예안면 낮은 산자락 아래의 오래된 살림집들을 생각하는 일은 즐겁고 또 서글프다.

 

 

 "무릇 사람에게는 그침이 있고 행함이 있다. 그침은 집에서 이루어지고 행함은 길에서 이루어 진다. 맹자가 말하기를 인(仁)은 집안을 편하게 하고 의(義)는 길을 바르게 한다고 하였으니, 집과 길은 그 중요함이 같다. 길에는 본래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 신경준, '도로고'

신경준에게 길은 삶의 도덕적 가치와 상징들 사이로 뻗어나간 공적 개방성의 통로이다. 이 공적 개방성의 통로 위에서, 길을 가는 일은 달리기가 아니라 '행함'이고, 길의 의로움은 집의 어짊에서 출발해서 집의 어짊으로 돌아온다.

 

 

배낭이 무거워야 살 수 있지만, 배낭이 가벼워야 갈 수 있다. 그러니 이 무거움과 가벼움은 결국 같은 것인가. 같은 것이 왜 반대인가. 출발 전에 장비를 하나씩 빼 버릴 때 삶은 혼자서 조용히 웃을 수밖에 없는 비애이며 모순이다. 몸이 그 가벼움과 무거움, 두려움과 기쁨을 함께 짊어지고 바퀴를 굴려 오르막을 오른다.

빛 속으로 들어가면 빛은 더 먼 곳으로 물러가는 것이어서 빛 속에선 빛을 만질 수 없었고 태백산맥의 가을 빛은 다만 먼 그리움으로서만 반짝였다.

 

 

산하는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생애의 일부가 된다. 사람의 시야 속에서 그 산들은 멀어질수록 커지고, 커질수록 순해진다. 그것은 한바탕의 완연한 구조와 체계를 갖춘 산세다. 멀어져야 비로소 완연해지는 산이 사람에게로 다가온다. 그것은 움직이는 산이다. 움직이는 산이 사람에게로 다가와 사람의 마음속에서 새롭게 자리잡는다. 그렇게 해서 산하는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생애의 일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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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여행, 자유, 책... 마음을 설레게 하는 단어들!
나 스스로에게도, "Buen Camino!"


[본문발췌]


책은 여행과 마찬가지로 낯선 세상을 보여주고, 세상과 내가 사는 이곳의 차이를 드러낸다. 차이를 인정하면 삶이 유연해지고, 단단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상은 한 권의 책, 여행하지 않는 자는 그 책의 한 페이지만 읽을 뿐"이라고 했다. 여행은 책을 읽는 일이다. 여행을 하지 않고 책을 읽지 않으면 세계의 한구석만을 맴돌 뿐이다.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카페를 점찍어 운명을 같이한다면 그 카페를 '소유'한 거나 다름없다. 물론 그 카페도 당신을 소유한다. - 노엘 라일리 피치, <파리 카페>. 파리의 셀렉트 카페


미치오는 인디언이 사냥한 거대한 사슴, 무스도 "죽었다"고 말하지 않고 "자연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인디언 축제에서 무스 머리를 통째로 고아 우려낸 머리고기수프를 먹으면 "무스의 몸뚱이가 천천히 내 몸속으로 스며들어, 나는 무스가 되고 무스는 사람이 된다"고 했다. 알래스카에서 우리는 언젠가 자연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며, 그렇기에 슬픈 일이 닥쳐도 자연을 보면서 견딜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은 우주적으로 순환하는 삶을 살지만, 인간적으로는 직선적인 삶을 산다. 우리에게는 시작과 끝이 있고,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끝을 향해 나아간다.


나 있은들 어떠하고 없은들 어떠하리. / 노래하는 새들이 내 목소리 이어받을 테고, / 저 하늘은 언제나처럼 당당할 것이며, / 수많은 사람이 여기 머물진다... - 몽골의 시에서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기란 쌀알이 바늘 끝에 얹히는 것만큼이나 어렵단다. 얘야, 그래서 사람으로 살고 있는 지금의 삶이 그토록 소중한 거란다.


'엘 부르고 라네로'의 대피소 벽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순례자여, 당신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길이다. 당신의 발걸음, 그것이 카미노다.' 나는 카미노에서 걷고, 식당을 찾고, 숙소를 찾았따. 그게 매일매일 내가 한 일의 전부다. 대단하다고 할 만한 일들은 아니다. 하지만 카미노의 하루하루는 모험으로 넘쳐났다. 나는 카미노에서 현재를 살았다. 하루하루를 어제와 다르게 보낸 그 시간은 모험이었다. 나는 내가 세운 계획대로 카미노를 걸으려 했고, 그러지 못할 때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가 모든 걸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이었다. 자신의 어깨로 자기를 질 수는 없다는 것을 카미노는 나에게 확실히 가르쳐주었다.


자연의 속성은 인간의 속성과 대비된다. 인간의 불안과 질투와 시기는 자연의 안정감과 영속성과 고요함으로 위로받는다. 워즈워스에게 도시에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혼잡과 불안을 안고 사는 것을 의미했다. 도시 사람들은 먹고살 만한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것을 원했다.


유유상종이란 말을 쓰는데 여행이 바로 그런 겁니다. 시시한 여행을 할 때는 시시한 사람을 사귀지요. 얽매인 데 없이 좋은 여행을 할 때는 격이 높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높은 인격의 사람을 만나는 게 곧 좋은 여행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행 중에 얼마나 다양하게 만났느냐가 중요하지요. 그것이 여행의 풍성함이라고 생각합니다. - 후지와라 신야, <인도방랑> 중에서


차를 몰고 떠날 때, 벌판에 서 있는 사람들이 점점 멀어지다가 결국엔 작은 점이 되어 사라져버리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너무도 거대한 세계가 우리에게 덮쳐오는, 그것이 이별일까? 그럼에도 우리는 하늘 아래 펼쳐질 또 다른 광기 어린 모험을 향해 돌진한다. - 잭 케루악, <On the Road>


"걱정하기를 엄청 좋아하고, 거리를 계산하고, 오늘 밤은 어디서 잘지 고민하고, 기름 값이랑 날씨, 목적지까지 어떻게 갈지를 생각하지?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도착할 텐데 말이야. 고민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 같아. 뭐가 정말 급한지도 모르는 채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해. 네 영혼이 말이야. 어디로 가지? 무엇을 하나? 뭘 위해서? 그런 고민을 하느니 잠이나 자는 게 좋을 거야."


나는 늘 자유를 꿈꾼다. 하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고, 매번 어디로 가야 할지 재기만 한다. 그렇게 신중한 나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는 걸까?


삶을 오랫동안 생산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감정적으로나 존재적으로 그 지지기반을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 그 한 가지 방법은 보헤미안의 국제도로 위에 있는 한 정거장에 내려서 그 도시에 머물며 글을 쓰는 것이다. 이를테면 바르셀로나 또는 프라하의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산책하다가 가끔씩 발길을 멈추고 글을 쓰는 삶의 방식, 그렇게 글 쓰는 인생을 축복하는 것이다. - 에릭 메이슬, <보헤미안의 샌프란시스코>


보헤미안은 방랑, 창조성, 자유인이라는 세 단어로 표현된다. 보헤미안적인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나 곳을 떠나기 쉽다. 방랑이나 일탈을 위해서가 아니다. 단지 자신이 이해받을 곳을 찾아 보헤미안의 국제도로를 서성인다. 보헤미안의 꿈은 단순하다. 획일적인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신적 방랑자가 되어 삶을 창조하며 거리낌 없이 살고 싶다.


한현주, <on the road>, 태즈매이니아. 캠퍼밴을 타고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며 아이러니하게도 어딘가 정착해 사는 꿈을 꾼다. 정착해 사는 것은 길 위에서의 시간과는 다른 삶을 창조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일만하며 살 것! 그때 사는 것은 조용한 모험이자 특권이다. 한국을 떠나야만 여해을 하는 게 아닌 것처럼 길은 집 밖에만 있지 않다. 길에는 시작과 끝이 있을까? 전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끝까지 가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 마음이 들 곳을 찾는다. 내가 꿈꾸는 목가적 세계가 어디에 있고, 어디에 정착할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안다. 길 위에 서 있건 일상을 살아가건, 내가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지를 안다면 삶을 사랑하고 창조하며 즐겁게 살 수 있다.


베르나르 포콩 사진, 앙토넹 포토스키 글, <청춘, 길>. 여행은 아름답다. 여행은 두렵다. 여행은 설렌다.... 청춘은 아름답다. 청춘은 두렵다. 청춘은 설렌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지 못해도 괜찮다. 어차피 구하고 싶은 걸 구할 수 없는 게 청춘이다. 방황을 아름답다고 용인하는 대가다. 청춘을 소유할 순 없다. 그래서 아름답다. 마치 흘러간 여행처럼....


중년의 남자는 청춘을 그리워하고, 청춘만 되찾으면 될 것 같은 생각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눈물 없이 그 시절을 살아낼 수 있을까? 다시 아프고, 다시 눈물이 흐르고... 아물어갈 것이다. 청춘은 방황이니까.


헤이든 헤레라, <프리다 칼로>. 인생이 주는 모든 것을 취하시오. 재미있고 즐거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나이가 들면 자기가 무엇을 잃었는지 알게 된다오. 어릴 때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취하지 못한다면 잃어버린 것과 다름없소. 당신이 정말 나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면, 나에게는 당신이 기쁨을 누리는 것보다 더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긴긴 겨울의 깊은 어둠 속에서 발견한 작은 희망의 불빛에 감사한다. 여름 태양 아래 충만한 에너지를 온몸으로 만끽할 시간들을 상상하며 기다린다. 그 안에 고독의 그림자가 함께한다. 기다림과 꿈꾸는 상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힘은 고독이며 혼자일 때 가능하다.


고장 난 차는 고쳐 쓰고, 발레신발이 해지면 기워 신는다. 사람들은 어디서나 춤을 춘다. 어디를 가나 노랫소리, 타악기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거리는 언제나 축제 같다. 어디서나 노인밴드와 마주친다. 노인들이 홍대의 밴드마냥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리듬에 맞춰 상체를 숙였다 폈다 하며 춤을 준다. 쿱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여유 있어 보이는 게 아니라 가난하지 않기 때문에 여유롭다. 20년 가까운 경제봉쇄 속에 쿠바는 오히려 식량자급률이 95퍼센트를 넘은 것으로 알려졌따. 아바나 근교에만 수천 개의 유기농 농장이 있어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견학을 갈 정도다. 굶을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농사를 지어야 했고, 농약이나 비료를 구할 수 없으니 '본의 아니게' 자타가 공인하는 유기농이 되었다. 기가 막힐 정도로 역설적인 상황이지만, 이런 쿠바의 모습에서 생태주의자들은 또 다른 꿈을 꾼다. '인류의 미래'라는 꿈이다.


도시 곳곳의 텃밭에서 허브가 자라고, 차를 버린 사람들이 자전거로 거리를 달린다. 생태주의자라면 머릿속으로 그려볼 법한 이상적인 미래상이 쿠바에서는 현실로 펼쳐지고 있다. - 요시다 타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그림을 그린 캔버스가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캔버스보다 더 가치가 있다. 그 이상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 <반고흐, 영혼의 편지> 중에서


빈센트는 자신을 옭아매는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출을 꿈꾸었으나 용기가 없었다. 하루하루 고단한 일상으로부터 훌훌 털고 일어나지 못하는 우리처럼. 빈센트에게서 우리가 감동받는 이유는 참다운 인간에게서 전해지는 풍부한 인간미 때문이지, 그가 미쳤다거나 광기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풍경, 정물, 인물을 간단하고 쉽게, 그리고 빠르게 그렸다. 보통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보게끔, 누구나 좋아하게끔... - 박홍규, <내 친구 빈센트> 중에서


사람의 기억은 긍정적일 때 추억이나 그리움이 된다. 추억이 더깊어지고 얽힌 사연이 많다면 향수가 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한순간의 기억이 삶의 지향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기억을 지키는 일은 삶이 지향점을 지키는 일이 된다. - 강동진, <빨간 벽돌창고와 노란전차>


<극락타이생활기>의 저자 다카노 히데유키에 따르면, 태국 사람들의 기질은 사바이, 사누크, 사도아크라는 세 단어로 표현된다. '사바이'는 건강하게, '사누크'는 즐겁게, '사도아크'는 편안하게라는 뜻이다. 여기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뜻의 '마이펜라이'를 덧붙이면 의미가 좀 더 분명해진다. 건강하고, 즐겁고, 편한하게 산다.


나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내 능력 밖이라 생각했다. 그림은 그리지 않고, 그리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능숙하지 않고 서툴러도 그리는 게 먼저라는 걸 몰랐다. 벼룩시장에서 본 호박 그림이 생각난다. 잘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쪼개진 호박 한 덩어리를 그리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인다. 만년 가난한 예술가인 내 친구는 이런 그림을 보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꽃잎을 주워모아 액자를 만든 이에게 얼마나 잘 만들고 못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자기 생활을 풍요롭게 할 뭔가를 만들 줄 안다면, 그는 예술가다. 예순이 되고 일흔이 넘어 벼룩시장에서 노래를 하고 연주를 하며, 잘 그리거나 말거나 쪼개진 호박을 캔버스 앞에 두고 붓을 드는 사람은 얼마나 근사한가.


나는 '죽음이 우리 둘을 갈라 놓을 때까지'란 말로 맹세한 사랑이나 생활은 어디까지나 결론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목적은 아니라고 믿고, 찰나적이고 싶다. 늘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결정하고 싶다. 지금까지는 남편과 같이 있다. 그것이 전부다. 그리고 같이 있는 동안은 함께하는 생활을 마음껏 맛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헤어질 때가 오면 조금은 울지도 모르겠지만 '죽음이 우리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 한다면, 아마 더 울지도 모르겠다. - 에쿠니 가오리,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


'다른 곳'은 공간에 있어서 미래다. '다른 곳'과 '내일' 속에 담겨 있는 측정할 수 없는 잠재력은 모든 젊은 가슴들을 뛰게 한다. 떠난다, 문을 연다, 깨어 일어난다, 라는 동사들 속에는 청춘이 지피는 불이 담겨 있다. 이것은 모든 젊은 사람이 가지는 최초의 욕망이다. - 김화영, <행복의 충격>


나는 간혹 달랑 지도만 들고 숙소는 나선다. 진리는 나를 자유케하지만 정보는 나를 옭아매기 십상이다. 때로 가이드북은,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은 여행자를 가이드북의 동선 안에서 패키지관광객처럼 만들어버린다. 요즘은 정보가 너무 많아 문제다. 정보는 여행을 카피하게 만든다. 게다가 그 정보가 다 양질인 것도 아니다. 가이드북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혹시 보았는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라나는 그 잘 익은 별을? 혹은 그 넘실거리는 바다를? 그때 나지막이 발음해보라. "청춘." 그 말 속에 부는 바람소리가 당신의 영혼에 폭풍을 몰고 올 때까지. - 김화영, <행복의 충격>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직선적인 시간을 살지만 지구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전을 하며 낮과 밤이 반복되고, 공전을 하며 사계절이 반복되는 것처럼, 앞으로 몇백 몇천 년이 지나도 지구는 돌고 또 돌 뿐이다. 조몬삼나무는 알려준다. 오늘에서 내일로 흐르는 시간뿐만 아니라, 순환적인 시간도 있다는 걸....


지구를 제집처럼 돌아다니며 목숨을 걸고 배우는 것도 의미 있는 삶의 방식의 하나다. 하지만 그런 삶을 대다수인 우리가, 더욱이 일생동안 계속할 수는 없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 배움과 동경의 여행은 끝나고, 여기에 사는 게 시작된다. 여기에 산다고 하는 것은 인생여행의 참다운 시작이다. 여기에 산다고 하는 것은 호화로운 즐거움을 찾는 게 아니다. 그런 즐거움이 있어도 물론 나쁘지 않다. 그러나 내게는 일상 속에서 계속되는 즐거움이야말로 가장 좋다. 좋은 땔감을 때면 자연스레 불길도 좋다. 좋은 기분으로 불을 때면 저절로 좋은 불길이 생긴다. 그날은 손수 골라온 좋은 땔감으로, 그리고 좋은 기분으로 불을 지폈기 때문에 흔히 볼 수 없는 불길이 조용히 타올랐다. 겨우 목욕물을 데우는 일 뿐이기는 하지만, 그런 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인생은 완벽하고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듯 느껴지곤 한다. - 야마오 산세이, <여기에 사는 즐거움>


하루하루를 창조적으로 산다면 일상이 곧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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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한 것도 필요하지만 결과는 행동을 해야만 얻을 수 있다. 신성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문 밖을 나서야 하듯이...


[본문발췌]


요즘 넘쳐나는 '취미'란 한결같이 동호회처럼 특정 모임에서 세련되고 완벽한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기존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방식을 현실 속에서 성찰한다거나 변화시키는 활동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취미의 세계에는 자신을 위협하는 건 없지만 삶을 요동치게 만들 무언가를 맞닥뜨리거나 발견하게 해 주는 것도 없다. 가슴이 무너지는 실망도,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환희나 흥분도 없다는 말이다. 무언가를 해냈을 때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성취감과 충실감은 상당한 비용과 위험이 따르는 일 안에 있으며, 거기에는 늘 실의와 절망도 함께한다. 결국 우리는 '일'을 통해서만 이런 것들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


벤처 정신을 지닌 사람은 원칙적으로 소수파이다. 누구나 하려고 하는 것, 누구나 이미 하고 있는 것, 이미 수요가 포화 상태인 것, 가치가 정해져 있는 것 따위에 본능적으로 등을 돌리는 자질이 없다면 벤처에 뛰어들 수 없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정보와 지식, 네트워크를 넓히려 부단히 노력해야겠지만 항상 소수파의 태도를 견지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기성'의 물결에 휩쓸려 버리기 십상이다. 도요타도 소니도 혼다도 창업자는 사회의 소수파였다. 소규모로 외롭게 출발하여 다수파로의 편입을 고집스럽게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벤처의 원칙이다.


연애할 때에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고, 결혼한 뒤에는 함께 미래를 본다는 말이 있다. 부부는 공동체의 최소 단위이자 인생의 동반자라 할 수 있다. 혼자서도 할 수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신뢰와 전망을 공유할 때 이상적인 동반자로서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사람의 뇌는 목표를 지니고 있을 때 활성화된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정해 준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목표는 몸에 활력을 준다. 목표를 이루려는 사람은 웬만해서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감기 따위도 걸리지 않는다. 목표는 인생의 모든 국면에서 '전제'가 되는 것이어서 이에 대한 공감도가 마련된 사회라면 목표를 지니는 데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필요 없다. 목표는 있는 게 없는 것보다 나은 그런 것이 아니라 물이나 공기와 마찬가지로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필수적인 것이다. 목표가 없다면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모든 일에서 우선순위도 매길 수 없다. 또 당연한 말이지만 목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며 다른 누군가가 정해 줄 수 있느 것도 아니다. 스스로 세우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자동차 사고로 상대에게 물리적인 상처를 입혔다거나 복잡한 도로에서 남의 발을 밟았을 때처럼 사건의 경위가 분명한 경우라면 모를까, 비즈니스와 관련하여 문제가 생겼거나 의혹이 제기된다면 자초지종과 경위, 그리고 자신의 관련 여부부터 분명하게 밝히는 게 순서이다. 덮어놓고 사과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경위는 어떠한지, 원인은 무엇이고 자신은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 책임은 누가 지며 손해는 얼마나 되는지, 어떻게 대응했고 사태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는지, 언제쯤이나 해결될 것이고 재발을 막기 위해 어떤 대책을 취해야 하는지, 손해배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준비하고 이번 사고에 누가 어떤 책임을 질 것인지 등에 대해 가능한 신속하고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 사죄보다 훨씬 중요하다.


업무나 개인사에서 스스로 매기는 일의 우선순위가 그 사람의 인생인 것이다.


직장인들이 전직을 후회하지 않기 위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대목은 자기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는지를 따져 보는 일이다. 역설적이게도 제발 마음을 돌려 사표를 찢으르며 상사와 동료들이 나서서 붙잡는 사람이어야 전직이 합당한 것이다.


투자란 어떤 것의 현재 가치와 미래 가치를 따져보고 자신의 결정으로 자원을 투입하는 것이지 분위기에 편승하여 돈을 쏟아 부었다가 높은 수수료만 물거나, 수익은커녕 원금마저 까먹고 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선 투자의 초보자는 "떼돈 벌 수 있는 기회를 남에게 알려 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라는 격언을 명심해야 한다. 투자라는 걸 생각할 때 중요한 건 시간 감각이다. 예컨대 지금의 자신과 5년 뒤의 자신을 상상해 보라.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자원이다. 이 평등한 자원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5년 뒤 자기 모습이 바뀐다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투자의 첫걸음이 아닐까 한다. 투자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투자 대상은 주식이나 상품, 부동산의 현재 가치와 미래 가치를 어느 정도는 비교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생존을 위한 비결이나 비책은 없지만 기본 전략은 있다. 불황일수록 바깥을 의식하는 전략이 그것이다. 경기 침체니 디플레니 하는 달갑지 않은 경제고들이 나오면 아무래도 사람들은 안으로 움츠려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때야말로 무턱대고 '버티기'만 고집할 일이 아니다. 자신과 외부의 관계를 살펴보며 '바깥을 향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신선한 공기를 들이 마시기 위해서는 문 밖으로 나서야 한다.


업무상의 문장은 스토리가 필요하지 않은 만큼 한층 더 정확하고 간결해야 한다. 물론 그런 글을 잘 쓰는 비법은 따로 없다. 멍청한 문장을 쓰는 사람은 대체로 글쓰기가 서툴러서가 아니라 어떤 내용을 전하려 하는지를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엇보다 글쓰기의 전제는 상대에게 반드시 전하려 하는 게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빼어난 문장, 화려한 문장, 품격 있는 문장이라는 것은 없다. 정확하고 간결한 문장이라는 이상만 있을 뿐이다.


요컨대 아이디어란 섞어서 짜 맞추는 '조합'이지 새롭게 발견해 내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기획을 할 때 매력적이고 신선한 '조합'은 어떻게 해야 나올 수 있을까. 짜 맞춤의 소재는 자신의 머릿속에 저장된 기억과 새롭게 입수하고 준비한 외부 자료이다. 아이디어의 발상력이란 이처럼 흩어져 있는 기억들을 샅샅이 '검색'하고 적절한 것을 의식의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힘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힘은 근육과 마찬가지로 부단히 단련하지 않으면 퇴화한다. 그리고 발상력을 단련하고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오랜 시간 집중하여 생각을 뽑아내는' 정면 돌파 말고는 없다. 어쩌면 생각에 골몰해 있는 동안에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수 있다. 뇌가 비명을 지를 정도로 머리를 짜내다가 잠시 그 문제에서 떨어져 있을 때, 마치 깊은 호수의 밑바닥에서 작은 기포가 생겨나듯 아이디어의 핵이 떠오르는 것이다. 결국 아이디어란 언제나 직감적으로 떠오르는데, 직감이란 '오랜 시간 집중하면서 머리를 쥐어 짜는 것', 그러니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몰두의 연장선 위에서만 작동한다.


일을 하다가 겪는 실패는 '단순한 실수'가 대부분이다. 준비가 부족하고 능력이 모자라서 실패하면 신뢰에 금이 가고 질책이 쏟아진다. 그런 실패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뭔가 배울 수 있는 경우란 도전할 가치가 있는 일에 온 힘을 다해 매달렸지만 지식이나 경험, 정보가 부족하여 실패했을 때 뿐이다. 본디 대부분의 사람은 도전할 가치가 있는 것과 만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심지어 무엇에 도전해야 좋을지조차 모른다. 도전할 만한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뭔가 얻는 게 있는 실패를 맛보기 위해서는 도전할 무엇과 맞닥뜨려야만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한 전제 조건이 '도전에 대한 굶주림'이다. 언젠가 우연히 마주할 그 어떤 기회에 대한 갈망이 없다면 설령 마주치더라도 그것이 운명적 만남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스쳐 지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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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처음 심은 오크라, 집에서 먹고 남을 양이 수확되니 보관을 어떻게 할지 고민할 정도다.

수확시기를 조금만 넘겨도 씹기 힘들정도로 질겨지니 적당한 시기에 따서 냉동보관을 해야하는데, 이여사님이 오크라 피클이라는 별미를 찾아냈다.

 

아삭아삭 식감도 좋고, 상큼한 맛도 좋고, 위염과 위궤양 소화에 도움이 된다는 점액질 뮤신성분이 피클 국물까지 점령한다.

 

초여름이 지나며 토마토, 참외 등이 집 식구들끼리 소화할 수 없을 정도라 주변과 나누어 먹더라도 남는 경우가 많은데 토마토 피클과 참외 장아찌로 짧은기간 저장하며 먹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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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모이는 곳에 권력이 만들어 지기에 언론과 미디어가 편향, 왜곡되지 않은 사실에 기반해 진실을 투명하고 책임감 있게 전달해야 하는 이유다. 학교, 회사, 교회 등 사람이 모이는 일상 공간에서 시간적 제약과 공간적 배치가 어떻게 권력과 연결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본문발췌]


관계는 사람간의 거리를 결정한다. 그리고 사람 간의 거리는 공간의 밀도를 결정한다. 공간의 밀도는 그 공간 내 사회적 관계를 결정한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을 바꾸었다. 가까웠던 사람도 멀리 떨어지게 만들었다. 극장, 야구장, 공연장에 갈 수가 없게 되었다. 사람 간의 간격이 바뀌자 사람 간의 관계가 바뀌었고, 사람 간의 관계가 바뀌자 사회도 바뀌고 있다.


우리가 보는 많은 권력은 공간이 만드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일반적으로 시선이 모이는 곳에 위치한 사람은 권력을 가진다.


시공간적 제약이 곧 사회 시스템이다. 공간이 만드는 사회 시스템이 주는 제약은 보이지 않게 사람을 조종한다. 이때 공간이 만드는 권력의 크기는 모이는 사람의 숫자와 비례한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는 공간에 의해서 더 큰 권력이 만들어진다.


과거 4인 가족 시대에는 부엌과 식탁이 하나로 묶였다면, 일이인 가구 시대에는 식탁과 책상이 하나로 묶이는 것이 맞다. 자연스럽게 부엌, 식탁, 거실이 한데 모여 있는 쓰리베이 아파트의 평면은 미래에는 거실과 침실, 식탁과 책상이 하나로 묶이는 공간으로 재구성되는 것이 맞다.


기존의 집은 잠을 자는 곳은 침실, 쉬는 곳은 거실,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으로 공간을 분리했다. 그리고 그 공간 안에 각각 다른 가구를 배치했다. 기능에 따라 공간과 가구를 나누는 것은 근대적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현대 사회는 기능에 따라 물건이 나누어지기보다는 합쳐지는 추세다. 소비와 행동의 개인화와 기술적인 발전은 공간의 의미를 바꾸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 맞추어서 가구들의 통폐합 혹은 융합이 되어 새로운 가구가 나오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처음에는 가구에서 시작해서 나중에는 건축 평면상 방의 구획이 바뀌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아파트의 5원칙: 1가구 1발코니, 소셜 믹스 공원(아파트 단지 1층 지면을 공원, 상업시설, 문화시설로 사용할 수 있게 개방), 기둥식 구조, 복합 구성(건물 내에 작은 위성 학교, 공유 오피스 등을 작게 나누어서 주거와 섞어서 배치), 친환경적인 목구조


알타미라 동굴 벽화와 횃불, 고딕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테마파크의 AR/VR같이 어느 시대나 당대 최첨단 기술은 상상을 공간화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이 모두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내가 만든 '공간과 권력의 제1 원칙'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사람을 모아서, 한 방향을 바라보게 하면 그 시선이 모이는 곳에 권력이 창출된다"는 것이다.


시선이 모이는 곳에 권력이 생겨난다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시선을 많이 받는 사람은 미디어에 노출되는 사람들이다. 정해진 시간에 하루에 한 시간씩 시선의 집중을 받는 뉴스 앵커맨이 대표적인 사례다. 인스타그램 팔로워 숫자가 높을수록 권력이 높은 사람이고, 유튜브 동영상 조회 수가 높을수록 권력자가 된다. 시대가 바뀌고 기술이 바뀌면 플랫폼은 바뀌지만 시선이 모이는 곳에 권력이 만들어진다는 법칙은 그대로 유지된다.


시간과 공간적인 자유가 적을수록 그 시간과 공간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주체가 권력을 갖는다. 종교 행위의 시공간적 측면에서 기독교는 집단적인 종교, 불교는 개인적인 종교로 볼 수 있다. 위치적인 측면에서도 두 종교는 차이가 크다. 불교의 절은 대부분 산속에 있고 기독교의, 교회는 상가에 있다. 가까운 도심 속에 공간이 있는 기독교는 접근성 면에서 커다란 우위를 가졌다.


일반적으로 권력은 예식과 규율을 강조한다. 예식과 규율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주는 것이다. 종교의 권력, 학교 선생님의 교권, 직장 상사의 권력은 예배 참석, 등교, 출근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각종 예식, 등교, 출근, 예배 참석 같은 복잡한 행위들의 중심 원리는 '자유의 억제'다. 권력은 누군가의 행동의 자유를 억제하는 시스템이 만들어질 때 강화된다. 그리고 그러한 시스템은 권력의 구조에 새롭게 진입한 사람들을 의심의 여지없이 순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시공간을 통한 권력 형성의 시작은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만드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주제는 학교에서 온라인 수업의 비중이 늘어날 때 학생들에게 어떻게 대면 대인 관계와 공동체 훈련의 경험을 줄 수 있을 것인가이다. 이를 성공하지 못한다면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회인을 양산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누군가에게 조종되기 쉬운 대중으로 구성된 사회이거나,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사회 구성원들의 세상이 되기 쉽다. 둘 다 위험한 일이다. 따라서 온라인 수업의 비중이 커질수록 오프라인의 대화가 있는 수업 양이 늘어나야 한다. 학생 두세 명과 선생님의 토론 수업일 수도 있고, 동네 체육센터의 스포츠 동아리를 통해서일 수도 있고, 주변 이웃을 돕는 프로그램이나 다양한 독서 토론회의 모습일 수도 있다.


천장고가 낮은 지하 도로망으로 자율 주행 운송 로봇이 다니면 에너지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우선 로봇만 다니는 낮은 천장고의 터널은 트럭이 다니는 터널보다 단면이 10분의 1 이상 작기 때문에 건설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 요즘은 지하 터널을 기계가 뜷기 때문에 공사 기간과 비용이 과거만큼 많이 들지 않는다. 둘째, 작은 크기의 운송 로봇은 에너지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지금 우리는 1킬로그램짜리 피자를 배달할 때에도 60킬로그램 이상의 사람이 100킬로그램이 넘는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한다. 결국 161킬로그램을 이동시키는 에너지가 소비된다. 택배 트럭은 배달 내내 다른 물건들도 싣고 다녀야 한다. 운송 로봇은 그런 낭비를 혁신적으로 줄일 수 있다. 10킬로그램밖에 되지 않는 자율 주행 로봇으로 피자를 배달한다면 사람까지 운반을 안해도 되기 때문에 가볍게 11킬로그램만 이동하면 된다. 에너지 효율이 16배 좋아지는 효과가 생긴다. 게다가 5G 기술을 이용한 자율 주행 로봇은 헤드라이트도 켤 필요가 ㅇ벗고, 사거리 신호등도 없이 교차로를 지나다닐 수 있다. 이동 속도와 흐름이 인간이 운전하는 교통수단과 비교가 안 되게 효율적이다. 지하 자율 주행 로봇 전용 도로망은 지하 하수도, 지하철, 지하 광케이블망처럼 경쟁력 있는 미래 도시의 필수 인프라 구조가 될 것이다.


사람은 지상으로 다니고 물건이 지하로 다니는 세상이 물건이 지상으로 다니고 사람이 지하로 다니는 세상보다 나은 세상이다. 물론 배달 시스템이 지상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도로는 온갖 물류 트럭들로 정신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인간은 천천히 걸을수록 좋고, 물류는 빠르게 이동할수록 좋다. 이 둘은 근본적으로 상충된다.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보내는 것이 지상을 '인간을 위한 느린 공간'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다.


월세로 사는 것은 내 부동산 자산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내 노동의 대가가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대신 그 돈은 부동산을 소유한 누군가의 자산으로 축적된다. 월세는 21세기에 존재하는 새로운 형태의 소작농이다. 사람들은 임대 주택에서 월세로 살면서 돈을 모아 나중에 집을 사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데, 문제는 집값이 계속 올라간다는 것이다. 정부는 매년 최소 2퍼센트 이상의 경제 성장을 목표로 노력한다. 통화량이 많이지니 인플레이션은 계속되고, 돈의 가치는 점점 떨어진다. 같은 돈을 은행에 저금해 놓으면 돈의 가치는 점점 떨어진다. 반면 부동산은 유한한 자산이기 때문에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 집값은 오른다. 부동산 버블이 없다고 하더라도 가만히 있어도 매년 집값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내가 만약에 2퍼센트의 경제 성장률보다 빠르게 월급을 모을 수 있다면 나중에 집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돈을 모으는 속도보다 집값이 더 빠르게 오른다면 영원히 내 집 마련은 힘들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간의 부동산 자산 가격을 보면 경제 성장률보다 더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연봉과 집값 상승은 눈사람과 같다. 눈을 뭉쳐서 눈이 쌓인 골목길에서 굴리는 것과 연탄을 하나 가져와서 굴리는 눈사람 크기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크다.


사실을 냉정하게 보기 이전에 성급하게 윤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선입견을 만들고 감정에 휘둘리기 쉽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옳고 그름의 판단을 대신해 주는 누군가에게 조종될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마녀사냥이나 인민재판이 대표적인 사례다. 결국 그런 윤리적 판단을 내렸던 종교계와 공산당만 권력을 갖게 되는 세상이 됐고 다수의 일반인들은 자신이 조종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권력에 착취당하는 세상이 되었다.


어느 한 집단이 너무 많은 부를 소유하게 되면 부패하게 된다. 중세 시대 유럽의 전체 부, 즉 부동산과 동산 포함 모든 경제적 자본의 3분의 1이 교회 소유였고, 교회 권력이 부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흥미로운 점은 현 시대에 중국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부가 중국 전체 부의 3분의 1이라는 점이다.


집값이 폭등하고 은행 대출 없이 집을 사야 하는 세상이 되면 두 집단은 좋아한다. 바로 대자본가와 정치가들이다. 빈부 격차가 커질수록 자본가는 자본의 집중을 얻게 되고, 정치가는 집을 소유할 수 없어서 임대 주택을 구걸하는 표밭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악당을 잡으면 세상이 좋아진다고 믿지만 실제로 세상에는 악당과 그 악당을 손가락질하면서 그 상황을 통해서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챙기는 위선자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악당과 위선자 사이에서 국민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기적인 인간이 만드는 사회에서 권력은 쪼개서 나눠 가질수록 정의에 가까워진다. 돈은 권력이다. 따라서 부동산 자산은 권력이다. 부동산이 정부나 대자본가에 집중되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 나누어서 소유할 수 있는 사회가 더 정의로운 사회다. 내 아이를 위해서 거대 권력을 가진 정치가나 기업가가 착하기를 기대하기보다는 부동산 자산이 나누어진 사회를 만들어 물려주고 싶다.


2016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은 상을 수상하기에는 젊은 나이인 40대 후반의 칠레 건축가 안레한드로 아라베나에게 돌아갔다. 그가 디자인한 저소득층을 위한 주거 '엘레멘털'의 아이디어는 독특하다. 저소득층은 돈이 없기 때문에 비싼 집을 살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그는 집을 절반만 지어서 분양했다. 이렇게 해서 집을 마련한 사람은 입주 후 돈을 벌면서 점점 자신의 집을 완성해 나갔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자 각각의 집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동네는 더욱 살기 좋은 동네가 되었고 집값이 오른 만큼 입주자의 자산으로 남게 되었다. 동네에 대한 애착이 있고 이웃에 대한 존중이 있었기에 이곳의 공동체는 살만한 곳으로 성장했다. 건강한 사회는 집을 소유하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에게 집을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는 사회다. 그런데 보통 이런 사람들은 시작할 수 있는 자본이 없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새로운 대출 제도가 필요한 것이다.


획일화가 되면 가치 판단의 기준은 정량화된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집값, 성적, 연봉, 키, 체중 같은 정량화된 지표로 사람들을 평가한다. 우리나라 중산층의 기준은 5천만원 이상의 연봉에 30평형대 이상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고, 2천cc 이상의 중형차를 끄는 것이다. 모든 기준이 정량화된 지표다. 반면에 프랑스 같은 경우에는 중산층의 기준이 나만의 독특한 맛을 낼 줄 아는 요리를 할 수 있다, 즐기는 스포츠가 있다,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다, 외국어를 할 수 있다 같은 정성적 기준들이다. 이렇게 가치관의 차이가 나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라이프 스타일이 전체주의적이라 부를 만큼 획일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량적 가치관으로 행복을 측정하는 나라에서는 극소수의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


대중들은 다양한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고 싶어 한다. 다양성 추구는 인간의 본능일 것이다. 우리는 보통 나와 반대되는 성향의 이성에게 매력을 느낀다. 다양한 유전자의 융합으로 만들어진 후손이 더 강한 생존력과 면역 체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경험은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을 만든다. 그리고 그 기준은 미래를 만든다.


인류 문명의 역사는 시공간 확장의 역사다. 기차를 발명해서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을 확장했고, 전화기 발명으로 내가 의사소통할 수 있는 공간의 영역을 확장했다. 도로와 인터넷 통신망은 멀리 떨어진 사람들 사이를 연결해 주는 '공간 압축' 도구다. 이들은 더 많은 사람이 만나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 주고, 상거래를 가능하게 만든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다. 하지만 역사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도 미래는 없다. 미래는 미래에 대해서 구체적인 꿈을 꾸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시선의 초점을 과거에서 방향을 돌려, 미래를 향하길 바란다. 미래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오늘의 선택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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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재력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시민은 깨어 있어야 하고, 불합리하고 부당한 권력에는 불복종으로 맞서야 한다.

 

 

[본문발췌]

 

 

'진실은 진실한 행동에 의해서만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 - 톨스토이

 

 

실제로 수천 년 전부터 그랬지만, 지식인의 역할은 민중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이며 무지한 존재, 결국 프로그램된 존재로 만드는데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민중을 소극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지식인, 지배계층에게 저항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홍보와 광고, 그래픽 아트, 영화, 텔레비전 등을 운영하는 거대 기업의 주된 목표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보다 인간 정신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인위적 욕구'를 만들어내서, 대중이 그 욕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로 대중은 서로 소외도어 갈 뿐입니다. 이런 기업의 경영자들은 아주 실리적으로 접근합니다. "대중을 삶의 표피적인 것, 즉 소비에 몰두하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인공의 벽을 세우고 대중을 그 벽 안에 가둬 격리시키려 합니다. 신문과 방송, 광고와 예술 등 어떤 수단을 사용하든 간에 선전 자체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선전수법이 나날이 교묘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울 뿐입니다. 예전부터 그 역할은 지식인의 몫이었습니다. 학식과 지식을 지닌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자유란, 어떠한 환경이나 속박 그리고 어떠한 기회에도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다' - 세네카

 

 

"내게 중요한 것은 표현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허락되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는 생각만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정직하다면 반대편의 주장까지도 수긍할 수 있어야 합니다."

 

 

'힘에 의해서만 유지되고 있는 권력은 때로 공포에 떨게 될 것이다.' - 코슈트

 

 

최강대국들,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 금융기관과 국제기관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거대한 네트워크를 맺고 있습니다. 실제로 요즘 들어 대부분의 경제 활동이 공급자 중심으로 이뤄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공급자 중심의 경제로 진행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강력하고 전제적인 힘을 지닌 소수 집단이 초강대국을 등에 업고, 때로는 국가의 정책결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행사하면서 일부 경제분야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시민의 권한을 개인 기업에 양도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입니다. 다국적 기업은 국민 위에 군림하지만, 국민 앞에 책임지지는 않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사회민주주의 사상과 다소 급진적인 민주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기업의 지배가 위협받자, 선전은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여론과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언론기관과 홍보기관이 총동원되었습니다. 기업계 지도자의 표현대로 '개똥철학' 즉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유행하는 소비재와 같은 천박한 것'에 집착하는 인생관을 노동자들에게 심어주면서 장시간 노동을 기꺼이 수용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연민, 타인과의 연대 등과 같은 위험한 생각을 잊게 만들었습니다. 요컨대 인간의 가치를 완전히 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중의 역할은 '참여자'가 아니라, '눈앞에 벌어지는 일에나 관심을 갖는 구경꾼'의 역할이어야 했습니다. 통찰력 있는 지식인이라면 이런 흐름을 꿰뚤어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은 입을 다문 채 대중을 종속시키려는 이런 음모에 가담합니다. 그들의 밥줄이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테크놀로지에서 최첨단 영역은 공공 분야가 전적으로 재정을 떠맡고 있습니다. 반도체, 마이크로프로세서, 대부분의 최첨단 테크놀로지가 공공 분야에서 지원한 연구의 산물입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공 분야의 창의적 발상으로 공공자금으로 개발된 이런 모든 것은 당연히 공공의 재산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민간 기업에 양도되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처럼 말입니다.

 

 

'큰 재물에는 반드시 큰 불평등이 따른다. 한 사람의 부자가 있으려면 오백 명의 가난한 사람이 필요하다.' - 애덤 스미스

 

 

금융시장과 투기시장도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들의 투자 방향을 짐작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방향으로 달려갑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지수가 미친 듯이 널뛰기를 합니다.

 

 

투자에는 두 가지 법칙이 있다. 하나는 "패닉은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패닉에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 로빈 하넬(Robin Hahnel) '패닉 퍼스트 Panic First'

 

 

현재의 경제체제가 붕괴되다면 그 이유는 금융위기나 생태환경의 재앙일 가능성이 크다 - 촘스키

 

 

외국에 투자되는 자본은 대부분이 경영 지배권의 확보를 위한 돈입니다. 공공기업의 민영화는 공공기업을 민간 기업이나 다국적 기업에 넘기려는 속임수일 뿐입니다. 이런 민영화는 대체로 부패한 정부에서 주로 시행됩니다.

 

 

매일 거대 자본이 컴퓨터를 통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돈이 새로운 자산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그저 주인이 바뀔 뿐입니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투자되는 자본은 소규모에 불과합니다.

 

 

버뮤다 군도, 버진 군도, 파나마에 투자라는 명목으로 국경을 넘어 이동한 액수의 거의 절반이 회계상의 이동이었다. 회계상의 이동이 존재하는 이유는 부자나라들이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기업이 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국민의 몫을 훔칠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입니다. 국가의 역할이 바로 그것입니다.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국가의 역할입니다.

 

 

무엇보다 국민이 깨어나야 합니다. 내가 미디어, 학교, 지배 계급의 문화에 반대하며 민중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여론의 압력이 더해질 때는 어떤 일이라도 가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는 온갖 범죄를 감싸주는 외투다 - 메난드로스

 

 

제3의 길을 주장하는 지배계급은 체제순응적인 지식인들을 동원해서 이 이념을 멋지게 색칠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습니다. 대중이 저항하고 싸워서 때때로 승리를 거둘 때야 진정한 변화가 있을 뿐입니다.

 

 

세계화는 미국식 모델을 전 지구에 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화의 목표이고 결론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칸트

 

 

대중은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데 전념할 것이고, 순간적으로 유행하는 소비재와 같은 피상적인 것에 열중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단계의 정책 결정에서 '참여자'가 아니라 '구경꾼'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노동 현장과 그 이상에 관련된 정책 결정에서도 말입니다.

 

 

사회가 자유로워질수록 지배계급은 공포심을 조장하고 선전에 열을 올립니다.

 

 

우리 사회는 줄곧 변해 왔습니다. 하지만 사회에 관련된 개념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회구조와 계급구조는 변했지만 특정집단의 이해 관계, 지배 관계, 사회의 계층구조, 의사 결정의 단계 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런 모순이 계급간의 갈등을 낳는다고 생각합니다.

 

 

지배구조와 계급구조는 어떤 형태를 띠더라도 의혹의 대상으로 삼아 그 정당성을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행동하기 위해서는 그 대가를 기꺼이 치루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노동조합으로 조직화된다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희생을 수월하게 넘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을 파괴하려는 음모가 다각도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선전보다 이런 파괴공작 때문에 국민이 혁명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양심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 가운데 유일하게 매수되지 않는 것이다. - 필딩

 

 

텔레비전 사회자는 프롬프터를 읽어대고 있을 뿐입니다! 텔레비전 사회자는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미용실로달려갑니다. 그리고 프롬프터가 있습니다. 대개 그를 대신해서 생각까지 해 주는 젊은 여자가 조작하는 프롬프터 앞에 앉습니다. 프롬프터에 질문이 나타납니다. 그럼 그는 마치 자기가 직접 생각해낸 질문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출연자에게 묻습니다.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당신 생각을 세 문장으로 집양시킬 기회가 생긴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것 같은 슬로건을 반복하는 데 만족할 것이냐, 아니면 당신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후자를 택하면 당신은 미친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신 주장을 뒷받침해 줄 최소한의 증거도 제시할 시간적 여유가 허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의 속도는 우리에게 사건의 중심에 살고 있다는 환상을 품게 해 줍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선전 효과에 100퍼센트 노출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동시성과 즉각성은 사건의 흐름에 우리 몸을 그대로 내 맡기게 만듭니다. 현재의 인식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속도가 아닙니다. 깊이의 상실입니다. 피상적 수준에 머물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기억을 지워 없애려고 고안된 것입니다.

 

 

어려운 단어들을 골라 쓰며 복잡하게 말해야 지식인 대접을 받으면서 특권층처럼 군림할 수 있습니다. 그런 지식인들이 회의에 초대받고 존경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강연에 알맹이가 있습니까? 바로 이런 현상이 문제입니다. 쉬운 말로도 더 깊은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내용이라도 쉬운 말로 풀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언제나 악인보다는 선량한 사람만을 학살한다. - 소포클레스

 

 

미국은 변덕스럽고 보복을 잊지 않는 국가로 인식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세계 모든 국가가 미국을 두렵게 생각할 테니까요. 지나치게 합리성을 따지는 국가로 인식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입니다.

 

 

양식良識만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평등과 자유를 추구한다는 믿을 만한 몇가지 근거가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 폭력을 일심는 친위대원이 될 수도 있고 성인군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환경, 그리고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15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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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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